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조홍인 스님의 제자들 중에 이른 바 방계(傍系)로 불리는 인물들이 <전등록(傳燈錄)>속에 여럿 나온다.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신수대사와 혜안국사일 것이다. 아시다시피 신수는 <육조단경> 속에 등장하는 까닭에 이미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혜안국사는 128세로 입적했는데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후인들이 노안(老安)이라고도 불렀다. 120세를 사신 조주선사를 능가하고 있다. 현대에도 종교인이 가장 오래사는 ‘직업군’으로 분류해 놓은 통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예나 지금이나 마음을 다스리고 사는 덕에 스트레스를 비교적 덜 받아 장수할 수 있었나 보다.
이 두 큰스님 사이에 느닷없이 측천무후라는 희대의 여걸이 등장한다. 측천무후의 신심이야 이미 불교집안에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역사가들의 정치적인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신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면 때문일 것이다. 정치와 종교는 서로를 위해서 분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정치의 발전역사 자체가 어찌 보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측천무후의 신앙적 순수성을 인정한 관점에서 문제를 본다면 덕높은 스승을 국사로 모셔서 사심없는 지혜의 안목으로 선정을 펴고자 함이었다.
당나라 당시 신수와 혜안은 그 법력을 중원 천하에 떨치고 있었다. 신수대사는 무후의 초청으로 머물고 있던 옥천사에서 장안의 내도량(內道場)에 들게된다. 당시 신수대사는 장안과 낙양을 오가며 왕공과 고관대작 사이에 교화를 펴고있는 중이었다.
반면에 혜안선사는 백애산에서 40여년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하면서 오로지 수도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무후가 3번이나 사신을 보내서 간청하므로 어쩔 수 없이 산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근데 측천은 누가 더 법력이 높은지 시험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스스로 별로 공부한게 없어 법거량으로 누가 더 도인인줄 알아내는 것은 애초부터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궁리 끝에 그녀다운 방법을 찾아냈다.
두분에게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다. 그리고 아름다운 시녀들을 시켜서 목욕시중을 들도록 하여 ‘쇠로 만든 부처님이라고 할지라도 땀이 날’ 상황을 연출했다. 먼저 신수가 물에 들어갔다. 즉시 목욕물이 넘쳤다. 다음으로 혜안이 들어갔다. 물이 그대로였다. 그렇게 목욕이 끝났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시녀들이 설명을 하자 측천은 이렇게 찬탄했다.
“물에 들어감으로 인하여 진짜도인을 알게 되었도다!”
그리하여 미인을 보고도 몸에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은 부동심(不動心)의 혜안을 국사로 모시게 되었다.
희랍의 아르키메데스는 욕조에 들어가자 자기 몸의 양만큼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아르키메데스 원리’ 라는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고, 골짜기에서 묻혀있던 산승인 혜안은 목욕물이 넘치지 않도록 하여 당시 유명한 고승인 신수보다 더 법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으니, 과학적 진리 발견과 종교적 법거량은 이렇게 목욕탕 안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곳곳이 모두 진리의 도량인 것이다.
하기야 시험당하는줄 알았으면 신수대사도 얼마든지 물 한방울 넘치지 않도록 할 수 있었을 텐데 매사를 일상성 속에서 자연스럽게 임하다 보니까 무후의 피상적인 눈에는 도가 덜 닦인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었으리라. 측천보살이 자기잣대로 고승의 법력을 저울질한 것도 기발하기는 한데 더 깊은 곳을 보지못한 한계는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요즘, 아무나 와서 법거량을 하려고 달려드는 통에 문을 걸어 잠그는 선지식이 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