자기는 군자가 아니라며 자존심까지 버리고
지팡이 달라는 선비에게 “나도 부처님 아니야”
요즘도 가끔 그 다완이 생각난다. 어느 스님이 부랴부랴 떠나면서 방의 뒷정리를 부탁하길래 청소를 하다가 잡동사니 뭉치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뒹굴고 있는 다완을 발견했다. 마침 약사발이 하나 여벌로 필요했던지라 ‘잘됐다’ 하고 챙겨두었다. 그 다완을 야무지게 씻었다. 햇볕에 말린다고 내놓고 보니 두툼한 두께에서 오는 넉넉한 촉감과 수더분한 빛깔이 어우러져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제대로 만들어진 찻사발이었다. 오랫동안 여러 용도로 번갈아쓰며 내 손때도 탈만치 탄 어느 날이었다.
동창이 오랜만에 내 처소에 들렀다. 벽장문을 열면서 다구를 꺼내는데, 홀로 따로 놓여있는 그 다완을 힐끗 한번 쳐다보고서 만지작거리더니 달라고 했다. 주자니 아깝고 안 주자니 속가친구에게, 출가자가 되어 이까짓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없는 그런 진퇴양난의 어색한 상황이 잠깐 연출되었다. 한순간에 만 가지 생각이 교차하였지만 명분에 밀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 가져 가거라. 나도 주운 것이니(空手來 空手去로다).”
얼마 후 그 동창은 그 다완 대신에 이름깨나 떨치고 있는 인간문화재 도공이 만든 막사발 한 개를 인편을 통해 보내왔다. 그런데 숱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리 손때를 묻혀도 그 떠나버린 다완의 정서까지 대신해주지 못하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말 잘하는 조주 스님 같았으면 달라는 지팡이를 안 빼앗기고도 잘 얼버무려 위기를 넘기고서 기분 나쁘지 않게 친구를 돌려보낼 수 있었을 텐데….
조주 선사에게 어떤 선비가 찾아왔다. 그런데 스님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가 매우 좋아보였던 모양이다. 그 지팡이를 가만히 곁눈질하면서 물었다.
“부처님은 중생이 바라는 바를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당연히 교과서대로 “그렇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질문은 당연히 복선(伏線)을 깔고 있다. 선비는 ‘옳거니! 걸려 들었다’ 쾌재를 부르며 다시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제가 스님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달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이를 어쩌나. 산길 다닐 때 지팡이는 꼭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지팡이는 나무의 질도 질이거니와 누가 봐도 탐을 낼만큼 잘 생겼다. 게다가 손때가 반질반질 묻어 정(情)도 들만큼 들었다.
선사의 가풍대로 ‘여기 있소! 가지시오“ 해버리면 폼은 나겠지만 내심은 그게 아니다. 아끼는 까닭에 주기가 싫었던 것이다.
말을 가장 잘하는 선사로는 조주 스님을 으뜸으로 친다. 그래서 조주선(趙州禪)을 다른 말로 구피선(口皮禪)이라고도 부른다. 구피(口皮)란 입술을 말한다. 이는 말만 뻔지르하게 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을 언어로 가장 잘 표현한 어른이라는 뜻이다. 물론 임기응변에도 뛰어났다. 당신의 인색한 부분도 숨기면서 지팡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얼른 공을 선비에게 넘겼다.
“군자는 남이 좋아하는 것을 빼앗지 않는 법입니다.”
불법의 관점에서 조주 선사를 ‘부처님’이라고 후려치는 선비에게 공맹(孔孟)의 도리로 응수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선비의 말이 또 가관이다. “저는 군자가 아닙니다.”
무슨 수를 쓰든지 지팡이를 얻어가려는 심사로 유생의 자존심까지 다 팽개쳐 버렸다. 그렇다고 이 말에 져 줄 조주 스님이 아니다.
“노승도 부처님이 아닙니다.”
지팡이 하나를 두고 행세깨나 하는 선비와 이름깨나 날리는 스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한편으론 어린애들 같아 정겨웁기까지 하다.
그나저나 말 잘하는 주인을 만나지 못해 마을로 나가버린 그 다완은 잘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