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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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지명 스님 -70여년 한결같이 참선 정진
“어린 것이 멀고도 험한 길을 오게된 것은 전생에 숙연(宿緣)이 있어서 그러하다. 공부 잘하면 성불할 것이다.”
금강산 유점사 조실로 있던 만공 스님으로부터 이런 수기를 받고 불법에 인연을 맺은 12살 어린 소녀는 이제 미수를 바라본다. 화운사 능인선원 선원장 지명 스님(85)은 13살 되던 1932년 12월 수덕사 금선대에서의 만공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머리를 깎았다.
1921년생인 지명 스님은 어린나이에 출가해 온통 선방에 다니면서 참선 공부할 마음만 앞섰다. 그런 스님에게 만공 스님은 몇 해동안 노스님들의 시봉만을 맡길 뿐 선방근처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갖은 고생을 물리치고 어른 스님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스님은 수덕사 강당에서 사집을 마쳤다. 19세가 되던 해 겨울 만공스님의 허락으로 겨우 선방에 방부를 들일 수 있었다.
이듬해 선방에서 용맹정진하던 지명 스님에게 만공 스님은 “아난존자에게 가섭이 도각문전에 찰간착(倒却門前 刹竿着) 하라 하니 아난이 대답을 못하고 교족(翹足)공부 칠일칠야를 하여 활연대오(豁然大悟) 하였는데, 지명아 너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지명 스님은 “꺾을 것이 없는데 무었을 꺾으란 말입니까”라고 답했다. 만공 스님은 “더더욱 공부 열심히 하여라”며 격려했다.
얼마뒤 만공 스님은 “성품이 공하니 경계가 고요하고 마음이 비추는 달빛은 시방세계를 비추더라(性空復境寂 心月照十方)”라는 계문과 월조(月照)라는 당호를 내려 지명 스님의 공부를 인가했다. 이 무렵 지명 스님은 “흉중에 의정(疑情)이 가득해 일상생활 하는 동안에도 화두를 놓지 않고 정진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42년 석우 스님으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하고 45년 만공 스님의 열반 추도문을 직접 썼다. 얼마전 입적한 숭산 스님과는 법담을 나누는 도반으로 오랜 세월을 같이 했다.
스님이 첫 주지 소임을 살게 된 것은 53년 서산 개심사에서였다. 황폐했던 개심사를 재정비 한 뒤 얼마 안 있어 우암 ‘차재윤’ 거사가 창건한 화운사의 주지직을 제의 받았다.
62년 화운사를 맡아 강원을 열고, 강당, 요사, 대웅전, 선원을 비롯한 대작불사를 이뤄냈다. 85년 강원을 닫고 다시 88년 선방을 열면서 수많은 제방 수좌들과 함께 했다.
비록 지금은 몸이 불편해 대중들과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결제가 시작되면 선객들을 제접하고 공부를 점검한다.
“중의 본분은 오로지 정진해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지명 스님은 요즘도 하루를 여일하게 수행정진하고 있다. 일생을 참선 정진한 비구니계의 원로선지식으로 지난해 하안거에도 선원장으로 수좌회 방함록에 방부를 올린 조계종 최고 비구니 선객으로 후학들의 끝없는 존경을 받고 있다.
조용수 기자
200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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