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수행인듯 늘 부지런
도량 구석구석 예쁘게 가꿔
자광 스님, 그는 늘 웃고 있었다. 개구쟁이처럼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스님의 모습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그것이 그의 독특한 모습, 아름다운 그만의 진실한 표정이었다.
스님은 항시 일을 했다.
일을 해야만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한다는 듯이 그렇게 열심히 하루종일 일을 했다. 가만히 두어도 괜찮을 석축을 허물어 버리고 다시 그 석축을 새로이 쌓아 올리고 쌓아 올리고 하면서 땀을 흘리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사람의 손이 가면 또다시 새로이 만들어지고, 만들어지면서 변모해 가는게 자연의 법칙이 아니든가.
그는 그렇게 이것저것 손댈 곳 안 댈 곳, 건드리고 건드리면서 도량의 이모저모를 나름대로 꾸미고 꾸미며, 그것으로 나름의 삶을 꾸려왔다.
벌써 한참이나 지난 이야기다. 자광 스님이 여기 청량산 청량사의 위쪽, 외청량 응진전에서 머물 적 이야기이다. 스님은 건강했고 활달했고 아무런 거침도 없었다.
도량 주변 가꾸는 걸 좋아했고, 조그만 야생의 풀 한포기, 거기서 피어나는 봄의 꽃 한 떨기를 소녀처럼 쳐다보며 좋아했다. 그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스님, 제가 적음 스님이 계시는 토굴에 가서 산죽(山竹) 몇 뿌리와 몇 달째 계속 피고 진다는 국화 몇 뿌리를 얻어서 심어 놓았어요. 이것들이 잘 자라 꽃을 피우고 또 산죽이 싹을 틔우면 얼마나 좋겠어요.”
스님은 내게 이렇게 말하면서 활짝 웃었다. 그, 적음 스님의 토굴에서 가져다, 옮겨다 심은 산죽과, 오래피고 진다던 국화꽃이 지금도 살아서 그의 뜻대로 염원대로 있다고 들었다.
그는 지금 여기 없다. 저 어디 청송 어디쯤의 후미진 한적한 곳에 새로 둥지를 틀고 있다고 들었다. 거기서 대추농사도 하고 고추농사도 하고 그러면서 한가롭게 삶을 꾸려간다고 들었다.
자광 스님, 그의 내력은 조금 특이하다. 그의 내력을 여기서 언급하긴 참으로 저어하지만, 우리 불가에선 귀한 법(法)의 소식이기에 전하려 할 따름이다.
스님의 세 형제는 모두 스님이다. 둘째가 원공 스님이고, 셋째는 일공 스님이다. 원공 스님은 불화(佛畵)를 그리기도 하고 조각을 하기도 하면서 그 자신만의 부처의 세계를 천착한다고 들었다.
막내인 일공 스님은 김천에 있는 직지사포교당 개운사의 주지를 맡아 한참동안 일하다 지금은 원공 스님이 머물고 있는 경주의 유학사(柳鶴寺)에서 함께 지낸다.
속세에선 별스럽게 가까이 지내지 못했는데, 이제 부처님의 법계(法界)로 들어와 다시 그야말로 정다워졌노라고, 자광 스님은 내게 말하며 그 답지 않게 눈시울을 붉혔다.
자광 스님, 그의 어머님은 유학사에서 둘째 원공 스님과 함께 계시다 얼마 전 지병으로 멀리 회향하셨다. 세 자식 모두 부처님 품으로 보냈으니 그냥 그러하지만, 조금은 허무하다고 하시면서 늘 되뇌이시던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면서, 자광 스님은 눈시울을 붉혔다.
중도 자식이거늘, 어찌 혼자 계시는 어머님을 모시고자 아니하랴.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는 어느 날 밤,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며 그는 큰 울음을 울었다고, 짐승처럼 울었다고 했다. 그의 울음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귓전에 메아리처럼 회향하기를 바란다.
불가(佛家)에선 일찍이 이런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뭇 중생 가운데 인간으로 태어나기란 지극히 어렵고,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하여도 남자로 태어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불가능에 가깝고, 설사 남자로 태어난다 치더라도 불연(佛緣)을 입어 입산수도하기란 또한 지극히 어렵고 어려운 일이라고….
이렇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하건대 한 집안에서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세 명의 형제가 불연을 입어 입산수도하고 있으니 이 어찌 감탄할 일이 아닌가.
자광 스님의 세 분 형제는 비록 생전의 어머님에겐 크나큰 불효를 저질렀다고 할지 모르지만, 어찌 보면 큰 은덕을 어머님께 베풀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 명도 아닌 세 명의 형제가 불문에 귀의하여 큰 법(法)의 세계에 몸담고 있음은 축복이다. 그렇다. 커다란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