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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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연기(緣起)이므로 평등(平等)하다/한국학중앙연구원
내리는 눈발 속에서 “괜찮다, 괜찮다”

잠깐 정리하고 넘어갈까요.
1) 불교의 첫걸음은 우리가 아는 ‘사물’의 세계가 주관적 욕망과 환상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부터입니다. 주관적 욕망에 물든 환상의 세계를 상(相)이라고 하고, 그 칙칙한 점착을 벗어난 객관의 세계를 법(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상(相)의 세계에 집단적 무의식적으로 최면되어 있어서 객관적 법(法)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잘 자각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어렵습니다.
2) 불교의 지혜(智慧), 혹은 반야(般若)는 이 두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뜻합니다. 그 통찰력이 고통과 갈등의 ‘이 편(此岸)’ 세상을 벗어나게 하고, 우리를 ‘저 편(彼岸)’의 행복과 평화로 인도해줍니다.
그러므로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세계의 실상(實相)에 대한 이해를 더 깊고 철저히 해 나가야 합니다.
3) 오온(五蘊)은 바로 그 객관적 세계의 구성요소들(諸法)입니다. 오온을 통해 ‘자아’와 ‘이름’에 물든 주관적 환상의 세계는 폭로되고, 모든 문장과 어법은 ‘나’를 제거한 형태로, 남의 일처럼 순수 객관적 요소로 분석되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무아(無我), 나를 떠남으로써, 나는 비로소 해방됩니다. 그리고 나서 바라보는 세계는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연기법과 화엄의 세계, 즉 사물의 각 요소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緣起), 그리하여 총체적으로 하나인 세계(華嚴)의 장엄한 모습입니다.

신성한 예스
이 세계를 엿보신 분이 있습니까. 굉장히 어렵다고들 말은 하지만, 그러나 그까짓 것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뜰 앞의 잣나무’를 우리 모두가 볼 수 있듯이, 이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다만,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기만 하면 됩니다. 뜻대로 안되는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 저항하지 말고, 미당 서정주 노인의 시처럼, 모든 인간적 흔적을 덮으며 내리는 눈발 속에서, “괜찮다, 괜찮다”고 몇 마디 해 줄 때, 그때 그 세계가 단숨에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니이체는 이것을 ‘신성한 예스(Heilige Ja)’라고 불렀습니다.
불교 공부는 다른 공부와 마찬가지로, 반복하여 되새기면서 내 몸 깊이 각인시켜 나가는 작업입니다. 그리하여 그 이치들이 설거지를 하다가도 ‘그렇군’이고, 길을 가다 지갑을 잃어버려도 ‘그렇군’이며, 택시에서 요금을 승강이하다가도 ‘그렇군’이라야 비로소 불교의 가르침이 살과 피의 지혜로 거듭날 것입니다.

오늘은 이 연기법의 자연스런 귀결 하나를 살펴보려 합니다. 그것은 ‘평등(平等)’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중심 개념임을 다들 들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금강경> 제 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번역하자면, “자아의 점착을 떠나 깨끗한 마음으로 산다” 편의 전문은 이렇습니다.
“復次 須菩提, 是法 平等 無有高下, 是名 阿縟多羅三邈三菩提. 以 無我 無人 無衆生 無壽者, 修 一切善法, 則得 阿縟多羅三邈三菩提.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 卽非善法, 是名善法.”
직역부터 해 볼까요. “또 수보리야, 이 법(法)은 평등(平等)하여 아래 위가 없으니, 이를 일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이, 일체(一切)의 선법(善法)을 닦으면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수보리야, (지금) 말하는 바 선법은, 여래가 (이렇게) 말은 하지만, (실은) 선법이 아니다. 이를 선법이라 한다.”

학의 다리 긴 대로, 참새 다리 짧은 대로
조금 까다롭습니다. 내 식대로 의역해 보겠습니다. “또 수보리야, 객관적 세계(法)는 평등하니, 아래 위나 혹은 선악의 가치를 매길 수 없다. 이 소식을 아는 것이 바로 최고의 지혜이다. 의식 무의식적 자아의 점착과 흔적을 다 지우고 ‘깨끗한 삶’을 살아갈 때, 그때 최고의 지혜가 성취될 것이다. 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보리야, 내가 지금 ‘깨끗한 삶’이라 말한 것은 자아에 물든 더러운 삶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뜻에서 말한 것이지, 실제로 그런 삶이 자체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은 천만 아니다. 객관적 세계에는 더럽고 깨끗한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 소식을 “학의 다리 긴 대로, 참새 다리 짧은 대로”라고 표현했습니다. 학의 다리는 길고, 참새 다리는 짧습니다. 여기까지는 법(法)의 세계에 속합니다. 그러나, 여기 학의 다리는 길어서 좋고, 참새 다리가 짧아서 싫다고 말한다면, 그는 상(相)의 세계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곳이 미묘합니다. 이 분별(分別)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작동합니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호오와 가치판단은 개인적 수준에서, 사회적, 문화적 집단의 수준까지, 표면적 의식에서 무의식적 수준까지 걸쳐 있는 ‘우상’입니다. 그 바탕에 에고가 있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을 보존하고 영속시키려 하는 무의식적 욕구가 이 모든 분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근본 동인입니다. 나는 불교가 말하는 무명(無明)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
만일, 우리가 사물을 주관적 환상을 떠나서 바라보게 된다면, 다시 말하면 우리의 욕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如如)’ 바라 본다면, 그 세계의 모습은 어떻게 보일까요. ‘뜰 앞의 잣나무’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요. 단도직입, 그 세계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분’과 ‘차별’을 구분(?)해야 합니다. 구분이 객관적 세계의 차이를 가리킨다면, 차별은 주관적 욕망과 편견의 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을 다시 한번 살펴 주십시오. 불교를 말하는 사람들이 여기서 많이들 헷갈립니다.
하나의 법(法)이 다른 법들과 인연(因緣)에 의해 모여 행(行)을 형성했다가, 찰나에 멸한다면, 그리하여 우주가 찰나에 멸하는 법들의 연기적 과정(proscess)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다음과 같은 중대한 귀결이 도출됩니다. “우리는 그들 법(法) 사이의 가치의 우열을 매길 수 없다!”
이 높낮이의 차별 없는 특성을 불교는 평등(平等)이라 부릅니다. 거기에는 높고 낮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길고 짧음도 없고, 좋아하고 싫어함도 없으며, 명예도 좌절도 없습니다. 나아가, 수긍하기 쉽지 않겠지만, 삶도 죽음도 없습니다. 삶도 죽음도 없는 판에, 불교는 어디 있겠으며, 사성제 12연기며, 오온 육식이며, 연기법이며 화엄의 이치인들 어디 있겠습니까.
무슨 그런 불경스런 망발이 있느냐고요... 불교의 정수를 담고 있는,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독송하는 <반야심경>이 그 섬뜩 아득한 소식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煖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200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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