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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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수행의 길 함께 가는 형제자매/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물구나무 선 채 열반한 등은봉 선사
출가한 누이동생 한마디에 제자리로

20년 전에 해인사로 얼굴이 앳되고 덩치가 제법 있는 행자가 들어왔다. 데리고 온 보호자가 비구니스님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스님은 그 행자의 누나였다. 출가사찰 지정부터 은사선택, 승려노릇의 고비고비마다 조언해 주었다. 하지만 속가의 신심있는 부모마저도 ‘저 혼자도 모자라 동생까지 데리고 나갔다’는 원망 아닌 원망까지도 감수해야 했다는 이야기도 후일담으로 들었다. 지금 그 스님은 복지분야에서 나름대로의 원력을 실천하면서 반듯하게 승려노릇을 열심히 하고 있다.
마조 선사 문하의 등은봉 선사도 누이동생이 비구니였다. 절집에서 살다보면 형제 자매 등 가족이 함께 수행생활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보게 된다.
언제나 대중들에게 어깃장을 놓긴 했지만 등은봉 선사가 유명한 것은 흉내낼 수 없는 열반자세의 독특함 때문이다. 좌탈(坐脫)도 드문 일인데 한 술 더 떠 오대산 금강굴에서 거꾸로 선 물구나무 자세로 열반에 들었다. 대중한테 별로 대접받을 일을 해놓은 것이 없었던 까닭에 모인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별스럽다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더러 쓸데없는 지엽적인 문제로 의심을 일으키기도 했다. 등은봉 선사가 거꾸로 물구나무를 섰을 때 그 풍성한 동방아 승복의 오지랖은 어떻게 되었을까? 땅 방향으로 흘러내려 빨래도 제때 하지 않은 꼬질꼬질한 속옷이 누렇게 모두 드러난 것은 아니었을까? 괴각의 공통점은 빨래를 잘하지 않는 것인데… 누이가 대신 정기적으로 세탁해 주었다면 다행이고.
스님의 성품으로 봐서 누이 역시 그런 일로는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했을 것 같다. 기록에 의하면 옷 역시 서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흘러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이야 그렇타손 치더라도 무정물인 옷 역시 끝까지 몸을 가리는 역할을 다했다고 하니 그 불가사의함 역시 선사의 공부힘의 현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런데 오돈부(吳敦夫) 거사는 회당(晦堂) 노스님한테 이 부분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분의 열반이 남다른 것이야 감히 범부인 제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승복 또한 스님을 따라 그랬던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대가 지금 입은 옷이 몸을 따라 아래로 드리워져 있는데도 그것을 의심하는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의심할 것이 없다면 물구나무를 선 채 열반할 때 옷도 몸을 따랐을 뿐인데, 여기에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이 말에 거사는 그 자리에서 안목이 열렸다. 죽은 선사가 살아있는 거사의 안목을 열어주었으니 이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스승노릇을 한 셈이다.
그나저나 진짜 큰 일은 열반이후 발생하였다. 다비를 하려고 하니 선사의 육신이 그대로 물구나무를 선 채 꿈적도 않는 것이었다. 대중들은 웅성웅성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누군가가 누이 비구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걸 보면 그 니(尼)의 경지도 이미 대중들이 인정할만큼 보통 수준은 넘었던 모양이다.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근처 토굴에서 한걸음에 달려와, 그 곁에 서서 조곤조곤 한마디 하였다.
“오빠는 살아서도 괴각질로 대중을 피곤하게 하더니, 죽어서도 역시 세상인정을 따르지 않는군요.”
그리고서 툭 치니 그제서야 넘어졌다. 선정에 든 여인을 망명보살이 손가락을 튕겨 깨어나게 했다는 ‘여인출정(女人出定’선문염송‘ 32칙)’ 공안을 연상케 한다. 그 길로 다비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남매간의 그리고 또 같은 길을 가는 수행자로서 애틋함이 있으면서도 법으로 승화된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등은봉 선사의 괴각 이력 속에서 고명양념처럼 등장한 누이의 모습이지만, 그동안 별났던 오빠의 행적을 일거에 상쇄시켜 버린 참으로 숙연한 광경이다.
200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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