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이라는 용어만큼 불교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도 많지 않다. 또한 종교에 관계없이 우리의 생활에 깊이 녹아 있는 말도 흔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만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업의 인도 말은 카르마다. 아마 의도된 행동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결과를 일컬어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순환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인도인들의 냄새가 배어 있는 말이다. 현재의 행동의 결과나 반드시 나중에 영향을 미친다는 도덕적인 인과론이 포함된 말일 것이다.
과연 나의 의도에 의한 행동의 결과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남을 돕고 나면, 아무리 힘들었다고 하더라도 뿌듯한 행복감을 느낀다.
남을 괴롭히고 난 후, 아무리 승리의 쾌감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허무감과 자괴는 남는 법이다.
이와 같은 선업과 악업은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과학은 이러한 질문에 몇 가지 단초를 제공한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뱀을 싫어하는 이유에는 아마도 수 백 만년 동안 뱀으로 대표되는 파충류와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받았던 고통이 녹아있을 것이다. 소름이 끼치는 행동(業)에는 긴장하라고 하는 효소가 작용하는 것이며, 이 효소의 분비는 바로 우리의 모습을 결정하는 메모리 장치인 DNA에 저장된 명령의 결과이다.
다른 예를 들기로 하자. 침을 뱉고 나면 더럽게 느낀다. 방금 전 자기의 입에 있었던 것이 데도 말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와 같이 더럽고 깨끗한 것이 마음먹기 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더 깊은 업의 법칙이 숨어 있다. 일단 나의 입에서 나가고 난 침에는 세균 감염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나의 입에서 나간 침을 더럽게 느끼도록 나를 구성했던 과거의 ‘업’들이 명령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과거의 업의 흔적들에 의해서 행동하는 자동기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업의 그물은 끈질기다.
생존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불교에서는 ‘애(愛)’와 ‘취(取)’로 설명한다. 아마도 생존을 위한 생물적인 욕망과 결과를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 갈구에 의해서 우리의 모습이 만들어 지는 인연법을 설명하는 것이리라. <방등경>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인연법이 중생과 다르지 않다고 하신다. 그리고 업과 중생이 다르지 않고, 중생과 업이 다르지 않다고 하신다. 인간을 포함하는 삼라만상의 생존하려는 모습이 바로 업의 결과이고 원인이라는 점을 간결하게 설명하신 것이다.
과거의 ‘업’의 그물에 갇혀서만 살아가는 생은 참으로 고단하고 허망하다. 그 업의 실체를 이해하고 집착에 의해서 벗어나는 모습은 참으로 생기 있고 거룩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유 없이 ‘나’라는 생각이 말썽을 일으킬 때, 말썽이 어디에서 생기는 지를 관찰하면 집착에서 비롯된 업의 그물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만남이 더 큰 좋은 업의 원인이 되기를 바란다.
■서울대 전기공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