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엔 눈이 많이 온다. 눈이 많이 오고 겨울이 길다. 제주 한라산엔 그리고 노루가 많다.
긴긴 겨울, 먹이를 찾아 노루들은 이리저리 떼지어 다닌다.
한라산 관음사 마당까지 노루들은 내려와 먹이를 찾아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곤 한다.
만허 스님, 그는 이런 노루들에게 하루 한차례씩 먹이를 나누어 주었다. 시래기와 칡넝쿨 썰어 놓은 것, 동백나무 여린 잎들을 따서 포대자루에 담아놓은 것들을 꺼내 노루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다. 마치 어린 자식들에게 모이를 주듯이 그렇게 정성들여 노루들을 보살피곤 했다.
노루들은 만허스님을 절대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겁이 많은 짐승들이지만 경계하지 않고 그의 주위에 몰려들어 손으로 건네 주는 먹이를 받아먹곤 했다.
양껏 먹이를 받아먹은 노루들은 고맙다는 듯이 만허 스님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산중턱 쪽으로 하나 둘씩 올라간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면 어김없이 다시 관음사 마당으로 내려왔다.
노루들과의 은밀한, 친밀한 약속이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만허 스님과 노루들과의 깊은 약속은 긴긴 겨울 내내 끊이지 않고 지켜지고 있었고, 그것은 그들만의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하나의 무언(無言)의 약속과도 같은 것이었다.
만허 스님은 김장철이 다가오면 이리저리 탐문을 해서 배추와 무, 시래기들을 수집하여 트럭에 가득가득 실어 오곤 했다. 그것들을 정성스레 포대자루에 담아 창고에 보관했다.
긴긴 겨울동안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노루들을 위한 그의 배려는 가히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그것은 실로 보살행이었다. 보살행을 실천하는 만허 스님의 행위는 아주 침착하고 성스러워 보였다. 말보다 실천을 앞세워 행하는 그의 무뚝뚝하면서도 믿음직스런 보살행은 관음사 여러 대중스님들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자주 들리는 신도 보살님들도 그를 도와 노루들의 먹이를 같이 챙기곤 하였다. 그것은 동행(同行)이었다. 동행, 함께 가는 길. 그리하여 그 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함께 나누는 따뜻함이 거기 그들에게 있었고, 여러 일들이 원만해졌다.
누덕누덕 기운 누더기를 걸치고 노루들에게 먹이를 나누어 주는 만허 스님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대자 대비한 부처님의 행로(行路)를 만허 스님, 그는 그렇게 몸소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제주 한라산 관음사는 추운 겨울에도 따스했다.
펄펄펄 눈 내리는 한겨울 오후, 노루들과 어울려 있는 만허 스님의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 한 폭의 수채화였다.
세상은 견디기 힘든, 견디기 어려운 일들로 가득하다. 그것들을 감당하지 못해 절망하고, 어떤 이는 죽음을 결심하기도 한다. 안타까운 일들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어나는 이 번다하고 처참한 계절의 언덕받이에서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 아직까지 제정신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견뎌내며 인내하며 걸어가는 이들이 있기에 세상은 그나마 제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이탈하지 않고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묵묵하게 자기의 길을 찾아, 자기의 할 일을 찾아 무언(無言)의 보살행을 행하는 우리의 도반 만허 스님 같은 이들이 존재해 있기에 그러하다.
무슨 보상을 바라고, 무슨 내세움을 위해 행하는 것은 진정한 행(行)이라 할 수 없다.
아무런 사심 없이, 스스로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저 어떤 강한 ‘부름’에 의해 행해지는 행(行)이야 말로 진정한 구도(求道)의 참 모습이다.
‘만허’, 만가지를 만사(萬事)를 모두 비워버린다는 그의 법명처럼 스님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한겨울, 펄펄펄 눈 내리는 제주 한라산 관음사의 마당에서 노루들과 함께 교감(交感)을 나누는 그의 뒷모습은 진실로 아름다웠다. 우리는 그를 일러 우스개 소리처럼 ‘만허 보살’이라 하였고, 그는 그저 허허로운 표정으로 미소짓곤 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비구의 삶이 산자락에 어리는 저녁노을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무너져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만허 스님, 그와 함께 보낸 몇 해의 세월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이 겨울 저녁에 눈이 내린다. 눈은 내려서 온 산천을 덮고 나뭇가지들을 부러지게 만들고 지나간 일들을 아득하게 만든다.
만허, 만사를 비우고 허허롭게 하는 그의 보살행이 영원하길 바란다. ■봉화 청량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