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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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내가 죽거든 조문객이나 부의금을 받지 말라/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육조혜능 “울지말고 상복도 입지 마라” 당부
가르침에 어긋나는 다비장 객비로 속앓이

올초의 일이다. 불교계 신문을 뒤적이다가 한쪽 구석의 아주 신선한 기사에서 눈길이 머물렀다. 한적한 토굴에서 혼자 열반하신 초삼 스님에 대한 내용이었다. 한평생 올곧은 수행자로 살다가 다비식마저 아는 몇몇 스님네가 모여 조촐하게 치렀다는 것이다.
20~30대 시절에는 화려한 다비식이 잔칫날처럼 좋아보였다. 총림에 오래 머문 탓으로 많은 다비식을 치렀고 또 다른 사찰의 영결식장에 더러 가보기도 했다.
서울 강남의 거리를 만장대열과 꽃상여로 장엄한 영암 스님 다비식이 출가 이듬 해 처음 본 절집 장례식이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옛날 ‘국장(國葬)’수준이었다. 그걸 보고서는 대뜸 ‘나도 열심히 수행해 큰스님이 되면 저런 장례식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지’ 하고 철없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후 많은 큰스님들의 장례식도 거의 그 정도 규모였다. 하지만 절집에 사는 햇수가 늘어가면서 그런 다비식의 화려함 뒤에 숨어있는 산중 대중과 문중 식구들의 노고가 이루 말할 수 없음을 차츰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비장의 대미를 장식하는 ‘객비’는 그 전체 액수의 거대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누어주는 일도 늘 걱정이었다. 그 장면은 언제나 거의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비식 이후 문도간의 불협화음, 재산권 분쟁, 그리고 최근 모 유치원의 폐쇄 등에서 보듯 스승의 뜻과는 십만 팔천리 반대 방향으로 가버리는 것도 심심찮게 보고 들을 수 있었다.
혜능 선사는 열반을 앞두고서 아주 소박하게 장례식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육조단경〉에 나온다. 이 부분 만큼은 ‘돈황본’과 ‘덕이본’이 별로 차이가 없다.
“잘 있거라. 이제 그대들과 이별하노라. 내가 입적한 후에 세속적인 인정으로 슬피 울거나, 사람들의 조문이나 공양물을 받거나 상복을 입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것은 불법의 가르침도 아니며 나의 제자가 할 일이 아니다. 내가 살아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똑같이 모두 단정히 앉은 채로 좌선을 하라. 내가 간 이후에도 다만 법에 의지해 수행하고 내가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하라.”
이 부분은 선종(禪宗)의 장례지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리 원론이라고 하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본다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간단하다. 우선 울어서는 안 된다. 이유는 ‘생사불이(生死不二)’이기 때문이다. 조문이나 부의금도 받지말라고 했다. 민폐가 되기 때문이다. 상복도 입지 말라고 했다. 지금은 문도들이 가사를 수하지 않고 장삼차림으로 조문객을 받는 것으로 거의 정착화 되었다. 현재 제대로 지켜지는건 이것 밖에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다비식 이후에도 스승이 살아있는 것처럼 정진해야 한다고 당부하는 점이다.
스승의 유지와 가풍은 가능한 한 그대로 계승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조문객도 맞이하지 말고 부의금도 받지 말라고 하였으니 무슨 객비를 나누어 줄 일이 있겠는가.
다비장 객비 피해가 심하다보니 종단의 원로 어른들께서 직접 나서 이 문제를 거론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거의 한계치에 온 것 같다. 어른의 복과 덕을 대중에게 회향한다는 이 아름다운 절집의 미풍양속마저 ‘강제의무공양금’이 되어 꼴사나운 모습 연출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 부담 역시 눈덩이만치 늘어나 또다른 고(苦)의 근원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불법의 가르침도 아니고 나의 제자가 아니다’ 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또다른 의미에서 ‘망(亡)은사를 욕되게 할까봐’ ‘마지막 길이니까’ 감히 어느 제자도 ‘없애겠노라’고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혜능 선사 유훈 이후 또다른 관습의 뿌리는 질기고 깊기만 하다.
200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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