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에는 인정이 원수…정체성 상실 원인
僧도 俗도 아닌 ‘어설픈 중도론’ 경계해야
출가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세간의 포기이다. 더 거창하게 말한다면 삶의 패러다임 자체의 전환이다. 석가씨 집안으로 옮겨오면서 삶의 방식 자체가 달라짐으로 인하여 기존 가치관의 틀과 가족관이 깨어지고, 이로 인하여 생기는 주변의 혼돈과 충격은 출가인 당사자에게도 적지 않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중국과 한국같이 효가 강조되는 문화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선종의 중흥조 육조혜능 선사의 출가 역시 이런 세간적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조계대사별전〉에 의하면 혜능 스님은 몰락한 가문의 후손으로 노모를 모시고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중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발심하여 출가를 결행하게 된다.
고난에 찬 필부의 생활을 떠난 초연한 세계를 평소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육조단경〉의 원형으로 알려진 돈황본에는 “혜능은 숙세의 업연이 있어서 어머니를 하직하고 황매의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홍인 화상을 예배하였다” 라고 하여 비교적 출세간적 입장에서 선사의 출가를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후 기록들은 세간적인 가치관과 시각이 알게 모르게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사의 출가가 문제가 아니라 남아있는 노모에 대한 걱정이 주류였다.
선사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후의 기록들은 이 부분에 대해 참으로 친절하게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먼저 〈육조단경〉 덕이본의 기록이다.
“한 객사에 있던 한 손님이 오랜 옛날의 인연이 있었든지 은 열 냥을 혜능에게 주어 늙으신 어머님의 옷과 식량을 충당케 하고 곧 황매에 가서 오조 스님을 뵙도록 가르쳐 주었다.”
이후 〈조당집>에는 더 자세하게 다소 ‘오버(?)’ 라고 할 만큼 사실성을 갖추고 있다. “나무를 샀던 안도성이라는 사람이 황매로 떠난 후의 노모봉양을 걱정하는 혜능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은 일백 냥을 주어 식량과 의복을 마련토록 했다.”
후원금을 준 사람의 구체적 이름은 물론 은 열냥으로는 (노모가)살아있을 동안의 부양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는지 백 냥으로 늘렸다. 이는 육조혜능 선사의 출가에 대한 세간적 가치관과 출세간적 가치관의 충돌을 완화시키기 위한 주변인들의 배려다.
즉 선사의 출가정신도 살리고, 집에 남아있는 노모봉양도 남들에게 만족시키기 위한, 참으로 ‘중도적’인 묘안을 기록해 놓은 것이라 하겠다.
아주 후대의 기록으로 보이는 〈남화사지〉에는 애절한 노모와의 고별사연도 있다. 탁발승의 〈금강경〉 독송을 듣고 발심한 혜능은 황매산으로 출가하겠다고 거듭 간청하나 어머니는 눈물을 쏟으면서 간곡히 만류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외삼촌이 “꼭 출가를 하겠다면 저 동구 밖 큰 바위에 가서 허락을 받아오라”고 했다. 혜능은 바위 앞에서 7일동안 밤낮으로 기도를 올리며 출가허락을 구했다.
마침내 바위가 두동강으로 갈라졌다. 동네수호신인 큰 바위로부터 허락을 받은 것이다. 이 바위는 그래서 별모석(別母石:모친과 이별한 돌)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기존 삶의 틀과 가치관을 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 설화는 참으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수행에는 인정(人情)이 원수라고 했다. 인정이 많으면 도심(道心)이 성글어질 수 밖에 없다. 어정쩡한 타협론은 ‘승(僧)도 속(俗)도 아닌’ 삶을 출가자들에게 요구하기 마련이다.
수행자로서의 정체성 상실은 결과적으로 불가(佛家)와 속가(俗家) 모두에 누(累)가 되는 것이니 냉정하게 본다면 ‘어설픈 중도론’은 참으로 경계해야 할 이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