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득할것 같던 스님방은 텅 비어 있어 더욱 충만
오래 전, 부산 금정산 범어사에서 잠시 머물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행당에는 고참 스님들, 조금은 특별한 내로라 하는 스님들이 여럿 둥지를 틀고 있었는데, 아무런 소임도 맡지 않은 이른바 한주(閑住)들이었다.
활연(活然) 스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사십을 갓 넘긴 스님은 별스럽게도 수염을 길게 길러 늘어뜨린 채 휘적휘적 경내를 돌아다니곤 했다.
강주(講主) 소임을 잠시 맡아 있다 그만두고 행당의 구석 방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그럭저럭 소일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스님은 매우 박학했다. 어릴적부터 서당(書堂) 공부를 오래하여 유학(儒學)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도가(道家)에 심취, 그쪽 방면으로 상당한 식견을 갖추었다고 들었다.
이렇듯 유추해 보건대 활연 스님, 그는 가히 유불선(儒佛仙) 삼도(三道)에 깊이 발을 적시고 유유자적, 그만의 행보를 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선도(仙道)의 멋을 좇아 그는 다른 스님네들이 잘 하지 않는, 수염을 길게 기르고 다니는 그러한 습성을 혼자 키우고, 그 나름의 자족(自足)에 젖어 있었을까.
강주 소임까지 맡아 본 스님 방에 수많은 장서들이 소장돼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처음으로 구경삼아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놀랐다. 그의 방엔 조그만 경상 하나와 조촐한 다구(茶具)들 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장서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방, 그것이 활연 스님 그의 실체였다.
책을 통해 얻는 지식은 공(空)하다고 했든가. 서책과 경서(經書)는 하나의 방편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것에 집착하면 근본 대의(大義)를 잃는다.
부처님께서 설한 팔만의 대장경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길을 가리키는 하나의 방편이 아니든가. 그러한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활연 스님은 아예 책을 곁에 두고 있지 않았던 것일까. 문자(文字)에 집착하면 오히려 심안(心眼)이 흐려지는 법. 맑은 바람소리를 듣고 향기로운 한잔의 차로 파적(破寂)의 멋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대장부의 할 일이다.
서책과 사리(事理)에 묻혀 일희일비(一喜一悲)함은 소인배의 한갓 봄날의 낮 꿈 같은 것, 가물거리다 사라져 버리는 아지랑이 같은 것.
텅 비어있는 활연 스님의 방은 비어있으므로 더욱 충만해 보였다. 정갈한 스님의 방에 마주 앉아 차를 나눌라치면, 바깥에서 불어대는 솔바람 소리가 한층 드높아졌다. 스님은 가끔 몇 마디 우스개 소리를 한 뒤 긴 수염을 흔들며 너털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아무런 티끌도 없는, 묻어 있지 않은 그의 너털웃음이 빈방의 적막을 흔들었다.
아무런 사심도 욕망도 없이 그 나름의 삶을 유지해 나가는 활연 스님은 진정한 도인이었다. 행당 옆 개울가 바위 위에서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있는 스님을 가끔 목격하곤 했다. 그 고요를 깨트리지 않기 위해 멀찍이 서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는 개울물 소리를 따라 어디론가 멀리로 떠나가고 있는 듯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세계를 향하여 둥둥 떠나가고 있는 듯했다.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어우러져 합일(合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도의 길이요, 무상(無上)의 보리(菩提)라 할 수 있겠다.
개울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는 활연 스님은 과연 스스로도 모르게 자연의 한 부분으로 회귀(回歸)하고 있었을까.
점심공양이 끝난 뒤, 그는 어김없이 개울 쪽으로 향하곤 했다. 인적이 뜸한 그곳이 그의 성미에 딱 들어맞는 모양이었다.
봄이면 움트는 버들개지와 함께, 여름이면 나무 그늘 아래서 발을 담그고, 가을이면 떠내려 오는 붉은 나뭇잎들을 응시하고, 겨울이면 얼음장 아래서 돌돌거리며 흘러내리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활연 스님은 거기, 개울가 바위 부근을 그의 수행처로 삼았다.
어디 그만한 수행처가 있을까. 사시사철 변화하는 계절의 면모를 지켜보면서 그는 스스로를 자연의 한 부분으로 동화시켜 나갔을 것이다.
오래 전, 금정산 범어사에서 잠시 머물고 있던 시절, 활연 스님이란 조금은 특별한 스님이 있었기에 당시 나의 삶은 단조롭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그의 행보를 곁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범상치 않은 한 수행인의 풍도(風度)를 느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