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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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자민 스님 -후학양성·사회사업 헌신
범어사 팔상전 앞에 선 14살 소녀는 팔상전을 장엄한 탱화와 벽화에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아득함을 느꼈다. 당시 최고의 선지식 동산 스님을 뵈러 간다는 친구를 따라 나선 것이 그대로 출가로 이어진 것을 보면 필시 그곳과 무슨 전생의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천안 연대선원 자민(67) 스님은 1952년 범어사 대성암의 혜진 스님을 은사로 출가 했다.
자민 스님을 만난 곳은 서울 둔촌동에 있는 작은 절 보성사였다. 신도들을 위한 법문을 준비중인 스님은 요즘도 서울, 부산, 천안, 인천 등 전국을 순회하며, 신도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부처님의 말씀을 전한다.
전쟁이 끝나고 비구ㆍ대처승 분규로 어수선한 분위기속에서도 스님은 일찍이 승려교육의 절실함을 깨달았다. 근대 첫 비구니 교육기관이었던 논산 정덕사에서 순천 선암사로, 다시 동화사, 운문사 등지로 경(經)을 배우기 위해서라면 어디라도 달려갔다. 그러다 삼척 영은사에서 당대 대강백이었던 탄허 스님을 만났다.
“탄허 스님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불선 삼교에 능해, 유명한 <주역선해(周易禪解)><장자> 등을 가르치셨는데, 이 무렵 제가 본격적으로 교학에 뜻을 세울 수 있게 해주셨지요.”
탄허 스님에게서 사집을 마친 스님은 이후, 관응·성능 스님에게 6년간 사교와 대교를 배웠다.
70년 음력 12월 11일, 스승인 성능 스님의 생신날 아침이었다. 개심사강원 대중들이 모인 가운데 생신상을 받아든 노장은 뜻밖에도 자민 스님에게 ‘보월’이라는 당호와 전강게를 내린다. 스님이 스물아홉 되던 해였다. 한영 스님의 강맥을 이은 성능 스님은 ‘장엄염불’의 한 구절인 ‘若不傳法度衆生 畢竟無能報恩者(부처의 법을 전하여 중생제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필경 부처님의 은혜를 갚은 자라 할 수 없다)’라는 지엄한 경구로 자민 스님에게 강맥을 전했다. 그렇게 제방 강단에서 후학들을 위해 교학을 폈던 스님은 82년 경기도 고양의 흥국사 강원을 마지막으로 강사의 길을 접었다.
출가 30년 되던 해 본격적인 대중포교에 나선 것이다. 산문을 나오자마자 조계종 비구니회를 이끌던 혜춘 스님을 도와 비구니회관의 터를 닦았고, 재단법인 선학원의 임원으로 다양한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1월 12일에는 서울 보명사 주지 상원 스님과 함께 남아시아 지진 해일로 어려움을 격고 있는 스리랑카를 직접 방문해 선학원이 지원하는 생필품과 복구지원비를 전달하고 왔다.
“이재민들의 처참함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불탑과 불상만은 온전히 지켜진 것을 보면서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었다”는 스님은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부처님 은혜를 갚으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자민 스님은 “불교가 성하는 길은 절을 크게 짓는 것 보다 스님·신도교육이 더 중요하다”며 불법홍포의 원력을 다짐했다. (02)853-2853
조용수 기자
2005-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