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라는 말과 같이 아름다운 말이 없다. 인(因)이 어떤 결과를 있게 하는 직접적인 이유라고 한다면, 그 과정에서 존재하는 조건들을 연(緣)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괴로움이 생기는 인연들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는데, 그 안에는 어떠한 결과도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순환적인 인생관과 자연관이 배어 있다. 괴로움의 시작이 태어남에 있고 태어남의 인연의 시작에 무명이 있다고 하는 12인연법은 차라리 비관적이다. 태어남 자체를 고통으로 보기 때문이다. 부처님 법을 만나는 인연을 바다의 거북이가 몇 년 만에 숨쉬러 나와서 나무 조각에 난 구멍에 걸리는 것과 같이 어렵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부처님말씀을 배우는 우리들에게 낙관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하는 사람에게도 인연법이 존재하는 것일까? 먼저 사람을 구성하는 과학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를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만드는 정보는 나를 구성하는 수조 개의 세포에 한결같이 존재하는 DNA에 기억되어 있다. DNA다발은 분자들이 서로 꼬여있는 새끼줄과 같은 모습이다. 사람의 세포핵에는 23개의 DNA 다발이 들어있는데 각각은 부모에게서 한개 씩 온 한 쌍으로 되어 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23개 쌍의 DNA 다발을 읽어 내는 일이다. 요즈음은 며칠 만에 이 다발에 들어 있는 정보를 읽을 수 있다고 하니 과학기술의 발전은 참으로 놀랄 만 하다.
이제 인연의 과학의 세계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2세를 만들기 위해서는 알이나 정자와 같은 생식세포 둘이 만나야 한다. 생식세포를 만들 때는 23쌍의 DNA 다발( A-a, B-b, C-c와 같은 쌍이 23개)이 풀리면서, 각 쌍에서 온 한 개 DNA로만 구성된 23개의 DNA를 가진 생식세포(한 예로 A, b, c가 23개)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생식세포 분열은 나를 있게 한 부모의 인연의 결합이 다시 풀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인간의 모습은 (다른 생물도 꼭 같은 원리지만) 이 23개들이 어떻게 결합하는 가에 있다. 생식 세포가 23개를 만드는 모습은 완전히 우연이다. (A, B, C...)로 구성될 수도 있고, (a, B, c....)로 구성될 수도 있다. 생명의 탄생은 마찬가지로 우연이 조합된 배우자 알세포인 (A’, b’, C’,....) 23개 세포와 만나서 다시 (a-A’, B-b’, c-C’....)을 만드는 것에 의해서 시작된다.
이 같이 생식세포를 통해서 부모가 가지고 있던 우연히 조합된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이다. 부모 유전자 역시 또한 우연히 맺어진 쌍이므로, 수 억년의 진화의 역사에서 나의 유전자와 같은 유전자를 하나쯤 갖지 않는 생물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지하철에서 부딪치는 사람들이 가끔은 짜증나게 만든다. 이때 우연히 옷깃을 스치는 이에게서 수천만 년 만에 만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자. 갑자기 인연법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서울대 전기공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