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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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단식의 불이법문/이우상(소설가·대진대 문창과 겸임교수 )
사마귀가 수레를 막아선 꼴을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고 한다. 도저히 될법하지 않은 싸움을 일컬음이다. 기독교에서는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라 한다. 영국 속담에는 파리가 거북을 물어뜯는 격이라고 한다. 천성산을 살리려는 지율 스님의 단식투쟁이 그랬다. 2003년 부산역 앞에서 38일간 단식을 할 때 세상은 무심했다. 뜨거운 뙤약볕만이 내리쬐었다. 그 후 45일간 매일 3천배기도, 또 다른 45일간, 58일간 단식 때도 마찬가지였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홀로 외로웠다.
대통령 선거공약이 철통같은 약속인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환경영향평가에 대한 재검토위원회가 열렸지만 지율 스님은 배제되었다. 이성적, 합리적 문제 해결과는 간격이 점점 벌어졌다. 연약한 비구니 스님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또다시 단식밖에 없었다.
단식 31일째 그의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걸을 때마다 발꿈치가 신발에서 빠져나간다. 이제 모든 것이 내게서 헐거워져 가고 있다. 자꾸 흘러내리는 바지춤과 품이 넉넉해지는 적삼도.’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싸움이 100일 단식에 이르러 목숨이 민들레 홀씨처럼 허공에 흩날릴 지경이 되어서야 세상이 법석을 떤다. 모든 언론의 첫머리에 지율이란 이름이 창처럼 펄럭인다. ‘풀었다, 살았다, 이겼다’는 함성이 들린다. ‘단식에 밀리고, 법적공방에 휘둘리고, 천문학적 비용손실’이라는 탄식도 들린다.
이것은 싸움이 아니다. 승자가 웃고 패자가 우는 싸움이 아니다. 지율 스님은 승자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를 규정하는 잣대를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목숨을 걸어야 하나의 잣대가 세워지는 관습을 타파해야 한다. 3·8선 긋듯이 책상 위에서 줄을 그으면 산을 뚫고 물을 막을 수 있다는 발상을 버려야 한다. 목숨을 걸지 않아도 환경을 걱정하는 목소리에 귀를 열어야 한다.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앞으로 3개월간 환경영향 공동조사 기간 동안 조사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전부다. 지율 스님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공동조사의 공정성, 엄격성, 정확성, 미래지향성 뿐 이다. 그 원칙이 지켜진다면 지율 스님의 단식이 세상에 던진 교훈은 크다. 목숨을 걸어야 하나의 원칙이 세워지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
덜먹고 덜자며 지구촌의 여러 곳을 다녀보았다. 나라마다 환경 지키기에 대한 열기가 뜨거웠다. 보이지 않던 것, 들리지 않던 것들이 정수리에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심각하게 다가왔다. 한반도는 너무 좁다. 함부로 부수고 뭉개기에는 여백이 없다. 편리를 목적으로 여기저기 들쑤셔 볼 공터가 없다. 있는 것을 오롯이 지키는 데에 힘을 모으는 것이 백번 옳은 일이다. 재생될 수 없는 것이 생명이요 환경이다.
체중 30㎏이 될까 말까한 비구니 스님이 세상을 향해 부르짖었던 절규가 우리 모두를 일깨우는 찬물이다. 단식을 풀며 지율 스님은 말했다.
“모든 생명과 우리들이 둘이 아니라는 데서 천성산 이야기를 시작했으며 지금은 대립되는 듯 보이는 정책과 저희들이 동화처럼 쓰는 도롱뇽 이야기가 둘이 아니라는 데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의 미숙함으로 인해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이제 마른 땅에 심어진 생명의 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그 영지가 우리와 아이들의 미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의 불이법문이 극단과 적대가 아닌 세상, 여법하게 회향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되길 바란다. 앞으로는 첫 단추를 잘못 꿰는 일이 없기를, 잘못 꿰어진 첫 단추로 인한 갈등과 폐해가 종식되는 계기가 되길 염원한다.
2005-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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