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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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길잡이는 여러분 마음속에 있어요
한 철 날 때 부지런히 공부해서 깨달아야


깨달음과 믿음에 대해서

저는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문외한인데 제가 불교에 대해서 알고 있기로는,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로써 자기 자신을 깨닫는 종교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근데 스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주인공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깨닫는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주인공을 믿는 것과는 같은 것인지, 아니면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걸 좀 알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씨가 있는데 그 싹을 틔우지 못했다면 그 싹을 틔우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씨는 본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 현실의 내 마음이 과거의 마음과 동일해 가지고 내가 알아야 되니까 그 싹을 틔우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싹을 틔우기 위해서 생사윤회가 둘이 아니다, 크고 작은 게 둘이 아니다, 찰나 생활이 공해서 돌아가고 있는, 공한 주인공을 그대로 배우는 한마음이요, 한마음은 내려놓는 게 한마음이요, 어떤 걸 이름해서 나라고 할 수 없기에 공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공이라고 한 것이니까 우리가 깨달으려면 촉촉하게 물도 줘야 하고 흙도 골라 줘야 거기서 씨가 싹이 틔지 않겠습니까? 마른 땅에서 마른 씨가 어떻게 싹을 틔우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말하는 겁니다. 누구나가 그런 과정이 없이는 깨달을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화두를 받아 가지고도 ‘이 뭣고’ 하고선 그냥, 자기가 지금 움죽거리고 돌아가는 것을 알면서도, 지식과 학식이 충분히 들어갔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이게 뭣고 하고 10년을 있어 봐도 그것은 싹이 트이지 않습니다. 해결이 돼야 하는데 해결이 되지를 않습니다. 싹을 틔우려면 그대로 물을 주고 흙을 골라 주고 그러면서 지켜보는 겁니다. 그래서 싹이 트이면 그때부터 인제 기르는 거죠. 그 과정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깨닫는다 또는 주인공에다 맡겨 놓는다는 언어마저도 붙어서는 아니 됩니다. 깨달아야 되겠다 이런 것도 놔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말한다면 어떠한 쇠든 어떠한 쇠 부스러기든 다 용광로에 집어넣는 작업만 한다면, 그냥 그 작업만 하면 돼요. 뒤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 작업만 하면 자동적으로 쇠가 다시 생산이 돼서 나가니까요. 그 쇠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을 할 테니까요.
수박을 갖다 놓고 말입니다, 수박 거죽은 파랗고 그 다음 속은 하얗고 가운데는 빨갛고 씨가 있고, 이런 이론을 벌여 놓고 이론을 배우시겠습니까, 수박을 탁 잘라서 그냥 그 맛을 보시겠습니까? 어떤 거든지 오는 대로, 내 앞에 오는 것대로 용도에 따라서 그냥 잘라서 먹는 겁니다. 그럼 맛을 벌써 알죠. ‘이건 맛이 있구나. 이건 익었구나.’ 맛을 알면 그 씨는 내년 걱정은 하등 할 게 없죠, 씨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도, 내 속에 수박씨를 놔두고도 바깥에서 수박을 찾겠느냐는 겁니다.
수박씨는 바로 각자 나한테 있는 겁니다. 수박이 익으려면 싹이 있어야지 싹까지 끊어 버린다면 수박이 익겠습니까? 과정이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우선적으로 내 몸과 마음과 가정, 이 모두를 해 나가는 데만 한번 해 보세요. 그러다 보면 나중엔 우주의 탐험도 할 수 있으니까요. 우선 자기 자신을 믿고 하나하나 실험을 좀 해 보신다면 알게 될 일입니다.


영식독로에 대해서

무상계에 보면 ‘사람이 죽는 것은 사대 지수화풍 몸뚱이가 흩어지는 것이고 실지로는 영식독로라, 실지로 그 신령한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람이 죽는다는 그 말도 역시 한참 치우친 말이라고 느꼈습니다. 본래 몸이 허공신이기 때문에 뭐 죽는다 그런 자리가 전혀 붙지 않는다고, 몸뚱이라고 해도 몸뚱이라는 생각을 놓고 죽는다는 그런 생각 자체가 본래 없다면 ‘몸은 흩어져도 영식은 독로하다. 신령한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이런 말 자체가 오히려 치우친 말일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거에 대해서 가르침 주십시오.


한때 꽃이 피었다가 꽃이 시들지요. 그런데 그 나무에서 꽃이 피었다가 시들고 꽃이 피었다 시들 뿐이지 나무가 죽는 건 아니죠? 이파리다 꽃이다 이렇게 이름을 부르고 야단법석이지마는 꽃이 시들었다고 해서, 꽃이 떨어졌다고 해서 나무가 시들어 죽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대육신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원점에서 다시 꽃이 피듯이 생산이 되니 이 몸뚱이가 영원하다고 볼 수 있지요, 영원한 거예요. 그래서 몸뚱이가 본래 생겨난 바가 없기 때문에 죽을 것이 없다 이러는 겁니다. 이 세상에 모두가 영원한 거기 때문에, 불이 켜졌다가 없기 때문에 꺼진다도 없다고요. 그럼 생사에 대해서 ‘우리가 산다. 살아온 게 없기 때문에 죽어 갈 게 없다.’ 이거를 대치해서 봐라 이거예요. 태어나는 것도 이 자리, 죽어 가는 것도 이 자리, 이 자리를 한데 합쳐서 한번 놓으라 이거예요.
그래서 내 앞에 닥쳐오는 그 모두가 내가 죽어 가고 아프고, 병신이 되고 가난하고, 이러한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감사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공했으니까 그저 죽어야 사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살 길이 없습니다. 왜 죽어야 하느냐. 그렇다고 육신이 죽으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죽으라는 얘기입니다. 나는 예전부터 이런 얘기를 가끔 하죠. ‘죽어야 나를 볼 수 있느니라. 또 너는 너를 봤기 때문에 나를 볼 수가 있는 거지, 너로 하여금 나를 보는 거지 너가 없다면 나를 볼 수 없느니라. 네가 없다면, 네 자체의 주장자가 없다면 나를 똑똑히 볼 수가 없고, 네가 주장자가 있다면 내 주장자 네 주장자가 따로 없느니라.’ 하고요. 여러분의 그 진짜 길잡이는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체가 어떻게 해야만이 고(苦)라는, 업보라는 그 누명을 벗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자꾸 흔들리고 속고 이러지 마시고 내가 가고 싶으면 그냥 가는 겁니다. 어떠한 자갈밭이라도, 어떠한 가시밭이라도, 어떠한 낭떠러지라도 서슴없이 발을 떼어 놓을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이라야 됩니다. 그건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에 나올 때 나로 인해서 모든 걸 알았고, 내 몸속에 있는 인연에 따라서 모두 회전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악 조건이든 선의 조건이든 인연에 따라서 내 앞에 온 것이니까 나는 바로 배 위의 선장이다 이겁니다. 내 한생각에 모든 마음들은 따를 것이다, 그러면 한마음이다 이겁니다. 한마음의 고정된 관념으로서의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모든 생각에 의해서 찰나찰나 돌아가니 이것은 그 선장 하나마저도 없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갖은 각색으로 나올 때 여러분은 지금 고정되게 살아감이 아닙니다. 걸어올 때 뒷발자취가 없듯이, 금방 사랑하다가도 사랑을 팽개치고 일보러 가듯이, 일을 금방 팽개치고 또 사랑하듯이 이렇게 자식을 만나고 부모를 만나고,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그렇게 순간순간 만나고 보고, 듣고 말하고, 이렇게 옮겨 놓고 저렇게 옮겨 놓고, 시발점도 종점도 없이 간다 온다도 없이 그냥 이렇게 여여하게 흐르고 있는 겁니다.
죽는다 산다는 생사에도 끄달리지 마세요. 그것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노인이 죽어 가서 천도 좀 시켜 달라고 하니까 “본래 살아온 게 없다면 죽을 것도 없거니와….” 하고선 그냥 가거든요. 그러니 얼마나 천도해 달라고 한 사람이 무색하겠습니까마는 그거는 그 즉시에 요리가 된 것이고 그 즉시에 천도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보이는 물질 본위만 알지 보이지 않는 50%의 그 영향력은 모르고 사시기 때문에 자유권을 얻지 못하시는 겁니다. 서쪽으로 가면 나쁘니 이사 가지 마라, 부적을 가져라, 무슨 고사를 지내라, 차려 놓고 제사를 크게 지내라 이러는 것에 속지 마세요. 여러분이 그런 데 속는다면 한시도 벗어날 길이 없을 겁니다. 내가 가고 싶으면 갈 것이요, 내가 이날 갔으면 좋겠다 했으면 그게 법입니다. 부처님의 법이에요. 내가 집을 짓고 싶다 할 때에 거기 지으면 그냥 부처님의 법이에요. 내가 어디 걸렸다 안 걸렸다 이런 것을 논의하지 마세요.
아주 고귀한 보배 속에서 자기 마음이 나오는데, 찰나찰나 생각 나오는 그 자체가 바로 법음이 아닐까요? 영원한 생명은 가만히 있으면 부처고, 생각을 냈다 하면 법신이요, 몸을 움죽거렸다 하면 화신인데 모든 부처가 일체제불과 중생이 다 여러분 한마음 속에 들었거늘 여러분은 만날 그저 부처님 앞에 갖다 놓고, 부처님 한 분 아니라 수많은 데다 갖다가 놓고 빌어야만 자식과 남편과 부모가 잘되는 줄 아는 그러한 소치는 정말 그 법을 모르고 죄를 덮어쓰는 일입니다. 덮어씌워 주지도 말아야 하고 덮어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가랑잎과 같은 인간의 이 몸뚱이를 가지고, 우리가 가을에 낙엽이 져서 떨어진다고 해서 죽는다고 애석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린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만날 불이 들어와서 밝아 있다면 불이 꺼졌다 켜졌다 이런 언어도 붙지 않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죽는다 산다도 없습니다. 나무 이파리로 친다면 나무 이파리가 낙엽이 져서 떨어졌다고 해서 나무가 죽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듯이 나무가 흙에 가려서 자기 뿌리를 못 보듯이 사람도 천차만별의 속임수에 빠져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참자기를 못 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근본 뿌리 말입니다.


불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안녕하십니까? 저는 작년에 군에 입대해서 군법당을 다니다가 신교대에서 수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계첩을 보니 불명이 나와 있더군요. 불명은 어떻게 이름지어지는 건지 궁금합니다. 불명에 담긴 뜻이 현재 나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 있어 부족한 점을 앞으로 더 공부해서 채우라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계를 받았으면 이제부터는 실천을 하는 게 문제죠. 계율뿐만이 아니라 보시를 하는 것도 공심으로써 무주상 보시를 한다, 또 생명을 나와 같이 생각한다, 모든 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다가 덧붙이기로 말하자면 ‘남을 괴롭히지 말라. 남을 섭섭하게 하지 말라. 남을 아프게 하지 말라. 더도 덜도 말고 나와 같이만 생각하라.’ 이런 것을 실천하는 데 묘미가 있는 겁니다. 법명을 어떻게 받았든 ‘살생하지 마라.’ ‘도둑질 하지 마라.’ 이런 말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을 묵묵히 실천하는 것이 진실된 실천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글자로 이름만 불러서 한 게 아니라 마음의 뿌리와 더불어 결부가 돼서 한 거니까 일체제불의 마음과 한마음으로써 결부가 되는 거고 일체 만물 만생과도 더불어 같이 결부가 되는 거니까 그렇게 귀중하다는 겁니다. 또 그 이름을 안 받았더라도, 오계를 안 받았더라도 우리가 본래부터 그렇게 돼 있는 거니까 그대로 하고 가시는 분들은 그걸 안 받았어도 받은 거 이상 가게 되죠. 물론 받는 게 더 낫지만 말입니다. 여러 눈 아닌 눈, 손 아닌 손, 귀 아닌 귀, 몸 아닌 몸이 한데 어우러져서 향을 피워 드리니까요.
우리는 한 철 살다가 한 철 모습을 없앱니다. 그리고 또 그 모습은 다시 진화하고 변화해서 다시 형성이 됩니다.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잘하면 상세계로 차원이 주어집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모습을 타고나지 않아도 될 수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도리를 알았다면 실천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 법을 올바로 알려면…

불법의 대의가 무엇인지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부처님 법을 올바로 알 수 있는 것인지요?


불교라 하면 그저 스님네들만 가진 줄 알지 마세요. 이 세상천지가 다 불교예요, 생명 가진 거는 다. 지수화풍도 생명을 가졌으니까 다 불(佛)이구요. 그래서 불, 불, 불! 천체가 생명 가진 거는 불 아닌 것이 없죠. 그래서 불성 없는 게 없다 이런 말이죠.
불성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그 불성이 있기 때문에, 즉 말하자면 뜻으로 통하고, 말로 통하고, 마음과 마음으로 통해서 온 세계가, 아니 우주 삼라만상이, 우주뿐만 아니라 과거 미래 현재 이것이 그냥 돌아가는 그 자체를 우주라고 한다면 ‘삼천대천세계의 우주 천하’ 이렇게 할 수 있죠. 우주 천하! 그것이 한생각에 한 찰나에 돌아갈 수도 있는 거죠. 한 찰나입니다. 그래서 항상 빛보다 더 빨리 돌아간다고 그러죠. 또 빛은 가다가도 하차할 수가 있지만, 찰나의 마음이라는 것은 바로 땅속이나 천지 어디든 깊어서 못 간다, 넓어서 못 간다, 높아서 못 간다가 없어요. 과거로도 돌아갔다가 미래로도 갔다 현재로도 왔다가, 마음대로 자유자재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뜻을 들어서 알고 있으면, 그렇다더라 하고만 있어도, 요다음에 나올 때는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몸을 어떻게 가지고 나오느냐 하는 것도 자기가 자유자재할 수 있죠. 정말 몸을 어떻게 가지고 나오느냐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건 이차적이고, 일차적으로는 몸을 내가 어떻게 가지고 나와서 어떠한 소임을 맡느냐. 그리고 그 소임을 맡아서 얼마만큼 사람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고, 먹여 살릴 수 있고, 얼마만큼 사람을 만들 수 있겠느냐 이런 것도 있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될 수 있으면 모든 생명들을 다 살릴 수 있는 그런 계기를 만드시길 바라고, 또 만백성을 다 거느리고 살 수 있는 그런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번 거쳐야…. 그렇게 해도 부처님이죠, 뭐. 꼭 머리만 깎아야 되는 게 아니니까요. 우리가 대통령이 된다 이러는 것도 과거로부터 지어 놓지 않았으면 안 됩니다. 그건 절대예요. 자기가 지어 놨기 때문에 나쁘든 좋든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윗조상들이 그렇게 해서 자기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자기는 그걸 몰라요. 그러면 요다음에 또 이어지질 않아요. 자기를 아는 사람 같으면 잘 리드해서 둥글게 나갈 수 있죠. 그리고 그런 힘이 있다면 백성들에게 혼란을 가져오게 하지를 않죠, 그 힘이 있다면.
‘아주 착을 놔라’ 이러는 것도 이름일 뿐이고요, ‘번뇌를 끊어라’ 이러는 것도 이름일 뿐이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대로 우리가 더하고 덜함도 없이 그냥 여여해서 고정된 게 하나도 없고 그냥 굴러가는 수레와 같다. 그 수레에는 바로 심봉이, 주장자가 그 속에 꿰어져 있어서 굴러가는 거다. 그냥 굴러가는 거다. 그리고 대치를 하려면 심봉을 믿고 거기다가 다 놓게 되면 스스로 굴러서 다 재생이 되고 또 일들이 타협적으로 된다는 거죠. 이거를 심성과학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인간이라면 개개인의 원자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거기다가 모든 거를 놓으면 그 한마음에서, 한생각에 의해서, 여기서 바로 입자로 화해서 분자로 다 나누어져서 모두 각기 자기 역할을 하죠. 개가 왜, 집에 낯선 사람이 오면 짖죠? 그렇게 짖는 거와 같이 자기한테 결부된 사람 앞에서는 다 조절을 해요, 다. 그렇게 마음의 자기 주인이 신하다 주인이다 할 게 없이 평등한 마음에서 분자가 될 때는, 바로 거기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아촉도 되고 아미타도 되고 미륵도 되고, 용신도 되고 지신도 되고 뭐, 관세음도 되고 칠성도 되고 지장도 되고, 아니 되는 게 없이 그렇게 분배돼서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사람의 원자에서 나가는 게 그렇단 말입니다. 그렇게 나가서 또 다시 들어오면 그냥 원자일 뿐이죠. 그래서 꺼내도 줄지 않고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하는 건 마음의 법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아니 되는 게 없어요. 여러분이 몸이 있을 때 공부 열심히 하세요. 그리고 넓게 생각을 하시고, 우리가 사는 요 안에서만 생각하지 마시고, 요 안은 거기다가 맡기고 더불어 넓게 좀 보시고 사세요. 그런다면 우리가 어느 땐가는 ‘아하, 이게 이런 거로구나. 마음은 항상 체가 없다고 하더니 이 마음 하나가 우주를 덮고도 남는구나.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하고 하늘을 쳐다보고 주먹으로 치고, 땅을 내려다보고 주먹으로 치고, 너무 기가 막혀서 울다가 웃다가 한다는 얘기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의 육신은 언제나 병이 들고 죽고 하지만, 그 육은 자기 시자일 뿐이지 주인이 떠나면 육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지수화풍으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지수화풍으로 돌아가고 거기서 나오고, 또 돌아가고 또 나오고 이러는 거죠. 물과 흙, 바람 이 세 가지가 한데 어울려서 돌아가기 때문에 불이 일어나고 온기가 생기고, 그래서 이렇게 생명체가 생겼고 우주 만물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 모두가 그저 살았다 하면 죽었고 죽었다 하면 살았으니, 이거는 이름일 뿐이지 사실은 우리가 영원토록 그대로 굴러가면서 산다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작아지기도 하고 커지기도 하고 그러죠. 잘 못살기도 하고 잘살기도 하고요. 우리는 지금 영화배우들이 배역을 맡아서 그대로 배우 노릇을 하는 거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거를 누구의 탓으로 돌릴까요? 이 엄청난 일이 왜 생겼느냐,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러냐 그러지만 자기한테 다 감겨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오신통 중의 숙명통이 바로 여러분의 컴퓨터라고 볼 수 있어요. 자동적인 녹음기라고 할 수 있어요. 거기에 스스로 감겨 있으니까 그대로 나오는 거지 어떡합니까?
그래서 그거를 알면 바로, 수염이 나지 않았는데도 수염이 길어서 붉게 익었다는 얘기를 할 수 있죠. 그거를 알면 우리는 만 가지 천 가지 다 작용할 수 있는 거니까. 빨리 쉽게 알게 하기 위해서 요런 말을 했죠, 고정된 게 하나도 없다고. 부처님 경전에 찰나찰나 나툰다는 소리는 있어도, 공했다는 소리는 있어도, 고정된 게 없다고 하는 말은 없습니다. 고정된 게 없다! 보는 것도 고정된 게 하나 없고, 우리 이 한 덩어리가, 일거수일투족이 다 그렇게 고정된 게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를 세울 것도 없다, 나를 내놓을 것도 없다, 내가 했다고 할 것도 없다 그럴 때, 그게 정녕코 알아졌을 때 스스로 일을 하면서도 그냥 놓고 가고, 뭐 놓고 가려고 해서 놓고 가는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놔진단 얘기죠, 그냥 믿으니까.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일을 하고, 어떠한 일을 해도 일을 하고, 안에서도 일을 하고 바깥에서도 일을 하고 그러니 이 세상에 하나도 부러운 게 없다 이런 말을 하게 돼요. 부러운 게 뭐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좀더 벗어나려면 마음공부 열심히 해야죠. 신도님들 외에 딴 분들 가만히 보면 기복으로 젖어서 그냥, 노래하는 걸 봐도 그렇고, 기도드리는 걸 봐도 그렇고, 염불하는 걸 봐도 그렇고 아주 그냥 다 그래요. 기가 막혀요. 그러고는 요만한 등잔을 쭉 절마다 놓고선 거기다 꼬리표 해서 붙이고요. 참 너무 어리석다고 생각이 드는 게 뭐냐 하면 ‘세상에 저렇게 눈 떼어 먹고 코 떼 먹고, 하하하…,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부처님은 자비하기도 하시지.’ 뼈다귀를 요 발가락까지도 고아서 먹어도 그냥 아무 소리가 없어요. 그러니 아이구 참, 별나게 해 먹어도, 껍데기를 벗겨 먹어도 가만있고, 뼈다귀를 고아 먹어도 가만있고, 뭐 살을 떼면 또 살이 붙고, 또 떼면 또 살이 붙고 이러니 아니, 영구히 떼어 먹어도 아마 다 못 떼어 먹을 겁니다. 그러니 별의별 짓을 다 하고 그러는데, 불법을 지니고 살아나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나가느냐에 따라서 부처님 법이 완전히 설 수도 있고, 어떻게 사람들이 하느냐에 따라서 미신이 될 수도 있고 귀신이 될 수도 있고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죽으나 사나, 못났든 잘났든 한생각을 그냥 잘 내세요. 이 공부 한다고 해서 벼락부자가 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래도 자기 앞가림은 할 수가 있으니까요. 얼마나 좋아요? 앞가림도 하게 해 주지, 공부하게도 해 주지, 그저 마음 착하게 살도록 하고 세세생생에 이어지게 해 주지, 자기 원소 자체가 얼마나 좋습니까?


진실한 마음으로 구하려면…

진실하게 구해야 하고 진실하게 깨우쳐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시는데 진정 진실한 마음으로 구하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요?


이 세상 만물이 다 내 스승 아님이 없다 함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물에 가면 싱그럽고 좋죠? 그러니 물은 말없이 날더러 물같이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꽃을 볼 때에 꽃도 나같이 살라고 하는 겁니다. 모질게 살아난 풀뿌리를 봤을 때도 나를 보고서 지혜롭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체 만물은 다 나같이 살라 하니 내 스승 아님이 없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모로 봐서 지극하게 믿고, 믿는 것을 바깥으로 믿지 말고 안으로 믿을 때에, 진실하게 믿고 놓는 작업을 할 때에, 맡겨 놓는 작업을 할 때에 일체 만법이 다 그 속에서 나고 드는 것이니까 그 속에다 맡겨 놓을 수 있는 그런 작업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야만 진실하게 구하는 법도 나오고 진실하게 깨닫는 도리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명심하여 들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항상 주인공을 찾다가도 어떠한 일이 용도에 따라서 부닥치면 안으로 놓기 이전에 바깥으로 끄달리고들 하십니다. 안으로부터인데 말입니다.
안에다 물을 줘야 바깥의 나무들이 잘 자라는데 말은 알아들었다고 하면서, 주인공에 놓는다고 하면서도 행은 그렇지 못합니다. 행과 믿음과 구함이 진실해야만 하는데 말이죠. 모든 일체 만물이 다 내 스승 아님이 없으니 모든 걸 둘로 보지 말고 내 탓으로 돌리고, 나한테서만이 이끌어 줌이 나온다고 생각할 때 모든 해결은 그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나를 증득하게 해 주는 것도 그 속에서만이 깨달음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한 철 나왔다가 부닥침이 없다면 뭐 배울 게 있겠습니까? 한 철 날 때에 부지런히 해서 깨달아야만 요다음 생에…. 아니, 나고 들고 하기 이전에, 생하고 멸하고 하기 이전에, 내가 자유스럽게 보고 자유스럽게 듣고 자유스럽게 남을 알고 자유스럽게 어디서 온 걸 알고 자유스럽게 오고 갈 수 있다면, 그리고 자유스럽게 내가 직접 주기도 하고 먹기도 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자유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인 것입니다. 부처가 된다면 스스로 법신이 되고 스스로 화신이 되는 것입니다. 천백억화신이 됩니다.
바빠서 절에 못 가고, 주인공 찾는 거니까 집에서 해도 된다고 해 가지고 잘못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왜 교수 노릇을 하면서도 자기네 아들 딸들을 학교로 보냅니까? 내 집 아이가 수술을 꼭 받아야 하는데 왜 남의 의사한테 맡깁니까? 내 집 아이를 내가 수술을 하기에는 너무 그 마음이, 남은 나와 둘이 아니라는 거를 알면 해도 괜찮건만, 자식은 내 자식이라는 그 착에 의해서 수술하는 칼을 못 대죠. 그래서 여러분이 진실하게 행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무조건 남을 이익하게 한다면 무조건 나한테 이익이 온다는 그 점을 자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서든 진실하게 마음을 내야 합니다.
200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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