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배는 갈고 닦아야 빛나는 것처럼
법기 알아 보고 정성껏 지도해야
선종에서는 인재를 법기(法器)라고 부른다. 법을 담아낼만한 그릇이라는 말이다. 나무꾼 노행자가 홍인을 만났을 때 ‘남방 촌놈’이라고 매우 무시하니 “불법에는 남북이 없다”라는 대답으로 오조선사에게 법기임을 인정받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하여 뒷날 제6조가 되어 선종을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 놓는다.
일반적으로 조사들의 법문을 모아 편집한 것을 ‘00록’ 혹은 ‘△△어록’이라고 부르는데 반하여 육조혜능 선사의 어록만은 후학들이 ‘경전’이라는 호칭을 부여하여 다른 어록과 차별을 지으려고 할만큼 그는 선종에서 불후의 금자탑을 세운 인재이다. 그래서 ‘혜능록’인 〈육조단경〉은 일찍이 경전으로서의 후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어록들이 그보다 못하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강조하고 싶은 말은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말처럼 눈밝은 사람인 오조홍인 선사가 선종 미래의 동량을 미리 알아보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현장 법사가 법제자인 규기를 어릴 때 발견하고는 출가를 반대하는 그의 부모를 설득해 ‘바랑에 담아’ 절로 데리고 오는 것도 모두가 법을 위함이다.
선종의 중국 초조(初祖)인 달마 대사도 예사 법기가 아니였던 모양이다. 이를 그의 스승 반야다라가 알아보고 제자로 맞아들인다. 달마는 인도왕 향지(香至)의 셋째왕자다. 출가하기 전부터 예사롭지 않는 소리를 했던 모양이다. 부왕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진주구슬을 보여주고 그 소감을 물었다.
“이것은 세간의 보배일 뿐이니 귀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보배 중에는 법의 보배가 으뜸입니다. 또 이 광채는 세간의 광채이니 귀한 것이 못됩니다. 모든 광채 중에는 법보의 광채가 으뜸입니다. 또 이 광명은 세간의 광명이니 귀한 것이 못됩니다. 모든 광명 중에는 법보의 광명이 으뜸입니다.”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의 눈에는 그 진주구슬이 의미가 있겠지만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한갓 흔해빠진 유리구슬에 불과하다. 법의 귀함을 어찌 진주구슬에 비길 수 있으랴. 그래서 법의 구슬을 법보라고 불렀던 것이다. 사실 진주구슬의 광명이라고 해봐야 얼마만큼 주변을 비출 수 있겠는가? 지혜의 광명은 온 세상을 세세생생 밝힐 수 있는 것이니 그 비출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비교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이런 이유를 그는 참으로 선종적 관점에서 법기답게 설명한다.
“이 구슬의 광채는 스스로 비치지 못하고 지혜의 광명은 이 광명을 분별합니다. 이를 분별한 뒤에야 구슬인줄 알게 되고 구슬임을 안 뒤에야 보배임을 압니다. 그것이 보배임을 밝혔으나 보배는 그 스스로 보배가 되지 못하고, 그것이 구슬임을 분별하나 구슬은 스스로가 구슬이 되지 못합니다. 구슬이 스스로 구슬이 되지 못하므로 반드시 지혜의 구슬에 의하여 세간의 구슬을 분별하고, 보배가 스스로 보배가 되지 못하므로 반드시 지혜의 보배에 의하여 법의 보배를 밝힙니다.”
이 정도 안목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불원천리하고 달려가서 반드시 데리고 와야 한다. 하지만 데리고 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 잘 가르쳐서 법기를 만들어야 한다. 오래 전 명문대학 출신들이 대거 발심출가하여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인물들이 얼마 전 부처님오신날 특집으로 또 매스컴을 탔다. ‘제도권’ 밖에 있는 그들을 보고는 한켠으로 참으로 씁쓸했다. 그들을 우리가 얼마나 애정을 갖고 제대로 가르치려고 애를 썼는가.
규기의, 정말 말도 안되는 ‘오계도 지키지 않겠다’는 요구를 현장 스님은 선선히 수용하여 출가시킨 후 그를 다시 발심시켰다. 그다음 제대로 된 공부길을 제시, 규기를 완벽한 수행자로 바꾸어 놓은 인내심과 안목은 그래서 시대를 초월해 더욱 빛나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