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실천승가회’ 창립 앞장
‘실천불교’ 이사 맡아 실무 복귀
모든 게 안개에 가린 듯 암담했다. 암담한 시절이었다. 그 안개를 걷어내고 새롭고 좋은 인연들을 한번 만들어 보자고 여러 스님들이 뜻을 모았다.
종단은 자꾸만 피폐해져 가고 있었고, 이러다간 안 되겠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천년도 훨씬 넘게 이어져 온 한국불교가 지금 종단을 이끌고 있는 어리석고 탐욕에 찌든 모모한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흔들리고 있는 것을 가만히 앉아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 한결같은 의견들이었다.
천구백구십이년, 이러한 의견들이 수렴되어 여러 스님들이 동참한 가운데 ‘실천불교전국승가회’가 창립되었다.
‘선우도량’ 스님들과 여러 가지 제반사항들을 의논했고, 뜻을 같이 하기에 이르렀다.
효림 스님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스스로 그야말로 총대를 메었다.
1994년, 실천불교전국승가회와 선우도량 스님들은 조계종 총무원으로 들어가 집행부를 해체했다. 새로운 한국불교의 앞날을 위하여 그들은 모든 고통을 감수하며 소신껏 밀고 나갔으나 스님들의 앞에 놓인 벽은 너무나 두터웠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의 종단개혁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효림 스님은 많이 괴로워했다고 전해들었다.
효림 스님은 불교신문 사장을 맡아 일했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좋아하는 스님은 진정한 불교 언론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는 그렇게 지내다 총무원을 나와 독서와 저작에 몰두했다.
선우도량 도법 스님과 지선스님 등으로부터 여러 가지 조언을 청했고,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우리네 삶이 다 그러하듯 어디 마음대로 뜻대로 되기가 그리 쉬운가.
한참동안 그는 헤매다 평소 그가 늘 생각해 왔고 소망하던 글쓰기에 전념하며 평온을 되찾았다.
성남에 있는 봉국사에 머물며 그는 지친 심신을 추스르고 그간의 일들을 되돌아보는 그 나름의 전기를 마련했다. 집필은 또 다른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허나 그는 그 여러 가지 힘든 역경을 이겨내면서 스스로를 키워나갔다.
<힘든 세상, 도나 닦지>이런 제목으로 펼쳐낸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부끄러워했다. 그가 얼마나 자기 자신의 행로(行路)를 아프게 걸어왔고, 또한 지금도 걸어가고 있는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새벽의 산중. 물안개가 조금씩 피어 올라오는 산중에 앉아 효림 스님의 책을 읽으면서 무안한 감회에 젖는다.
사람은 늘 오고 가지만, 시절도 무상하여 그렇게 오고 가지만, 한 사람의 생애는 그의 모든 행로로 판가름나게 마련이다.
효림 스님, 그의 순수 무구한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지는 이 추운 겨울밤에 감히 붓을 들어 이런 이야기를 펼친다.
그를 본 지 한참 지난 어느 때. 나는 그가 파주에 있는 보광사 주지를 맡아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또 다른 여러 책을 펴낸 걸로 알고 있다. 스님에게 있어 이제 집필과 저작은 하나의 숙명처럼 그의 곁에 자리 잡은 듯 하다.
효림 스님은 1968년에 인천 보각사에서 소천 스님을 은사로 하여 사미계를 수지했다. 이후 봉암사 선원과 해인사, 송광사 등에서 안거하며 두루 납자들과 교류했다. 그런 그가 나서길 꺼려하는 총무원의 그 어려운 역할을 어찌하여 자임하고 나섰을까? 그것은 우직한 그 나름의 소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요즘 도반들과 실천불교전국승가회를 재편하여 ‘사단법인 실천불교’를 새롭게 창립했다. 지선 스님을 대표로 하여 새롭게 태어난 실천불교는 앞으로의 우리 종단을 여러모로 신선하게 살펴나갈 것이다. 효림 스님도 이사를 맡아 실무적인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의 우직함과 당당함이 소신껏 펼쳐지길 기대한다.
한편 청화 스님은 <실천불교>지에 축시를 보내 모두를 격려했다.
첫눈이 내리는 밤에는
바람이 없는 바다다.
…
캄캄한 밤바다
멀리 누군지 잠 안자고
불 밝히는 섬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