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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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와 나를 둘로 보지 말고 언제나 너그럽게 대해야
나오는 거기다가 그냥 밀어 던지세요!

새해를 밝게 살아가려면…

성주괴공(成住壞空) 하는 것이 사물의 이치이며 만물의 순리임을 알면서도 저희들 앞에 닥친 지구의 재난이 너무도 가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도 지구의 환란을 말씀해 주셨지만, 솔직히 언론을 통해서 방송되는 내용들을 보면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개발의 논리만이 전부인 양 깨부수고 파헤쳤던 몇몇 나라들의 물질지상주의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리 피폐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스님, 어찌하면 이런 재난으로부터 두렵지 않으면서 새해를 밝게 살아갈 수 있을는지 길을 일러 주십시오.

세세생생의 일뿐만 아니라 지금 현실에 지구에 어떠한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지구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나 나라의 문제나 모든 거를 어떻게 해 나갈 수 있는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우리 마음으로써 아주 한 찰나에 모두 가고 올 수 있다는 사실이며, 실질적으로 실천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자기 뿌리를 믿고 그렇게 실천하면서 자기를 지켜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상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날 남의 탓을 합니다. 모두 남을 원망하고 탓하고 팔자 타령 하고 운명 타령 하고 그러는 겁니다. 아니, 운명을 자기가 만드는 거지 누가 갖다 줬습니까. 그러니 운명을 좋게 만드는 것도, 자유스럽게 만드는 것도, 업보를 벗어나는 것도 다 자기 마음입니다. 그 도리를 몰라서 그렇죠.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으니까 잘했든 못했든 내 탓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없다면 무효예요. 모두가 무효입니다. 못났든 잘났든 내가 있기 때문에 바깥으로 부딪치고 안에서 일어나고 하는 거지 내가 없다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나부터 알아야죠. 나부터 알아야 나를 보호해 나갈 수 있고, 대치를 해 나갈 수 있고, 가정에서 식구들 문제도 대치할 수 있고, 사회적인 문제도 대치할 수 있고, 국가적인 문제도 대치할 수 있고, 지구적인 일도 대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옛날에는 인군이 안과 밖을 다 꿰어서 터득한 분이라면, 그럼 이렇게 말해야 되겠죠. 선과 학을 다 터득한 분으로써 한데 합쳐서 꿰어서 중용을 하는 인군이라면 그 나라의 백성이 다 인의롭고 편안하게 잘살 수가 있었다 합니다. 그리고 마음도 발전이 되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백성이 무척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 위의 큰집 나라에서 와 가지고 공부한 내력을 캐고 질문을 해서 대답을 못하면 때리지 않는 매를 많이 맞았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그만 나라든 큰 나라든 머리를 깎고 안 깎고를 떠나서 한 사람만 터득한 선지식이 계신다면 국민들도 그렇고 나라에도 그렇게 몹쓸 일은 생기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한생각으로 우주를 덮고도 남고 싸고도 남을 수 있는 이 마음의 도리를 우리는 생활 속에서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합니다. 스님들한테 와서 질문도 하고 토론도 하고, 또 배우는 사람들끼리 서로 토론도 하면서 어떻게 해 나가는 게 잘해 나가는 건지 생각도 해 보고 자기가 한 것을 지켜보면서 잘해 나가야 합니다. 생활을 떠나서 부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 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속에 우리가 있고 부처님이 있는 겁니다. 우리가 없는데 무슨 부처님이 계십니까. 부처님이 없는데 우리가 어디 있으며, 우리가 있기 때문에 모두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못났든 잘났든 우리가 제일 높은 겁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여러분 각자가 마음들을 언제나 착하고 자비롭게 쓰면서 안과 밖을 이끌어 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땅에서 이렇게 살면서 내 마음을 너그럽게 쓴다면 하늘에서도 딱 접해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이 저절로 춤추듯이 흥겨워서 그렇게 말이 나오고 뜻이 나옵니다. 그러니깐 언제나 상대와 나를 둘로 보지 마시고 너그럽게 대하며, 만물이 공생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서 지구문제도 타파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요?


제가 말씀드리는 이 질문은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문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삶이랄까, 아니면 진리랄까,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의미를 책을 아무리 많이 보고 많은 말씀 들어도 그 이유를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어르신들이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하고, 뜬구름 같은 것이라고 말씀들 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인생이 그렇게 뜬구름 같은 것인지요? 그저 주어진 생명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때까지 유지하다가 죽으면 그냥 없어지는 것인지 늘 거기에 대한 답을 찾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종이나 쇠들이 낡으면 재생을 해서 다시 만듭니다. 금반지도 금이기 때문에 금방으로 가져갑니다. 그러면 거기서 재생이 돼서 다시 다른 모양으로 나옵니다. 귀고리로 만들기도 하고, 팔찌로 만들기도 하고, 다시 반지로 만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른 물건이 돼서 다른 이름이 돼 가지고 나오죠. 그렇게 금방 다른 모습으로 재생이 돼서 나오는데, 그 모습이 헐어지니까 다시 재생을 시키기 때문에 다른 물건으로 나올 동안만 안 보이는 건데 어떻게 그걸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할 때도 자기가 수술을 하는 걸 보고 있을 때가 있죠? 그러니 죽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재생돼서 나오는 것을 여러분이 보시면서도 죽는다고 생각하겠느냐는 겁니다. 인간은 최고의 고등 인간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리고 영혼이라는 그 말 자체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대로입니다. 그 생명 자체의 근본은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습니다. 의식 자체는 영혼이라고도 하고 혼백이라고도 하고 영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성이 아니죠. 영원한 생명의 불성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의식 자체는 이랬다저랬다 할 수 있지만, 우리 자체를 기름과 운전수와 차로 생각하면, 그 도리를 알고 보면 허무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걸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지, 아무것도 없어도 꽉 차 있고 꽉 차 있어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아도 여러분이 빈껍데기만 있다면 없는 거죠. 자기라는 걸 모르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좀 생각해 보시는 그런 기회를 가지세요.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앞으로 남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자기만 위해서 사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주인공을 진실히 믿고 모든 걸 거기다 놓고 사세요. 그렇게 석 달만 꾸준히, 하여튼 일체를 그렇게 하면 뭐가 뭔지 자기가 느끼는 점이 있을 겁니다.
나는 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지금 현재 살아나가는 도리를 말하는 거지 말로 떨어지게끔 하는 게 아니에요. 버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 도리는 천체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천체의 질량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고, 천체의 질량 속의 핵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겁니다. 현실에서 목이 마르면 꼭 물을 마셔야 되겠기에 이러는 겁니다. 불교는 살아 있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부터 알아야 하고 자기부터 믿어야 하고, 자기부터 이끌어 나가야 하는 그 도리를 모르고서 항상 타의에서 찾으면서 항상 허무하게 생각한다면 안 되죠. 지금 노인네들도 이 도리를 알면 정말 머리가 허옇게 새었다가도 검어질 거예요. 왜? 걱정 근심이 없이 기쁜 마음이 들어가니까 말입니다. 그럴 거 아닙니까? 아마 밥 먹을 때도 죽 그릇을 가지고 숟가락을 몇 개 꽂아 갖다 놔도 그걸 먹으면서도 싱글벙글할 거예요, 아마. 절대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늙었어도 허무하지 않은 겁니다. 늙었다는 것이 옷이 헐었다는 얘기인데 이왕 늙어 버렸으니 아무 데나 앉은들 누가 어떠랴 이러구요. 참, 그 마음이 지혜롭고 크면 이 우주 안에 꽉 차는데 무엇이 부러울 게 있으랴 이겁니다. 그러니 그러한 마음을 가진 분은 밥 굶지도 않을 것이고 용돈 안 줄 사람도 없어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일수록 누가 어디서 나와도, 나와서 허무하게 살지 않도록 돼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이 해 보십시오. 그렇게 즐겁습니다. 허무하지가 않으니 즐거운 겁니다.
요새는 허무하다는 소리를 노인네들은 덜 하는데 외려 젊은 사람들이 더 잘해요. 거 참, 어째 거꾸로 가는 거 같습니다. 어쨌든 인생이 왜 허무한가를 알려면 나부터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바보가 되는 것만 같아


모두가 공생 공심 공용 공체이니 일체를 내 몸과 같이 보고, 내 생명과 같이 보라고 하시는 스님 가르침을 들으면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다짐이 됩니다. 그렇지만 사회생활 속에 팽개쳐지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진실되게 거짓 없이 살려고 하지만,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상대편이 공격을 해 옴으로써 저도 모르게 나와 남을 따로 보게 되고 그럽니다. 그것이 물론 수억겁을 살아온 습이겠지만 스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 어찌 보면 너무 물렁해져서 바보가 되는 것 같고 손해 보는 것만 같아서 상황 상황에서 주저하고 물러서게 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악한 마음이 나오는 것도 선한 마음이 나오는 것도, 뭐 별 생각이 다 드는 것도 나오는 거기다가 그냥 밀어 던지세요. 그렇게 줄창 해 보세요. 그대로만 한다면 이 다음에 꼭 내 말 할 테니까요. 그리고 좋을 거니까요.
그리고 말을 하되 유순하게 하면서 상대를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그대로 말을 하라는 겁니다. 말을 누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까? 그리고 바보처럼 비켜 서 있으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말을 하되 하지 말라 이 소립니다. 아셨습니까? 그러니 말을 하되 마음속으로 상대가 나쁜 사람이라고 미리 생각하지 말고 그대로 말을 해라 이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말을 하려면 말을 하되 하지 않고 말을 하지 않되 말을 해라 이거거든요.
예전에는 스님네들이 밭에 채소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오줌을 져다가 밭에 주는데 스승님께서 “얘야, 가서 공양 좀 빨리 하도록 해라.” 하시니까 “누가 오십니까?” “오늘은 달 스님이 오시니까 인사를 해도 아니 되고 인사를 안 해도 아니 되느니라.” 그러셨다고 하듯이, 여러분이 악한 것도 선한 것도,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 하는 것을 놔 버리고 그대로 놓고 가면서, 그대로 맡겨 놓고 가신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악한 마음이라도 그대로 보살의 마음으로서 정립이 되고 바꿔지면서 진화가 되면서 여러분을 좋게 이끌어서 선행으로 끌고 갑니다. 이건 자동적이죠.
그러니 여러분이 지금 뛰면서 생각하고 뛰면서 여여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 길밖에 없다는 겁니다. 생활이 그냥 참선으로 돌아가게끔 하는 공부입니다. 그러니 자기 빼놓고는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달 스님이 오시니까 인사를 해도 아니 되고 인사를 아니 해도 아니 되느니라.’ 하는 것은 화두를 주기 이전입니다. 화두를 줘서 의정을 내는 게 아닙니다. 이건 퉁겨 주는 일이죠. 그러니 어떻게 대처를 해야 될까요? 백장 선사는 삽하고 괭이하고 가지고 밭을 파러 나갔는데 “야, 이놈들아! 밭을 파도 아니 되고 아니 파도 아니 되느니라.” 이러시거든요. 그걸 어떻게 대처를 해야 되겠습니까? 여기에서 보배의 그 맛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난 것이 그대로 태초요, 여러분이 이 세상이 났기 때문에 그것이 그대로 화두요, 생활 자체가 그대로 참선입니다. 그 도리만 제대로 알고 살아간다면 손해 볼 것도 없고 바보 같은 것도 없습니다. 일체가 한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위패를 절에 모셨는데…


작년에 가까운 절에서 아버님 49재를 지내 드리고 만년 위패를 모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무속인 한분이 절에 위패를 모시면 감옥에 갇힌 것과 같아서 움직이지 못하신다고 합니다. 진짜 그런 것인지요? 그리고 절에 가서 시주를 할 때에는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요.

여러분이 한 가정을 이루고 산다 하더라도 가족들을 우연히 만난 게 아닙니다. 모두가 끼리끼리 만난 것입니다.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보십시오. 기사들은 기사들대로 모이고, 정치인들은 정치인들대로 모이고,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모이지 않습니까. 가만히 보면 복덕방을 하시는 분들은 또 복덕방 하시는 분들끼리 모여요. 그러니 그것이 누가 모이라고 해서 모이는 것도 아니고 갖다 틀어넣어서 그렇게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자동적입니다. 배는 배대로 놓고 사과는 사과대로 놓고 그렇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금이 요만큼 떨어져서 찌그러진 게 있어도 그것은 금방으로 갑니다. 찌그러졌다고 해서 금이 넝마전으로 가고 무쇠전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아름답고 그렇게 광대무변하고 묘법인 것을 우리 자신이 모두 가지고 살아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조상들을 위패를 해서 모시는데 영령은 어디까지나 영령이기 때문에 위패를 해 놔야 거기에 부착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꼼짝 못하게 모셔 놓으면 영령들이 알지 못해서 한 발짝도 떼어 놓지 못하죠. 영어를 못하는 사람을 미국에 금방 갖다 놔 보십시오, 어떻게 되나. 말이 통합니까, 사람들하고 뭐 대화를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는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가 없는 거죠.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조상님들이 돌아가시면 7ㆍ7재 지내고는 향 피워 놓고 초 켜 놓고 그저 맑은 물 위에서 위패를 살라 드리라는 겁니다. 자유스럽게 왕래하시라는 뜻이죠. 자유스럽게 해 드리고 나중에 또 무슨 일이 있을 때 초청을 해서 모시고 이렇게 하면서 염불 소리를 들어 가면서 뜻과 뜻이 한데 합치게 되면 그냥 자유스럽게 승천을 하게끔 돼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꼭꼭 매어 놓고는 오히려 부모님을 모셨다고 생각을 하죠.
가죽 속에다 모시면 안 되나요? 아무리 비바람이 쳐도 가죽 속에 모셨기 때문에 그 뿌리인 한마음 주인공에 모든 거를 맡겨 놓으면 다 입력이 돼서 다 한마음으로 한도량에 계실 텐데 말입니다. 자식과 부모가 둘 아니게 말입니다. 빗방울이 한바다에 든다고 해서 그 빗방울이 두드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령은 체가 없기 때문에 바다에 들어가는 물방울과 같아서 물방울이 수만 개가 들어간다 하더라도 한 바다인 것입니다. 물방울이 들어가서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고 또 물방울이 다시 자유스럽게 나온다고 그래서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얼마나 묘법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밝히고 발전시키면서 살려면 이 공부는 정녕코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길을 몰라서 길을 못 가고 벗어나지 못해서 주머니 속에서 꼼짝 못하고 지금 살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공기주머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다 속에서 모든 고기들이 살다가 바다 밖으로 나오면 살 수가 없듯이 인간도 역시 그런 바다 속의 고기와 같이 공기주머니에서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인생살이가 처참하지만 이 굴레 속을 벗어난다면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것이죠. 벗어나야 마음으로 생각하면 그대로 가고 생각하면 그대로 오고 생각하면 그대로 생기고, 어떠한 거든지 그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인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49년 설하시면서 그렇게 강조를 하셨는데도 우리는 지금 그러한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보고 자기를 무시하고 자기 정신계를 무시해서 자기 몸뚱이만 자기인 줄 알고 모두 야단법석이니 그 얼마나 처참하고 가련한 것입니까.
여러 번 얘기했죠. 양 무제가 달마 대사한테 스님네들의 의복과 양식과 사찰을 많이 지어 줬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고 하니까 달마 대사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했어도 공덕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스님네들한테 갖다 주면 모두 잘되고 공덕이 많겠지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집을 살 때에 돈을 안 주고 삽니까? 내 집으로 만들려면 돈을 줘야 내 집이 되죠? 또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갈 때에 돈을 안 가지고 갑니까? 누가 거저 물건을 줍디까? 만 원짜리 물건을 가져오려면 만 원을 가지고 가야 가져옵니다.
양 무제가 절에 가서 공덕이 되게끔 시주를 하고 정성을 들였더라면 아마 공덕이 됐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간 것처럼 내가 집 지을 만큼 돈을 가지고 가서 스님네들에게 드렸다 하더라도 그 돈을 준 것만큼 벌써 자기가 가지고 갔거든요. 스님네들에게 거저 갖다 준 게 아니거든요. 보이지 않는 데서 물건을 파는 사람이 바로 스님네들이라면 보이는 데서 사 가는 사람은 바로 신도들이죠.
가고 오는 거는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거기 때문에 여러분이 볼 수가 없을 뿐이지 불은 들어옵니다. 전력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육안으로 볼 수가 없지만 불은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절에 가지고 가서 스님네들을 줬든 부처님 앞에 갖다 놨든 시주를 했든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왜? 받은 사이도 없고 그쪽에서 준 사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걸 갖다 놓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가게 가서 물건 살 때에 물건만 가져오고 내가 돈 줬으니까 돈 도로 내놓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게 흡족하고 둥글고 자비하고 착한 마음으로 부모님을 위하고 자식을 위해서, 또 자기 몸뚱이 속의 모든 생명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실 수 있다면 그것은 진짜 이 세상에 진정한 보배로서 광대한 것입니다. 물건 아닌 물건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침착하게 생각해서 인생을 살아 보십시오. 어떻게 살아야만이 공덕이 되고 어떻게 살아야만이 만법의 근원이 될 수 있는가를 말입니다.

외계인에 대해서


스님 법문 중에 외계인에 대한 말씀을 하신 줄 알고 있지만 외계인들과 우리들의 관계, 또 그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돼 나갈 건지 거기에 대해선 말씀 안 하셨더라고요. 그 말씀을 마저 해 주세요.

지금 우리가 물질세계로서의 50%만 가지고 살면서 앞으로 정신세계로서 치닫는 교차로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천체물리학이니 과학이니 철학이니 지리학이니 천문학이니 하고 무수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연구를 할 때 첫째 이런 게 있죠. 그럼 요거부터 말씀드릴까요? 미국의 하버드대학 박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교수님들하고 전부 같이 모여 있을 때입니다. “스님! 지금 우리는 외계인에게서 전파를 타고 우리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해서 아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건 천부당만부당하다고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 무전전화를 나한테서부터, 내 마음속에부터 놔야 남한테 무전전화도 하고 무전전화도 받을 수 있지만 나를 떠나서는 그 통로가 막혔기 때문입니다. 모두 제가끔 나에게 통로가 있으니까 그 통로를 바로 터 놓고 모든 게 파악이 된다면 물리가 터지고, 내가 두루 탐험할 것이고 볼 것이고, 또는 두루 들을 것이고 찰나찰나 만날 것이고, 내가 결정지을 것이고, 내가 안팎으로 통신하는 거를 바로 소임으로 할 것이고….
그것이 부처님이라는 이름 없는 부처님 자체는 바로 찐득이 발 하나도 내 발 아닌 게 없기 때문에 바로 평발이라 하셨고, 모든 손도 내 손 아님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바로 평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어느 고장에 내 손 아님이 없고, 내 손 없는 데가 없고, 내가 없는 자리가 없다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바로 그 이유다 이겁니다.
그리고 본래 외계인이 따로 없는 겁니다. 지금 우리 지구 안에서도 어떠한 지역에서 모르게 살면 외계인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봐도 우리가 모르는 고장도 많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생명들이 우리보다 더 고도로 발달이 돼서 살아가기도 하고요. 우리만 이렇게 고도로 발달을 하고 이렇게 진화된 인간으로 우리만 산다는 생각은 버려야 될 겁니다.
그리고 화성을 탐사를 했는데 거기에는 생명체가 없다더라 하고 발표를 하고 그랬다고 하던데요, 지구에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몇 군데는 생명이 잘 살고 있다는 그 사실이 아마도 맞을는지도 모르죠. 왜냐? 모습을 꼭 보여야만 잘 살고 있는 건 아니니깐요. 모습 없는 모습, 이것은 우리보다도 벌써 한 계단 초월해서 넘어갔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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