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인식과 느낌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아상의 극복은 근본 초월의 위대한 공덕
‘아름답다’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자. 우리나라 고어에서 ‘아 답다’는 ‘나답다’는 뜻이다. 나와 비슷하면 좋다는 뜻이 변화해서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아름답다는 뜻으로 변화했을 것이다. ‘아 ’이 왜 나를 나타내는가를 언어학적으로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의 ‘한 아름’이 팔을 벌려서 들어오는 거리만큼을 나타내는 말이므로 아마도 나의 소유와 관련된 말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나의 소유로 들어올 수 있는 만큼’이 내가 좋아하는 영역이 된다는 언어의 연원을 생각해보면, ‘나’ 혹은 ‘나의 소유’가 언어에까지도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생물학자는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생물의 특징이라고 믿어지는 자기 번식 기능을 무생물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무생물인 다이아몬드도 자기의 결정 모양을 복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감기나 사스의 병원균으로 알려져 있는 분자인 바이러스 또한 과연 생물인지, 무생물인지 정의하기가 힘들다.
생물의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나와 남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생물은 나의 몸에 다른 물질이 들어오면 금방 알아차려서 다른 물질을 무력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상처가 났을 때, 염증이 생기는 것은 바로 외부 병원균을 알아채고 대항하는 물질을 내놓은 생명의 오묘한 자기 인식 기능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기능이 없다면 생명 유지가 불가능할 것이다.
역기능 또한 있는데, 이것이 장기 거부 현상이다. 다른 사람의 장기를 이식할 때 의사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남의 장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기인식 능력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자기 인식 기능 역시 몸 세포 중 핵의 DNA에 저장되어 있고 항원이 들어왔을 때 항체가 만들어 지는 원리를 이용해서 백신을 개발하기도 한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줄기 세포 배양기술 역시 바로 남의 것이 아닌 나의 장기를 쉬운 방법으로 기르고자하는 노력이다.
과연 ‘나’라는 느낌이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뇌 과학자들은 나의 한 아름 안에 들어오는 물건을 보았을 때, 활성화되는 뇌 부분을 촬영함으로써, 머리 꼭대기 부분인 두정엽 약간 뒷부분에 위치하는 정위영역이 ‘나’라는 느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와 같이 ‘나’라는 느낌은 크게는 뇌로부터, 작게는 세포 분자들의 자기 인식 기능까지 뿌리 깊게 존재하는 무엇임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한국 선불교의 이론을 제공하는 경전으로 광범위하게 읽히는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의 핵심이 적혀있는 3장 ‘대승정종분’을 보면, 보살이 ‘아상’을 가지지 않고 남을 도와주는 것(보시)이야 말고 가장 큰 복임을 가르치고 있다. 얼핏 보면 싱거운 가르침과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진화된 ‘나’에 대한 느낌의 뿌리를 생각하면, 아상을 버리고 남에게 보시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숙제인가를 상상할 수 있다. 아상을 극복한 복덕의 크기는 상상 조차도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