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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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종의 간경관(看經觀)/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지율 스님 때문에 오랜만에 대중과 더불어 <금강경> 한편을 완독하게 되었다. 조계사 극락전 이층에서 일주일동안 다른 종교성직자들이 참여하는 단식과 별도로 일층에서는 조계종도들의 기도가 함께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마음을 맞추어 운율을 함께하여 합송을 하면 그 나름대로의 맛과 멋으로 가슴이 울려온다.
간경(看經)은 독경(讀經)과 다르다. 경전에게 굴림을 당하면 독경이고 경전을 주체적으로 굴리면 간경이 된다. 반야다라 존자의 이야기도 이와 궤를 함께 한다.
달마 대사의 스승이 반야다라 존자이다.
스승을 보면 그 제자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스승의 행적을 한번 봐두는 것도 괜찮겠다.

동인도 국왕이 수행자를 초청하여 재(齋)를 베풀었다. 공양청을 받아서 가면 당연히 경을 읽어주고 축원을 해주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같이 간 다른 승려들은 열심히 일심으로 경전을 읽고 있는데 반야다라 존자만이 경전을 읽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존자께서는 어째서 함께 경전을 읽지 않고 가만히 계십니까?”
그러자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빈도(貧道: 승려가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는 표현)는 숨을 내쉴 때 모든 반연을 따르지 않고, 숨을 들이쉴 때도 5온·6처·18계에 머물지 않나니, 항상 이렇게 백천억경을 읽습니다. 한 두권 뿐만 아닙니다.”
존자는 경전을 읽는 것은 그 자체가 수행이라는 입장이다. 즉 모든 반연을 쉬고 일상생활의 번뇌에 끄달리지 않는 삶 그 자체가 바로 경전을 읽고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시간에만 경을 읽어봐야 한 두 권이지만 항상 일상 속에서 경을 읽고 있기 때문에 백천억경을 읽고 있다는 논리이다.
경전을 들고 모양을 갖추어 읽는 형식보다는 경전을 읽는 그 정신으로 항상 일상생활에 임하고 있다는 입장을 피력한 것이다.
위앙종의 실질적 개조인 앙산 선사도 사미였을 때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종(宗)화상 문하에 있으면서 어느 날 동자들 방에서 경을 읽고 있는데 화상이 와서 물었다.
“누가 여기서 경을 읽고 있었는가?”
“제가 읽었습니다.”
“무슨 경 읽는 소리가 노래부르는 것 같으냐? 경도 제대로 읽을줄 모르는가?”
그러자 앙산 사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화상께서 경을 읽을줄 아시면 한번 읽어 보십시오. 어떻게 읽는 것이 제대로 읽는 것입니까?”
그러자 종(宗)화상이 “여시아문…” 하면서 경을 읽기 시작하자 앙산 사미가 말했다. “그만! 그만 두십시오.”
사미인지라 경읽는 소리가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종 화상이 유창한 운율에 매끈한 목소리로 경을 읽어주려 했지만 앙산 사미는 그것을 거부하였다. 경 읽는 것이 가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일심으로 읽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경 읽는 자세나 가락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간경에 임하는가 하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이런 것이 선종적 간경관(看經觀)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청매인오 선사는 “심불반조(心不返照)하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라”고 하여 마음을 관조하지 않으면 경을 읽어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단언하였던 것이다.
200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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