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최고를 좋아한다. 최고가 되지 않으면 도태할 것 같은 ‘최고증후군’ 환자인지도 모른다. 최고가 되려면 발전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우리는 발전보다는 단순한 자리다툼으로 최고의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
이 치열한 경쟁을 버틸 수 없었던 장애인은 최고의 자리에서 점점 밀려나 소외라는 구렁에 빠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장애인을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도와줘야 할 사람으로 치부한다.
장애인에 대한 경쟁력을 인정하지 않게 된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장애인은 소비자가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양만큼 구입해서 사용할 수가 없다. 너는 장애인이니까 이런 정도의 도움이나 필요할 테니 이걸로 잘 살아라 라는 식의 장애인복지정책이 펼쳐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바로 이런 탁상공론식 제도 때문에 얼마 전 한 장애인이 생계비 인상을 요구하며 구청 현관 앞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언론에서는 구청장 면담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항의성 자살로 보도하고 있고, 구청에서는 그가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서 얼마를 지급받았고, 장애수당으로는 얼마가 지원되고 있었다며 줄 만큼 다 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죽음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얘기들이다.
이 휠체어 장애인이 진정 원했던 것은 소비자로서의 삶이었다.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는 장애인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만든 제도를 일방적으로 시행하기 때문에 이런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다.
장애인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사회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장애인 복지이지, 돈 몇 푼 지원한다고 장애인 복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이 순간도 알게 모르게 장애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장애인은 그 흔한 암 보험 하나 가입할 수 없는 현실이니 말이다.
자주 이런 전화를 받는다.
“고객님, 저희 카드회사에서 이번에 고객님에 대한 서비스로 보장성 보험을 들어 드리고 있는데요” 하면서 보험 상품을 열심히 소개하다가, “어쩌죠, 난 장애인인데” 라는 말에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는다.
그럴 때 끈질긴 보험 가입의 권유에서 벗어났다는 시원함보다는 ‘아, 나는 위험에 닥쳤을 때 고스란히 당해야 하는 구나’ 하는 불안감이 밀려오고, 우리 사회에서 도대체 장애인은 뭔가 하는 정체성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장애인은 우리 이웃이라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낸다. 장애인을 돕는 사람들, 장애인을 위한 사업을 펼치는 기업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어디 그뿐인가. 요즘 자폐증 청년의 마라톤 인생을 담은 영화 ‘말아톤’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한편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얼마만큼 바꿔놓을 수 있겠는가.
장애인들이 원하는 것은 지속적인 이해와 관심이다.
“저런 아이를 왜 밖에 내보내요. 정신병원이나 장애인시설에 보내지”라는 대사가 영화 ‘말아톤’에 나오는데 이것이 장애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다.
장애인은 함께 살기보다는 따로 살면서 가끔 자선을 베푸는 시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장애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장애인에게 닫혀 있는 창구가 많다.
겉으로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장애인을 차별하는 행위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이중적인 시각이 장애인들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