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하게 자기 뿌리를 믿고 모든 경계 맡겨놔야
우리가 도반으로서 같이 묘법을 공부하게 된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인생으로 태어나서 이 마음도리를 모르고 간다면 세세생생 이 자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생각하면 걸어온 발자취가 없듯이 우리가 지금 생활하고 가는 것이 듣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먹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만나는 것도 혼자가 아닙니다. 모두가 같이 더불어 돌아가는 이치죠. 그렇기 때문에 사방 모두 합해서 평등공법이라고 하는데, 모두 합해서 색이다 공이다 하는 것은 지금 말하듯이 하나도 혼자 하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걸어왔지만 내가 걸어왔다고 내세울 게 없어요.
내가 항상 말씀드리죠? 몸속에 수많은 자생 중생들이 다 나이기 때문에 내가 혼자 걸어온 게 없노라고 말입니다. 혼자 보는 것도 혼자 듣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내세울 게 어디 하나나 있습니까? 그러기에 이 세상만사가 다 공했다고 하는 겁니다.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그 자체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체가 영원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즉, 50% 반쪽만 알기 때문에 우리는 죽는다 산다에도 무척 걸리는 것입니다. 걸릴 게 하나도 없는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일체 만물만생이 가다가 만나고 가다가 보고 가다가 듣고 할 때마다, 이런 게 있죠. 밥을 지을 때 밥통의 소켓트가 맞지 않으면 불이 들어오질 않아서 밥을 못하듯이 우리 마음이 자생 중생들을 다스리면서 화하게 만들어야 바로 부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어서 항상 통신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제불의 마음은 항상 우리들의 마음과 직결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주장자라고 하고 안테나라고 해도 됩니다. 내 마음의 안테나를 세워 놔야 일체제불의 마음이 내 마음을 통해서 불이 들어올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만약에 소켓트가 맞지 않는다면 불이 안 들어와서 밥을 지어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반드시 내면의 나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자생 중생들을 남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과거로부터 자기가 악업 선업을 지은 표시입니다. 내 몸뚱이 속에 과거의 악업 선업이 다 들어 있고 또 지금 살면서 짓는 것은 미래의 선업 악업으로 입력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것은 지금 나오고 현실에 짓는 것은 자꾸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연방 과거에 입력된 게 나오면서 연방 미래로 또 입력이 됩니다. 그런데 과거로부터 오는 그 업식은 어디서 일어나느냐? 내 마음속의 악업 선업의 중생들의 의식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인연을 지어 놓았으니까요. 그래서 나오는 대로 다시 놓으면 미래의 업도 없어지고 과거에 진 것도 없어지니 한 구멍에서 나오는 모든 것 한 구멍에다 놓아라 이런 소리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또 하는 것은, 딱다구리가 나무를 그냥 덮어놓고 쪼으면 나무가 뚫어지듯이 여러분도 무조건 그렇게 자문자답하면서 생활을 하면 그대로 생활이 참선이며 마음이 편안해지면 그게 바로 좌선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활이 없는데 부처가 어디 있으며 우리들이 없는데 부처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있으니까 부처가 있고 부처가 있으니까 우리들이 있는 것이죠. 항상 모든 것이 과거로부터 현실로 나오는 거니까 그 나오는 데다가 바로 놓아야죠. 바깥으로 허우적거리지 말고 안으로 모든 것을 놓아 맡기고 너만이 아픈 것을 낫게 할 수 있다, 너만이 화목하게 할 수 있다, 너만이 깨우치게 할 수 있다, 너만이 물리가 터지게 할 수 있다고 믿고 맡겨 놓아야 합니다. 육신과 정신이 둘이 아닌 까닭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그 믿음, ‘해 주시오’가 아닙니다.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이죠. 그렇게 놓고 갈 때 비로소 딱다구리가 나무를 쪼아서 뚫으면 나무의 속이 텅 비듯 자기가 그 속에 들어가서 집을 삼아 앉는다 이겁니다. 거기 앉으면 알을 까서 생산 시키는 계기가 되죠. 깨달은 마음은, 마음과 마음이 위에서부터 직결이 돼 있고 아래로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찰나에 합쳤다가 찰나에 떨어지고 찰나에 합쳤다가 찰나에 떨어집니다. 마음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법좌를 낼 수가 있고 생산을 해낼 수 있는 까닭에 바로 부처님이 되는 겁니다.
과거의 나와 현실의 나가 둘이 아니게 상봉이 돼야만 됩니다. 과거의 나는 바로 나의 조상이니까 부(父)고, 현실의 나는 자(子)가 됩니다. 그래서 부와 자가 둘이 아니게 상봉할 때에 비로소 둘이 아닌 도리의 섭리를 알 수 있느니라 했습니다. 상봉함으로써 주장자와 주장자가 둘이 아니게 찰나찰나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면 말로 이론으로 떨어지니까 법이 될 수 없고 법설이 될 수가 없는 거죠. 음파가 한데로 떨어지니까 통신이 될 수가 없기에 성자가 날 수 없는 거죠. 성자가 날 수 있게 하는 건 생산해 내는 생산처가 되어서 생산을 해낼 수 있는 그런 법좌가 돼야 된다 이런 말입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러하듯이 우리가 길을 가다가도, 예를 들어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여러 마리의 소를 봤을 때 한 순간 한 찰나에 자생 중생들과 더불어 한마음이 된 주장자 자체는 바로 안테나가 돼서 일체제불의 마음이 찰나에 듭니다. 그래서 한마음이 되어 불이 들어오게 되니 그 소들은 무명을 벗고 인도환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만약 이 도리를 모르고 옷을 벗는다면 한 치도 발을 떼 놓을 수가 없는 것이죠.
엊그저께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어항 속에서 한 발짝도 떼 놓을 수 없고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우린 공기주머니에서 나와서 공기주머니 속에 있는 것이 마치 어항 속에서 고기가 사는 것과 같으니 그 어항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며, 내 자생 중생들 악업 선업의 그 굴레에서 벗어나야 될 것입니다. 첫째는 내 업식에서 벗어나야 어항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구경경지에 이르러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습니다. 자유인! 자유인이란 즉, 부처를 뜻하는데 여래라고도 할 수 있죠. 여래라는 뜻은 한데 합쳐서 나투고 화해서 돌아가는 그 평등공법 즉, 여래의 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생활선이자 여래선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꽃이 이쁘게 핀 것을 보면 한 순간에 꽃과 나와 둘이 아니게 딱 맞아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순간 꽃은 화해서 내가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것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수없이 꺼내도 줄지 않는 도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렇게 알아야만 되겠다는 겁니다. 이 선(禪) 도리에서는 남녀가 따로 없고 길고 짧은 게 따로 없고 더럽고 깨끗한 게 따로 없고 부자 가난뱅이가 따로 없고 또 부처 중생이 따로 없습니다. 엊그저께도 어떤 분이 부처가 이 자리에 있다면 죽여서 개 먹이나 하겠다고 했다는 것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알고 보면 모두가 내 마음속에 한마음으로 돌아가니 내면의 자생 중생들과 부처님 마음이 항상 통해서 돌고 둘이 아닌 까닭에 부처도 집어먹고 하다못해 풀 한 포기도 집어먹고 곤충에 이르기까지 다 집어먹는 것이 장엄인 것입니다. 장엄을 갖춘 거라고 하죠. 그러니 생각해 보면 그냥 넘어갈 게 없습니다. 또 우리 인생은 우연히도 없습니다. 절대적입니다.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서 물건 값을 주고 물건을 사 왔다면 돈을 준 사이도 없고 물건을 준 사이도 없이 여여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모두가 생활 속에서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은 병고, 액난, 유전성, 영계성, 업보성 또는 세균성 이 모두를 바로 내 한생각에 다 녹일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에누리 없이 나오는 것이니 나오는 데다가 되놓는다면, 녹음된 카세트에 다시 녹음을 하면 앞서의 것은 다 없어지는 것처럼 업보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죠. 누구나가 공부할 수 있는 조건과 권리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딱 막혀서 내가 했다고 하고 내가 속상해서 죽겠다고 하고, 내가 이렇게 했는데 저놈이 왜 저런가 하면서 상대를 원망하고 증오하니까 모든 것에 벗어날 수가 없죠. 증오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습니다. 알고 보면 뿌리에 의해서 나무가 살고 있는데 그 옆의 나무가 스쳤다고 해서 가지가 부러지는 게 아니거든요. 가지가 부러진 거는 자기가 이 세상에 난 탓이지 어째서 옆의 나무 잘못입니까? 옆 나무의 잘못으로 생각한다면 원망이 돌아가고 증오가 돌아감으로써 항상 악업을 짓게 되는 겁니다. 선업 짓는 것이 몇 알갱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니 모두 악업에 속하죠. 더구나 부처님께서는 악업은 물론이고 선업도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선업을 짓게 되면 악업이 쫓고 악업을 짓게 되면 선업이 쫓으니 평생, 아니 세세생생 벗어날 수가 없느니라. 그러니 악업도 놓고 선업도 놓아라. 가는 거 잡지도 말고 오는 거 마다하지도 말라.’고 하신 겁니다. 우리가 선업을 지었다고 해서 내가 공덕이 많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선업을 많이 쌓았다고 해서 내가 잘했다고 아무리 내세워 봤자 절대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행입니다.
그것은 공덕이 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한 나무가 살고 돌아가는 그 자체는 바로 뿌리로 인해서 살고 돌아간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원망하기 이전에 ‘내가 뿌리로 인해서 살고 있으니까 가지, 잎새도 뿌리로 인해서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해야만 마음이 안정되고 내 방석을 제대로 찾고,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선법을 그대로 잘 실천해 갈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자체가 나무라면 나무의 잎새와 가지가 공기와 태양을 흡수하면서 뿌리에서는 수분과 에너지를 흡수해 올리면서 또 아래로 내려보내면서 정맥 동맥이 오르내리듯이, 여러분은 나무와 같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TV를 보시고 잘 아시겠지만, 일체 만물만생이 우리들 살림살이와 우리들 생명과 우리들 작용하는 작용법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차원이 낮고 높을 뿐이죠.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업신여길 수 있으며 ‘나’라고 세울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과거 수억겁 광년 전부터 미생물에서부터 화하고 진화되어 이렇게 나투고 돌아왔으니 무엇은 안 되어 봤겠습니까? 그러니 벌레 하나를 봐도 업신여기기 이전에 몸속을 한번 들여다보시길 바랍니다. 몸속을 볼 때 천차만별의 모습과 천차만별의 생명들이 오죽이나 많습니까? 그 자체가 바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수억겁 광년 전서부터 이런 저런 모습으로 진화됐기 때문에 그 자생 중생들을 안고 집합소가 돼서 집이 돼 주고 있고 심부름꾼이 돼 주고 있고 관리인이 돼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밥 한 그릇을 먹는다 하더라도 혼자 먹는 게 아닙니다.
마음으로서의 의식을 다스리면서 너희는 전부 공해서 한마음이니까 둘이 아니다, 너는 내 마음에 의해서 작용하고 돌아가는 바로 나인 것이다. 이럴 때 바로 그 속의 의식들도 나를 내가 죽일 수는 없다는 의식이 듭니다. 그것은 의식들이기 때문에 촉각으로 인해서 더 잘 압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보다도 더 잘 압니다. 우리 인간의 두뇌는 둔하지만 그 자생 중생들이 한마음이 돼 주면 두뇌가 아주 성숙해집니다. 물리가 터지고요. 그래서 우주의 근본은 인간의 마음 근본에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만사는 모두가 가설이 돼 있어서 우리 마음에 그렇게 통하면 직결이 된다는 겁니다. 문수보살이 병문안을 왔을 때 유마힐 거사가 “중생들의 병이 다 나아야 내 병이 낫노라.”고 말했는데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자생 중생들이 병이 났으니까 내가 병이 난 거지 자생 중생들이 건강한데 내가 왜 병이 납니까? 자생 중생들이 다 병이 나아야 내 몸이 낫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마음이 아니라 모두가 한마음인 줄 알고 다스려야 합니다. 제각기 나는 나, 너는 너 이렇게 된다면 그게 아수라장이지 다른 게 아수라장이 아닙니다. 바깥으로도 아수라장을 만드는 거죠.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세포 하나하나의 생명들의 의식이 바로 지금 지구의 레이다망 역할을 합니다. 우주의 세포 하나하나가 법계입니다. 레이다망처럼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 나가는 것 모두 관리하고 대기권에서 모든 것을 작용합니다. 그리고 통신할 것은 통신하며 안에서 통신을 받아서 또 작용을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의식들이 대기권에서 나가서 마음을 조절하는가 하면 모든 것을 완화시킬 수도 있고 악화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한마음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내 한마음이 안으로 뭇 중생들을 다스리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그대로 생활을 하면서, 적으면 적은 대로 크면 큰 대로 해야지 쫓아가려고 애쓰지도 말고 버리려고 애쓰지도 말고 그대로 생활 속에서 오는 것대로 마다하지 말고 공부하는 데 재료로 삼는다면 아주 좋은 결과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한 말 되하고 한 말 되하는 것 같이 들을지 모르지만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얘기가 너무도 많습니다. 만약에 그릇이 요만한 데다가 들어부으면 그게 담겨지겠습니까? 또 요만한 통에다가 우주 같은 그릇에 담아 있는 것을 쓸어 붓는다면 그게 담겨지겠습니까? 다 흘러 버리겠죠. 차원이 높을수록 아마 그릇은 크고, 담기는 것은 여여하게 많을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자리에서 생기는 그릇의 크고 작음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수많은 부처님들이, 아니 수많은 사람들이 깨우쳐서 부처님이 된다 할지라도 한 그릇의 부처님이지 두 그릇의 부처님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물론 한 부처님이기 때문에 다 부처님이라고 그랬지, 부처님이 있다고 했다면 부처님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부처님이 개개인으로 돼 있다면 여래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들이 제각기 돌아간다면 여래선이라는 말을 안 했을 겁니다. 외부의 모든 것은 개별적으로 사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면도 개별적으로 사는 게 하나도 없구요. 그래서 예전에 선지식들께서는 제자들이 “나는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하겠으니 토굴을 짓고 산으로 올라가야겠습니다.” 하니까 “너 그러면 땅도 짚지 말고 옷도 입지 말고 먹지도 말고 꽃을 보고 좋아하지도 말고 물도 마시지 말도록 해라. 토굴을 짓더라도 나무를 꺾어다가 지어야 하는데 왜 남의 것을 갖다가 짓고 공부하려고 그러느냐.”는 그런 말씀에 홀연히 깨우쳐서 산으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50% 말이 좋고 이론이 좋고 학식이 풍부하다 해도 그것은 반쪽입니다. 안으로 구겨 넣을 것은 넣고 바깥으로 내놓을 것은 내놓고 중용을 할 수 있게끔 해야지 50%만 안다면 보이지 않는 데의 50%가 걸립니다.
예를 들어서 차를 타기만 하고 간다면 그 무슨 재밉니까? 그리고 무슨 삶의 보람이 있겠습니까. 차를 타는 것은 내리려고 타는 것이고 내리는 것은 타려고 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유통되어 걸림 없이 차를 타고 내릴 수 있어야지 정상적인 삶이 아닐까요? 그런데 왜 타는 거는 알면서 내리는 건 그렇게 안되는 게 많습니까. 어떤 분들은 얼마쯤 가다 보니까 되는 건 되는데 왜 안되는 게 있습니까? 이러거든요. 그게 정상이죠. 안되는 건 되기 위해서 안되는 것이니 그것을 재료 삼아야지 그걸 업으로 삼고 병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항상 병고 애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겁니다. 생각이 그러하니까 살아오던 습성, 남한테 들은 습성, 습성에 의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땐 한생각이면 그냥 다 벗고 털고 일어나겠건만 깐죽깐죽 붙들고 늘어집니다. 왜 자기 걸어온 발자취를 붙들고 늘어집니까? 그냥 걸어왔으면 걸어올 뿐이지 왜 걸어온 자취를 쥐고 늘어지느냐 이겁니다. 여러분이 하루살이의 턱 놓는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삼천 년 전을 바로 일 초로 축소할 수도 있고 일 초를 삼천 년으로 늘릴 수도 있다 이 소립니다.
모두가 그러하니 우리는 이 껍데기를 벗기 전에 자생 중생들을 화하게 해서, 즉 말하자면 응신이 돼서 뭇 중생들의 마음을 통해서 응해 주게끔 만들어야 됩니다. 과거에는 부처님께서 수없는 좋은 말씀을 해 놓으셨지만 그 때 용어로 모두 방편으로 말씀을 해 놓으셨기 때문에 지금 현대 사람들은 그 용어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에 감지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불교가 발전을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감지하고 감응이 될 수 있게끔 현실의 용어로 바꿔 놓을 수만 있다면 불교가 얼마나 발전하고 좋겠습니까? 생명의 근본이 불(佛)이기 때문에 풀 한 포기의 생명도 곤충 한 마리의 생명도 전부 불입니다. 불 아닌 게 없기 때문에 불이며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고 말과 말로 통하고 통신으로 통해서 돌아가는 그 자체가 교입니다. 그래서 불교 안에 포함되지 않는 게 없습니다.
과학자든지 의학자든지 공업가든지 정치가든지 막론해 놓고 이 도리를 완전히 습득한다면 심성 천체 물리학이 되고 심성 의학이 되고 심성 천문학이 되고 심성 철학이 되며, 하나도 버릴 게 없는 까닭에 하나도 가질 게 없는 까닭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광대무변하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평등공법입니다. 직접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르듯이, 평등공법이라 하는 것은 그대로 마음이 연결이 돼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그 뜻을 말하고, 한 찰나에 만났다 한 찰나에 떨어지고 하는 그 자체를 볼 때에 우리는 한 찰나에 붙으면 바로 부가 되고 한 찰나에 떨어지면 자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죠.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에 물은 물대로 있고 산은 산대로 있느니라. 종정 스님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고 말씀하신 자체가 법을 말하는 겁니다. 법이 공한 것을 말할 때는 바로 둘이 아닌 까닭에 법은 법대로 있고 행은 행대로 있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찰나에 붙었다 찰나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지 않습니까? “여보!” 하고 부르면 “그래.” 하면서 대답을 하고 한 찰나에 소켓트가 꽉 끼워지니까 둘이 아니게 불이 일어나서 마음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러다가 소켓트가 싹 빠져서 떨어지면 나는 나, 너는 너로 떨어졌다가, 또 “아버지!” 하고 소켓트가 붙으면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돼서 “아버지, 뭐 어쩌구….” 이러고 한데 붙습니다. 그렇게 수없이 끝없이 돌아갑니다, 세상만사가. 그런데 어떻게 나 혼자 개별적으로 내가 설법을 했다, 내가 잘 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 와서 좋아지고 깨우치고 병도 낫는 등 가지각색으로 성취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지만 나는 내가 낫게 해주고 내가 가르쳐 줘서 여러분이 깨우쳤다고 말 안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여러분이 있으며, 내 몸도 공해서 내가 혼자 한 게 없기 때문에 내세울 게 없다는 사실이죠. 그러니 여러분도 그 뜻을 잘 아시고 그저 자유스럽게 살 수만 있고 어항 속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오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정말 자유인으로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세세생생에 남의 모든 마음을 집어넣어서 굴려도 손색이 없고 굴려서 내보내도 손색이 없는 그런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경에 이르고 열반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잘 생각해서 다스리라고 믿고 질문 있는 분은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자1: 스님, 오늘도 마음의 양식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수행 중에 의문 나는 점이 있어서 몇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 스님께서 관(觀)의 정의를, 안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하여 주인공을 믿는 것이 아니고, 되고 안되고를 모두 맡겨 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뜻이 되고, 산은 산같이 살라 하고 꽃은 꽃같이 살라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뜻을 세간법으로 정치에 비유하여 해석하고 있습니다. 정치란 모든 국민의 뜻을 종합해서 민의에 따라 해야지 억지로 하면 언젠가는 불만이 터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불만을 갖고 있는 민중에 의해서 사회가 혼란해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국민의 뜻을 읽는 것이 관이라고 하면 그 뜻을 하나로 모아서 인연 따라 행하는 것이 무심으로 업식에 따르지 않는 좌선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단이 생기는 것은, 스님께서 안될 때는 ‘할 수 있다.’ 하고 마음을 내라고 하시고 간혹 저도 그렇게 하기도 하는데 이렇가 마음을 돌리다 보면 무심관에서 일보 후퇴하는 일심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되며, 억지로 익은 감과 저절로 익은 감의 맛이 다르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이가 생기는 것 같아 수행에 도움이 되는 말씀을 구하고자 합니다.
▲스님: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겠죠. 하나는 과거의 부와 현재의 자가 상봉을 해서 둘로 보지 않고 관찰을 하는 것과 무지에서 관찰하는 게 다릅니다. 무지에서 관찰하는 것은 겉만 보고 나쁘다 좋다 하는 거고, 부와 자가 상봉한 사람이 관찰하는 것은 둘로 보지 않는 까닭에 안팎이 동시에 관찰이 됩니다. 여러분은 더 잘 아시겠죠? 그러니 둘 아닌 관찰이라면 한생각 했다고 할 수도 없는 그 순간, 바로 손 없는 손이, 눈 없는 눈이, 귀 없는 귀가 찰나에 왕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법으로 행해진다, 즉 말하자면 한 부처님의 마음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거죠.
▲질문자2: 스님 말씀 들으면 늘 그 말씀이지만 이상하게도 들을 때마다 항상 새롭게 가슴에 와 닿고 해서 참으로 여일하신 설법에 진리는 들어도 들어도 새 맛이 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저는 ‘한마음 주인공’ 하면 일체제불이 그 안에 들어 있고 스님도 둘이 아니게 들어 있으니 내가 넘지 못할 산이 없고 건너지 못할 강이 없다고 참으로 당당한 마음으로 이젠 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보니 제 주위에 방금 질문하신 것처럼 참으로 어렵고 힘든 그런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속속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같은 학과에서 공부를 하는 친구도 끝까지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부모님의 병환 때문에 학교를 그만 둘지 모르고, 잘 아는 형님도 그간 아주 어려운 살림살이 때문에 나이 오십이 되기 시작하니까 여기 저기 숨어 있던 병들이 나와서 아주 어렵게 지낸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럴 때 제가 배운 바대로 분명히 말씀도 드리고 책도 갖다 드리고 그렇게 했지만 그러던 중에 문득 들었던 생각이, 참으로 나의 마음에 원력이 충만해 있고 내가 아주 참사람이 됐다면 한 마디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그냥 제도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그런 안타까운 심정이라고 할까요. 그런 게 막 치밀어 올라서 참으로 제 자신이 안타깝게 여겨지고 답답하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주인공이지’ 하고 믿고 물러나지 않는 마음은 가졌지만 그런 마음이 들어서 질문은 아니지만 말씀드렸습니다.
▲스님: 말 잘했어요. 내가 아까 얘기했죠. 우주의 근본은 인간의 마음에 직결이 돼 있고 세상만사는 내 마음에 가설이 돼 있다고요. 마음자리에다 이 사람 일도 저 사람 일도 맡겨 놓으세요. 또 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그 사람이 소켓트가 바로 꽂혔는지 안 꽂혔는지 알아야 되니 관하는 법을 듣게 하고 책과 월간지도 보게 갖다 주고 맡겨 놓으면 스스로서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생각으로 이것은 멀다 가깝다고 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죠. 그게 어디 둘인가요? 공한 공법으로 생각을 한다면 둘이 아닙니다. 둘 아니게 관찰할 수 있는 다스림의 법이라면 그래도 어지간히 맞아 들어갈 텐데 왜 그래요? 잘해 봐요.
▲질문자3: 저는 불법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세상을 살았었습니다. 남편이 다리뼈 속에 종양이 생겨서 광주 신도회장님의 말씀을 듣고 스님을 처음 뵙고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뼈 속에 종양이 생겨서 무릎 위 9㎝ 아래 9㎝를 잘라내고 관절을 다 들어내고 인공 뼈와 인공 관절로 수술해야 된다고 했었습니다. 그 수술이 한 번으로 끝나면 좋은데 인공 관절이기 때문에 자꾸 쓰다 보면 닳아져서 십 년에 한 번씩 재수술을 해 줘야 한다고 그래서 도저히 그 수술을 할 수 없었기에 스님께 매달렸습니다. 저는 무조건 스님께 매달렸어요. 그런데 스님께서는 항상 “당신 주인공이 있으니 당신 주인공에게 맡겨 놓으세요.”라고 하셨어요.
저는 처음에 주인공이 무엇인지 너무 몰라 안타깝고 답답한데 스님께서는 뵐 때마다 주인공에 맡기고 관하라고 하셨어요. 그러다가 하루는 오늘처럼 셋째 주 법회 법문을 하시면서 “처음 오시는 분들은 제가 하는 줄 알고 저를 믿고 저에게 매달립니다. 그러나 그 믿음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하셨어요.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감사하던지 정말 스님만 믿고 스님께 매달렸어요. 그렇게 공부해 가다가 나중에는 제 주인공을 믿고 모든 경계를 거기에다 다 놓고 가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안양을 열심히 다녔어요. 그때는 광주지원이 없었거든요.
다닌 지 한 일 년쯤 되니까 무릎 바로 밑 큰 뼈에 X-Ray로 보면 동그랗게 종양이 생겨서 썩어버린 그 부분이 저의 눈에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분의 혹이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어요. 조그맣게. 그래서 “스님, 무슨 혹 같은 게 밖으로 튀어나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놔둬. 그건 안에 있는 나쁜 것이 밖으로 나오느라고 그래.” 그래서 “예,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또 열심히 다녔습니다. 한 이 년쯤 되니까 그 혹이 밖으로 완전히 툭 튀어나왔어요. 그렇게 되니까 목발이랑 지팡이를 다 버렸습니다. 아프지 않으니까요. 그 목발 짚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는데 다 버리면서 산이고 어디고 거뜬히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남편이 어제 박사 학위 마지막 종심 잘 받았답니다. 그리고 감사드릴 것이 너무 많지만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친정 동생 네 명이 이상하게 하나같이 아들들이 없어서 걱정을 했었는데 이 공부하면서 스님께 말씀드리고 진실히 믿었더니 모두 떡두꺼비 같은 아들들을 낳고 또 임신 중이기도 합니다. 큰 남동생과 둘째 남동생 그리고 막내 여동생은 아들을 낳았고, 셋째 남동생은 결혼한 지 삼 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임신만 하면 유산되더니 이번에는 병원에서도 아주 건강하게 자리를 잘 잡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답니다. 스님, 정말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스님: 자기만이 자기를 살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딴 나무에 기대고 딴 뿌리에 의지하려고 하니까 기복이 되는 거죠. 공덕이 없는데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누구나가 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끄달리지 않고 떳떳하게 사는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진실하게 자기 뿌리를 믿고 모든 경계를 맡겨 놓아야 합니다.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74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