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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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등불만은 절대로 꺼트리지 말아야
모든 것에서 나라는 것을 쑥 던지고 빼버려야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요?

스님께서 마음 도리를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토록 간절하게 말씀해 주시는데 저희들은 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처럼 절절하게 일러 주시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며 저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요?


항상 하던 말이지만,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눈물이 뼈에 사무치리만큼 안타깝습니다. 어찌 그렇게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를 믿지 못할까요? 어찌 그렇게 수억겁 광년으로부터 자기를 끌고 온 장본인을 믿질 못할까요? 이 모습으로 저 모습으로 진화를 하면서 자기가 한 대로, 자기가 한 것대로 끌고 다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거죠. 주인공이 그렇게 하라고 그랬나요? 태양이 잘못하고 잘하라고 했나요? 그러니까 자기 마음에서 잘못돼서 행을 잘못하거나 마음을 잘못 쓰거나 이런 것이 속으로부터 자꾸 나오면 그것을 ‘이러면 안 돼!’ 하고 거기다가 맡겨 놓는 거죠. 맡겨 놓고 침착하게 지켜보고 체험하는 것이 진짜 참선입니다.
나는 어떤 땐 차를 타고 가다가도 슬그머니 속에서 눈물이 납니다. 여러분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자기가 아닌데도 그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겠지만, 우리가 수없이 변화돼서 돌아갈 때 이것이 됐다가 저것이 됐다가, 이 부모가 됐다가 저 자식이 됐다가, 이렇게 사생의 천차만별의 생명이 뒤바꿔지면서 돌아갔을 때는 어떤 것이 내 자식이고, 어떤 것이 내 부모인지 전혀 분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렁이도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습디다. 풍뎅이도 그렇고 가재도 그렇고 물고기도 그렇고, 어떤 거를 막론해 놓고 다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습니다. 남녀가 있고요. 그런데 그 남녀가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잘 산다 하더라도 연방 변질이 되고 바뀌어서 돌아가니까 행복도 잠시잠깐이죠, 알고 본다면. 그러니 그 돌아가는 수레바퀴 속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얘깁니다.
항상 말씀드리는 거지만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 49년을 설하셨으면서도 한마디도 말한 예도 없고, 나도 없다고 하셨을까요. 알고 보니까 천상천하유아독존이거든요. 지렁이 소굴에서는 지렁이가 높고 호랑이 소굴에서는 호랑이가 높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저마다 다 높은 거예요. 저마다 다 높고 저마다 다 나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으니 따로 ‘내가 너희들을 가르쳤다.’ 이럴 수가 있나요? 이럴 수가 없죠. ‘내가 마음을 내서 너희들에게 길을 인도했다.’ 이럴 수도 없고 ‘내가 너희들을 건져 줬다.’ 이럴 수도 없죠. 안 그렇습니까?
항상 이렇게 표현해서 얘기해 드리죠? 전깃줄과 전깃줄, 전자와 전자라구요. 이것이 있기 때문에 불이 들어올 수 있다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나하고 모습은 다르지만 간절한 마음이 와 닿을 때, 나도 간절한 마음이 함축이 돼서 가서 부딪치면 불만 번쩍 일어났지 이 줄이 했다고 할 수도 없고 저 줄이 했다고 할 수도 없는 겁니다. 상대성 원리로서 이쪽과 저쪽이 합쳐지지 않는다면 에너지가 나올 수가 없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했다, 네가 했다 그런 것이 아예 없는 반면에 ‘밝게 광명이 이루어졌다.’ 이 소리만 나올 수 있죠. 그러니까 부처님이든 중생이든 하여간에 모두가 99%는 부처입니다, 중생을 끼고 다녀서 걱정이지. 왜냐하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마음과 마음이 와짝 붙으면 불이 들어올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공부를 잘하신다면 ‘컴컴하면 불을 켜면 되고’ 이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왜 컴컴하게 삽니까? 컴컴하면 불을 켜서 밝게 살고, 배가 고프면 먹고, 소화시켜서 똥 누고 싶으면 시원하게 똥 누고, 편안하게 잠자고 싶으면 잠자라 이겁니다. 이것을 말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 이치가 복잡다단하다 할지라도 한 시간의 꿈입니다. 한 시간의 꿈! 한 시간의 꿈을 훌떡 벗어나면 세세생생에 끝간 데 없이 그냥 그대로 불바퀴 속에서도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배우들이라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소임을 맡아서 주어진 역들을 합니다. 그렇게 자기 잘하는 대로 작은 거든지 큰 거든지 다 소임을 맡아서 이 세상에 나오는데 남한테서 받아 가지고 나올 생각을 하지 말고 감독이 돼라 이거죠. 즉 말하자면 옥황상제도 벗어나야 됩니다. 부처라는 것도 벗어나야 부처입니다. 태양과 산하대지는 그대로 어머니이자 아버지죠! 그런데 우리의 마음과 마음이 서로 광명을 이루고 창조를 하고, 창조력을 기르고 이럭하는 것도 바로 인연에 따라서 모두 돌아가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천지도 둘이 아니죠. 어떻게 천지가 둘이겠습니까?
언젠가 미국에서 길을 지나가다 보니까 나이도 많이 든 백인이 말입니다, 리어카에다가 깡통, 병 이런 것만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어가고 있어요. 다리가 아프고 지치니까, 가다가 언덕에 이르니까 그냥 허덕허덕합디다. 그걸 보는 순간 ‘참, 모두가 자기가 한 대로 저렇게 소임을 맡아 가지고 나왔구나!’ 개미가 왜 개미가 된 줄 아십니까? 그 백인이 소임 맡아 가지고 나온 거나, 개미들이 소임 맡아 가지고 나온 거나 뭐가 다릅니까?
소 한 마리를 잡아서 버리면, 호랑이는 양쪽 팔, 다리를 모두 떼어서 먹습니다. 그러고 나서 또 여러 짐승들이 오는데 창자 먹는 놈이 있고, 살 뜯어 먹는 놈이 있습니다. 그런 뒤에는 뼈에 살 붙은 걸 떼어 먹는 새들이 있습니다. 아주 차례차례로 그렇게 소임을 다 맡아 가지고 뜯어 먹고 뼈다귀만 남으면 그 때는 개미 차례입니다. 그 뼈다귀 속에 들어 있는 거를 다 먹거든요. 그래, 그 백인이 그렇게 하고 가는 거를 볼 때 개미 생각이 퍼뜩 나는 겁니다. ‘아유, 저 사람 개미 좀 봐!’ 하구요. ‘사람의 모습은 가졌지만 그런 것을 얼마나 과거에 즐겼으면 사람으로 태어나서도 사람 개미로서 저렇게 소임을 맡았어야 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렵다, 망했다 이런 것도 남의 탓 할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빨리 수습을 하는 길은 ‘내 탓이야. 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인연에 따라서 모두 얽히고 얽혀서 입력이 돼서 이 세상에 지금 나오고 그렇게 되는 것이니까 너 알아서 해라. 너만이 그 얽힌 거를 풀 수 있고 너만이 해결할 수 있다.’ 하고 거기다 맡기는 그 작업을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작업이란 한 발짝 한 발짝 걸어가면서 지켜보는 관법(觀法) 즉, 지켜봐라 이거죠. 지켜보면서 마음으로 다스려 가면서 체험하는 것이 아주 제일 빠른 방법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빨리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이 다 그렇지는 않으시겠지만 그냥 급하게 닥치면 아예 잊어버리곤 방방 뛰어요. 나온 자리에다 다시 놔야 할 텐데, 내보낸 자리에다 도로 놓고, 내보낸 놈더러 해결을 하라고 그래야 빨리 수습이 되는데, 엉뚱하게 딴 데다가 전부 깔아 놓고는 온통 팔팔 뛰니까 이건 더 더딜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한참 돌다가 생각이 나면 그때서야 놓으니 이미 차 지나간 자리 아닙니까?
그리고 며칠 있으면 촛불재를 하게 될 텐데 촛불을 보고 내 마음을 정리하는 사람도 있고, 내 마음의 촛불을 켜 들고 정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의 불을 켜는 거지 그냥 켜는 게 아닙니다. 보이는 데서 켜는 불은 가랑비가 쏟아지면 꺼지지만 마음의 불을 켜는 것은 억수 같은 비가 쏟아져도 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꺼졌다 켜졌다 하는 불이 아닙니다. 보이는 불과 보이지 않는 불이 둘이 아닌 까닭에 우리가 마음의 촛불은 항상 켜고 다니는데, 내가 어떠한 의식으로 인해서 마음의 불을 꺼뜨리고 갈 때는 캄캄합니다, 마음의 불을 껐을 때는 캄캄합니다. 그럴 때 남이 촛불을 켠 걸 보면 바로 또 마음의 촛불을 켜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밝게 살 수 있는 거니까 안 켜는 것도 안 켜는 것이 아니죠.
그렇다고 촛불을 켜고 이러는 것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닙니다. 여기도 다 미생물이 있고, 날아다니는 게 우리 눈에는 안 보여도 다 있습니다. 그것들도 다 내 인연으로 인해서 있는 겁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겁니다. 내가 없다면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 하나 켜 놓는데 얼마만큼 자기의 앞뒤가 깨끗해지는지 모릅니다. 과거의 조상들이나 미래의 자식들을 깨끗하게 정리해 줄 수 있는 촛불입니다. 마음으로 그렇게 켜야 되겠죠. 자기 주인공은 잊지 마시구요. 세세생생에 내려온, 지금도 주인공이고 미래에도 주인공이니까요. 주인공 죽는 법 봤어요? 하여튼 내 마음의 등불만은 절대로 꺼뜨리지 마십시오.


나를 발견하고 나서의 공부 방법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의 일차적인 공부 방법과 그 다음에 나를 발견하고 나서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모든 건 주인공에 일임해서 놓으십시오. 왜 못 믿습니까? 자기를 수억겁 전부터 이끌어서 모습을 바꿔 가면서 이날까지 이끌어 온 자기 근본자리를 왜 못 믿습니까?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신다면 일체 생활에 하나도 빠짐없이 그렇게 하고 계신 겁니다.
모든 것은 일체 자기한테서 나온 거니까 자기한테 놓고 가고 있습니다. 수억겁 전부터 자기를 진화시켜서 사람까지 이끌어 온 장본인의 근본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나를 발견 못한 사람은 모든 것을 놓고 가는 겁니다. 제대로 놓고 간다면 모든 일에서 편해집니다. 그렇게 하고 간다면 생활이 심성과학적으로 돼 나가는 거죠. 그렇게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이차적으로 뭐를 하는가? 몸속에 든 내 중생들을 둘로 보지 않고 부처와 나와도 둘로 보지 않고, 일체 중생과 나와도 둘로 보지 않는 도리를 습득하게 됩니다. 둘로 보지 않게끔 되어 있습니다. 부와 자가, 자기와 자기를 둘로 보지 않는 반면에 스스로 움죽거렸다 하면 자가 되고 가만 있으면 부가 되니까 둘이 아닙니다. 그 뜻을 잘 생각하십시오.
마음이라는 것은 온 도량 한울에서, 즉 하나로서의 마음을 내게 하는 겁니다.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내게끔 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주인공, 근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둘로 보지 않을 것.
다음에는 모든 걸 둘로 보지 않는 까닭에 일체가 수록된 대로 하나하나 풀려서 나올 때에, 제자리에 다시 놓으면서 처음에 하던 거와 마찬가지로 다시 놓고 실험을 하면서 체험한다면 자기 중생들을 제도하는 과정이 되는 겁니다. 즉 하나하나 업보로써 맺어진 인연들이 화해서 보살로 이어지는 것이죠.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니라 보살로 화한다는 얘깁니다. 사람이 사는 데에 음과 양을 통해서 사람이 되고, 음과 양을 통해서 돼지 소굴로 들어가면 돼지가 되는 겁니다. 이런 까닭에 그 업식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과에 의해서 뭉쳐진 그 자체가 아주 정밀하게 파헤치고 나오는 겁니다. 현실에 나에게, 모두 각자에게 말입니다.
그러니 나를 발견한 그때서부터 비로소 ‘공부’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죠. 공부를 하는 수행의 여건을 아주 치밀하고 무겁게 하게 되지 가볍게 바깥으로 끄달리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하나하나 생활 속에서 나오는 대로, 바깥에서 들어오는 대로, 안에서 일어나는 대로, 마음이 있는 거든지 마음이 없는 거든지 어떠한 것을 막론하고 환상에 끄달리지 않는 겁니다. 환상에 끄달리지 않는 반면에 모든 것은 중생들이 전부 화해서 너 나가 없이 그렇게 스스로서 돌아가는 겁니다.
이 말을 꼭 해야만 되는 것은 나를 발견해 가지고서도 공부가 상당히 어려운 시기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 학생들이 자라 가지고 한창 예민해졌을 그 무렵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에는 좋은 게 보이면 부처님이 보였다 하고 우쭐하기도 하고, 마구니가 나타났다고 하기도 하면서 버리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때 또 어렵습니다. 하다못해 풀 한 포기도 버리지 않는, 그냥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지극한 믿음과 물러서지 않는 패기가 필요하죠. 그리고 그때는 당차져야죠.
그러니 나를 발견해 가지고 둘로 보지 않는다, 일체 환상의 꿈이든지 생시든지, 환상에 부처가 나오든지 귀신이 나오든지 어떠한 것에 속지 않아야 됩니다. 그것이 항복을 받는 시기입니다. 모든 것은 둘로 보지 않는 것이죠. 모든 환상에 끄달리지 않고 수련을 하면서 체험을 하는 겁니다. 물러서지 않고 말입니다. 수없이 나오는 대로, 컴퓨터에 수록이 된 것을 다 무심(無心)으로 돌려서 화해지면 모든 중생들이 천백억화신으로 화합니다.
내 몸 내 마음부터 알아야 하고 내 몸에 있는, 내 집에 있는 중생들부터 제도해야 합니다. 내 집에 있는 중생들을 제도한다면 바로 그때서는 삼십이상의 금강신으로서 구족해지는 겁니다. 이것도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때를 넘어서서 자기가 완성됐을 때, 자기 몸의 모든 중생들을 제도해서 완성이 됐을 때에 바깥의 경계와 안의 경계를 또 체험을 하고 돌아가는 수련을 쌓아야 합니다.


특단의 수행방편이 필요한지요?

내 안에서 들끓는 의식들을 어떻게 다스려 나가야 하는지요? 어떠한 특단의 수행의 방편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요? 그리고 저희 앞에 펼쳐지는 외부세계의 그 모든 것들을 해결해 나가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요?


예전에 강태공은 곧은 낚시를 넣고 앉았으면서 영계를 다스릴 때에 명령을 해서 다스렸다 합니다. 노자(老子)는 영계를 다스릴 때에 영원한 나의 친구로서 나와 둘 아니게 다스렸다 합니다. 또 제갈공명은 촛불을 켜고 영계를 다스렸다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어떤 분이 다스린 것이 정(正)이라고 생각합니까?
모든 사람들이 생각할 때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물리를 다 파악 못한 사람이 그러는 겁니다. 옳다 그르다가 없이 내가 그대로, 닥치는 대로 여여하게 생활을 한다면 그처럼 그대로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또 모르고서 그대로 한다면 아무리 해 봤자 걸립니다. 내면의 나와 외부의 나가 그렇게 둘이 아니게 할 수 있는, 내면의 세계를 완전히 파악하고서야 외부의 그 모든 것을 가늠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야, 명령해서 쓰는 게 옳으냐, 영원한 친구로서 나와 둘이 아니게 쓰는 게 옳으냐, 촛불을 켜 놓고 쓰는 게 옳으냐?’ 했을 때 제갈공명은 촛불을 켜 놓고 썼기 때문에, 촛불이 꺼지고 또 켜지고 이게 있기 때문에 그 몸이 조금 더 있다가 갈 것을 그렇게 자유스럽게 못했다 이런 뜻이 있죠. 그래서 물질로써는 절대로 거기에 눈을 뜨지 말라 하는 거죠. 물론 나의 내면세계의 그 모든 것을 알고서야, 파악하고서야 이해가 가고 또 가늠하고 깨닫고 이러면서 결국은 이거는 이거고 저거는 저거고, 닥치는 대로 해결할 수 있는 자기의 그 뿌리입니다. 노자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곧은 낚시를 넣고 아무리 있어 봐라. 네가 명령해서 한다면, 말하자면 군사를 모을 때에 분산되기가 쉽고 또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해이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 백천만의 군사를 거느릴 수가 없다.” 이런 말을 했답니다. 그러니 노자는 부처님의 뜻을 그만큼 둘이 아니게 생활을 했던 모양입니다. 나도 잘 모릅니다마는 그런 말씀을 했다는 유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이런 말을 한 겁니다.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이는 걸로 표현을 하자면, 여러분이 깨 한 알갱이를 심는다면 얼마나 나옵니까? 많이 나오죠? 그런데 그거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 한계가 있느냐? 시간을 두어야 하고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한계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의식이란 것은 찰나찰나 바뀌어서 화할 수가 있으니 한 찰나에 한생각이, 그 한생각이 수천수만이 될 수도 있고, 하나도 없을 수도 있고,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초월돼서 닥치는 대로 자기가 중용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중용을 한다는 것은 자기 불바퀴를 마음대로 굴릴 수 있고 법바퀴를 마음대로 굴릴 수 있고 물바퀴를 마음대로 굴릴 수가 있다 이겁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여러분 몸속에 적게 잡아도 십일억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숫자를 어떻게 따지리까마는, 십일억이 넘지만 십일억이라고 대충 잡는다면 만약에 그 십일억 중에 하나가, 그 의식이 깨알처럼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하는 그런 게 없이 수만 개가 됐다가, 아니 억겁에 이 세상 대천세계를 꽉 덮고도 남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하나가 말입니다. 그 많은 것이 다 벌떼 일어나듯 생각이 그렇게 많이 일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다 이런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병고도 하나가 일어났다 하면 수십 개가 일어나고, 만약에 막는 놈은 적고 해하게 하는 놈은 많아진다면 그 집은 쓰러지는 겁니다. 좀먹는 겁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만약에 내 마음이, 지켜보는 마음이 빨갛게 생각을 했다 하면 전체가 빨개집니다. 노랗게 생각을 했다 하면 전체가 노래지는 것이고, 악으로 나오는 걸 자기가 다스리지 못한다 할 때는 전체 악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몸속에 과거에 살던 그 자체가 쓰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묶어 놓지도 않았는데 인연에 따라서 저절로, 자연적으로 입력이 돼서 여러분이 짊어지고 나왔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사성제(四聖諦)를 설할 때 고(苦)라는 문제가 제일 첫번에 나왔던 겁니다. 여러분의 그 마음은 악으로 가게끔 이끌 수도 있고 선으로 가게끔 이끌 수도 있습니다. 고정됨이 없이 쉴 사이 없이 돌아가는 그 마음이 어떤 거든지 바로 이끌어나갈 수 있고, 지켜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실험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이끌어갈 수 있는 지배인과 같습니다. 그래서 본래자성불이라고 합니다.
본래자성불은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그 힘을 가하니 마치 맷돌처럼 물건만 넣으면 저절로 갈아져 나오고 맷돌이 이탈을 안 하고 잘 돌아가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그렇지만 심봉을 꽂지 않는 맷돌은 이탈을 하게 되고 물건이 잘 갈려 나오질 않아서 사는 데 복잡하고 배고프고 추운 문제들이 나오면서 한 가정이 파괴 직전에도 갈 수 있고, 또는 화목하지도 못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넓게 보지도 못하며 또 그렇게 좁아서 살기도 극히 어렵다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 놓으셨어도 지금 시대의 앀¬러분이 알아듣지 못하고 감지를 못한다면 좋은 말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여러분이 먹어 보지 못하고, 맛을 모른다면 그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의 내면세계의 그 살림살이들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그런 여러분이 돼야만 바깥의 살림살이도 이끌어나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생긴다 이겁니다.


내 안의 불성이 어디에 있나요?

본래 있는 나의 근본을 그대로 믿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내 안의 불성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열쇠고리라면, 그 열쇠를 불성이라 한다면, 늘이면 백천 개로 될 수도 있고 줄이면 하나도 없습니다. 너무 많아서 이거를 마음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이거를 공안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 공했다고 한 겁니다.
여러분은 “아휴! 참 세월은 무상해!” 이렇게 말씀들 잘 하시죠? 무상하다고요. 그런데 무상한 것은 허무가 아닙니다. 항상 고정됨이 없이 우리는 찰나찰나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거 할 때 내가,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나라는 것을 쑥 던지고 빼 버린다면 악도 없고 선도 없고 자동적으로 자기가 올바르게 선정도 베풀고 올바르게 물리가 터져서 둘이 아닌 도리를 그대로 여여하게 해 나갈 것입니다. 역시 물질이라는 거는 없어졌다 생겼다가 부서지고 썩고 그러면서 돌아가니 무상입니다. 무상!
이 세상에 모든 물질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무상이라고 한 것이지 사람들이 살아나가는 게 허무해서 한탄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우주 삼라대천세계의 근본은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요, 이 세상 일체 만 가지 생활의 근본은 인간의 마음에 가설이 돼 있다. 그러니 저 태양은 만물만생을 소생시키는가 하면 산하대지는 만물만생을 길러낸다.’ 천지가 둘이 아니죠. 애들을 기르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둘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지수화풍이라고 말씀드렸죠. 지수화풍이 돼서 지수화풍을 먹고 산다고요. 그래서 뱃속에 있는 모든 생명들이 자기 생명이지 딴 생명들이 아니에요. 나만 불성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생명들도 불성이 있어요. 그러면 그것이 한데 모이면 모이는 대로 불성이 하나요, 또는 흩어지면 불성이 너무 많아서 어떤 게 불성이라고 할 수 없으니 바로 부처라고 했고 무(無)라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어디로부터 좇아 나왔나 이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짊어지고 있습니다. 항상 얘기하지만 그거를 짊어지고 나온 인연에 따라서 입력이 돼 있는 것을 숙명통이라고 합니다. 과거를 짊어지고 나온 컴퓨터라고 해도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은 바로 어머니 아버지의 뼈와 살을 빌려서 몸뚱이 하나를 받았지만 자기가 한 일은 자기가 짊어지고 나오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 컴퓨터 안에 입력이 돼 있는 대로 솔솔 지금 현재 나오는 거죠.
그러니 입력이 돼 있는 그 자체가, 여러분이 몰라서 죄를 짓고 알아도 죄를 짓고, 아상이 있어서 죄를 짓고 무기력해서 죄를 짓고, 욕심이 많아서 죄를 짓고 불순해서 죄를 짓고, 그저 평등하게 생각지 못해서 죄를 짓고 올바르게 행하지 못해서 죄 지은 거는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런 의식들이 차원에 따라서 전부 깡통은 깡통대로 모이고 금은 금방에 모이듯이 자연적으로 그냥 모이죠? 저절로. 그러니 컴퓨터에 입력이 됐다고 볼 수밖에요. 전부 입력이 돼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 팔자 운명을 어디 가서 한탄을 하겠습니까. 자기 탓이지. 그러니 잘했든 못했든 자기 탓이에요. 그래서 악과 선도 놔라 했습니다. 그걸 놓지 않는다면 악으로 간다면 선이 따르고 선으로 간다면 악이 따르니 악과 선도 놔라. 또 입력이 돼서 나오는 데다 다시 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입력한 게 없어진다. 입력이 됐던 것이 다 없어지면 홀연히 자기는 밝아질 거다 이런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게 남의 탓은 하나도 없어요. 여러분이 만날 남을 원망하고 남을 증오하고 너 때문에 나는 살고 너 때문에 죽는다고 하지만, 사랑도 값비싼 사랑을 해야지 값싼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그건 망상이요 착이요, 욕심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고 나만 없다면 고정된 게 하나나 있나? 그러니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할 때에 내가 봤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공했어요. 내가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생각 안 할 때는 부처고 여러분이 생각을 했을 때는 법입니다. 또 여러분이 움죽거렸을 때는 바로 활용이에요. 그러니 부처는 먼 데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 마음속에 있으니 여러분이 수박이라면 수박씨를 바깥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으세요. 미래에 그 수박씨를 심어서 중생들을 다 먹이고도 그 씨는 되남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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