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승가사 상륜(76·사진) 스님은 1929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27세에 출가를 작정하고 속가인연이 있었던 청담 스님을 찾아갔다. “충청도에 가면 비구니 우두머리가 있다. 거기로 가라”는 청담 스님의 뜻에 따라 찾아간 곳은 경허ㆍ만공 스님의 선맥이 살아 있는 수덕사 견성암이었다.
청담 스님이 말씀한 비구니 ‘우두머리’는 근대 비구니 선맥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법희 스님. 상륜 스님은 그렇게 법희 스님을 은사로 55년 수덕사 견성암에서 삭발염의 했다. “몸이 하는 말 다 들어 주고 언제 수행하느냐”는 은사스님의 말씀을 좇아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수행에 몰두했다. 어느 해에는 1년을 눕지않고 장좌수행을 하기도 했다.
“요즘 사람들 보면 시대가 그래서인지 근기가 약해. 우리는 아침마다 죽 밖에 못 먹었어. 어쩌다 사과 하나가 생기면 그걸 6쪽으로 나눠 먹으면서 공부 했지. 그것도 부처님오신날과 명절 때 1년에 딱 두 번 뿐이었어. 그래도 늘 공부가 재미있었지.”
은사스님과 한방에서 잠을 자다 간혹 잠에서 깨면, 은사스님은 한밤중에도 혼자 일어나 공부에 열중하셨다. 그러면 스님도 벌떡 일어나 공부를 했다. 그렇게 은사스님을 시봉하며 20년을 살았다.
근대 비구니 3대 강백 수옥 스님에게 대교를 수료하고 견성암에서 정진하고 있을 때였다. 1971년 사형인 도원 스님의 뒤를 이어 승가사 주지를 맡게 됐다. 작지만 담백하고 정갈한 산사의 모습을 간직한 승가사는 그다지 내세울 것이 없었다. 좁고 외진 산세로 기도객 외에는 찾아오는 이도 없어 절 살림이 곤궁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상륜 스님의 수행자다운 면모에 감화된 신도들이 늘어나면서 사격을 정비하기 위한 불사는 어려움 없이 진행됐다. 보물 215호 마애불에 참배하기 쉽도록 108 계단이 만들어지고 대웅전 영산전 산신각 적묵당을 중건했다. 79년에는 신라초전성지 도리사에 부처님 진신사리탑을 세웠고, 94년엔 높이 76척, 대석(臺石) 면적 45평에 9층으로 된 ‘남북통일 호국보탑’을 세웠다. 해군 중앙법당 통해사를 창건하는 등 부처님 법을 널리 전하는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상륜 스님은 이러한 불사 보다 승가사 제일선원장으로 철마다 30~40여명의 비구니 선객들이 제접하는 일에 더 열성이다. 95년부터는 용인에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인 법륜사를 짓고 있다. 올해로 출가 50년을 맞은 상륜 스님은 참선 수행하고 신도들에게 불법을 전하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서온 실천적 수행자의 모습 그대로다.
온화한 미소를 띤 채로 상륜 스님은 기자에게 “부처님이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전 같이 잘 안된다”고 말했다. 마음을 비우고 화합하면 잘 살 수 있는데, 중생들의 알음알이가 늘어난 만큼 부처님 법을 지키고 따르는 이가 많지 않은 것 같아 걱정이라는 말씀이다. 요즘도 상륜 스님의 아침저녁으로 ‘온 국민이 불자가 되기’를 발원하고 있다.
조용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