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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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으로 찾지 말고 꼭 안으로만 찾아라!
조상을 위하는 게 결국 자기를 위하는 겁니다


마음을 찾으라고 하는 이유


스님께서는 국내 및 국외에 지원을 여러 군데 설립한 이유가 무엇이며, 법문하실 때마다 항상 주인공을 믿으라 하고, 마음을 찾으라고 왜 그렇게 강조하시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각 처에 손닿는 데마다 지원을 내는 것은, 그 지역에 역사적 사건으로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 문을 열어 주어 한마음으로 귀정 짓게 하고 산 사람도 역시 그렇게 하려는 겁니다.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다 함께 한마음으로 지구를 보존해야 우리가 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항상 진실한 실천이 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맹세코, 실천하지 못한다면 도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예언자들이 물컵이 쓰러질 것이다, 물이 다 쏟아지면 죽는다고 이렇게 예언은 하지만 그걸 안 쓰러지게 해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멀고 가까움이 없이, 전 세계의 모든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고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 주고, 그렇게 해서 모두 한마음으로 이어져서 일꾼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바깥으로 찾지 말고 꼭 안으로 찾으라고, 일거수일투족 주인공이 하고 있다고 항상 말해 왔습니다. 이 언덕 저 언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이 아니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정신계와 물질계, 육신과 정신이 어디 따로따로 놉니까? 그런데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을 빨리빨리 넘어서라고 합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언덕은 물질계고 저 언덕은 정신계인데, 만약에 정신계에 도달하게 되면 물질계와 정신계가 둘 아닌 도리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깨달아서 저 언덕을 넘어서라고 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주인공을 찾다 보면 거기에 모든 것이 통신이 됩니다. 그러나 물질계로만 들어간다면 통신이 되질 않아서 한마음이 될 수가 없으니까 공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 몸 한 개체도 한마음으로 구성돼서 전부 따라 준다면 공덕이 되고, 개개인으로 논다면 그건 공덕이 될 수가 없죠. 한 회사에 모든 직원들이 한마음으로 구성돼서 운영해 나간다면 한 구성체지만 제가끔 논다면 한 구성체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마음을 합쳐서 일체가 다 한마음으로 구성돼서 일체제불과 더불어 같이 이 지구의 모습을 지속되게 하는 도량이 있어야 된단 얘깁니다. 그건 왜냐하면 운기라고 할까, 그런 따뜻한 공기가 압축을 시키기 때문에 우리 공기막은 터지게 돼 있습니다. 그 얘기는 안 해도 되지만, 여러분이 왜 그렇게 저 스님이 저러는지 그것쯤은 조금 알고 가셔야 될 것 같아서 말을 합니다. 그게 터지면 만년설이나, 남극과 북극, 여름이나 겨울이나 녹지 않는 얼음이 녹게 됩니다, 모두가 달라지고. 그게 터지게 되면 어떤 변화가 오느냐? 땅덩어리가 산산조각이 나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개미처럼 어디 물 없는 데로 기어올라가야 할까요, 어떡할까요? 그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그것을 아마 이름해서 천지개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그런데 마음공부를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전자에는 물에 죽고, 불에 죽고, 종교 싸움에 죽고 이렇게 역사가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좀 다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달렸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지금 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건성 다니며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더불어 같이 둘이 아닌 내 생명, 내 모습이 산산조각이 나는 겁니다.
오는 사람 하나하나 건지는 것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람도 몸 하나를 건져야 그 몸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이 다 살 수 있는 거지 몸 하나 건지지 못하면 속에 들어 있는 생명들은 다 죽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러한 마음공부를 해야만이 오고 가면서도 영령들에게 모두 문을 열어 줄 수 있는 겁니다. 그 죽은 영령들은 누가 자기를 이익하게 할 수 있는지 그걸 알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찾아온다 그래서 발로 걸어서 찾아오는 것은 아니죠. 빛보다 더 빠르니까요.
그래서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귀중하고 그렇게 광대무변하고 묘하니까 여러분이 오직 한마음에…. 한마음에서 검부락지 하나를 일으켜 세운다 하더라도 지구를 들 수 있는 그런 태세라야만이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이날까지 여러분한테 간곡히 이렇게 공부하라고 얘기해 왔던 겁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열심히 마음공부하시고, 일체 모든 일들을 자기 주인공에 내려놓으면서 열심히 관하시기 바랍니다.


재사 지내는 도리에 대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근간이자 한국 정신문화의 지주인 제사 의식이 번거롭고 바쁘다는 이유로, 더욱이 기독교 문화에 밀려서 저 멀리 사라져 가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의 뿌리를 놓치지 않고 살려 낼 수 있는지요? 그리고 지금 시대에 맞추어 재사 지내는 도리에 대해서도 가르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여러분에게 재사 지내는 법을 간편하게 일러 드렸고, 영탑을 만들어서 모든 조상님들을 한 곳에 모시게 한 것도 그런 뜻이 있습니다. 지금 자라나는 자손들일수록 앞으로는 더할 겁니다. 지금도 산소를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찾아가 볼까 말까 하는 집들이 많은데 앞으로는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탑 하나만 찾아오면 조상님들을 다 뵈올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까? 한국의 땅덩어리가 작아서, 이제는 산소 자리를 세를 주고 얻어 놨다가도 돈을 못 내면 다 뺏기게 돼 있고, 내 땅을 사서 해도 앞으로는 땅덩어리가 부족해서 점점 모시기가 어렵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화장을 해서 그냥 보내기도 하지만 죽은 사람 집을 사기 위해서 돈을 써야 하고, 우리가 좀 더 은혜를 갚는 마음을 가지려면 탑에라도 모셔 놓으면, 그저 일 년에 두 번이고 서너 번이고 그래도 절에 가는 참에 뵙고 올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탑 하나만 해 놓는다면 누가 돌아가셔도 묘지 때문에 애를 쓰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
제사를 지내도 지금처럼 음식을 차려 놓고 해야 한다면, 맏이일 경우에는 한 해에 일곱, 여덟 번씩은 지내야 되는 집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같이 부부가 노력 안 하면 못 사는 세상에 그렇게 여러 번 지내면서 예전처럼 그렇게 차려 놓고 지낼 수 있느냔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또 음식을 차리면서도 형제들끼리 네가 더 냈느니 내가 더 냈느니 이렇게 마음의 알력이 생겨서 싸움들을 하기도 하면서 이렇게 피곤한데 제사를 어떻게 지내? 이러면 그런 마음들이 결국은 조상님들에게 누가 되는 거죠. 제사는 지내지만 전부 불효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마음은 지극하게 하면서 의미를 가지는 몇 가지로 간편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지낸다면 그런 재사는 남자들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떡 세 덩어리 사 가지고 오면 될 거고, 정히 여자가 못 할 때에는 남자가 케이크라도 하나 맞춰서 사 가지고 오면 되는 거고 말입니다. 그리고 과일 세 가지, 초, 향, 물 이렇게 해서 마음을 편안하고 정성껏 지내야지, 음식은 많이 차려 놓고 서로 불편한 마음으로 자손들이 싸워 보세요. 부모가 그 음식을 먹겠나. 예를 들어 말하는 겁니다.
그런 거와 같이 누구나가 다 어려서는 자식이 되고 커서는 며느리 되고 사위가 되고, 그러다가 또 부모가 됩니다.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육신이 태어나는 것은 내 자성의 뿌리가 형성을 시켜서 이렇게 사람이 됐는데, 내가 마음이 탄생을 하려면 나온 자리에 다시 들어가서, 자아궁(自我宮)이라는 얘깁니다. 어떻게 잘못 듣지 마시구요. 나의 궁이라는 말입니다. 이 몸뚱이도 알고 보면 나의 궁이라는 얘기죠. 나의 집 말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어느 조사님이 하신 말씀이 “야, 이놈아! 너 아직도 덜 떨어졌구나. 너의 어머니 자궁 속에 다시 한 번 들어갔다가 배워 가지고 다시 나오너라.” 이랬답니다. 그런데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들으면 안 되죠. 그래서 사람은 육신이 태어났다고 해서 육신이 깨닫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려면 텔레비전 몸체가 있어야 되듯이, 우리도 몸뚱이가 있어야 부처가 있든지 뭐가 있든지, 깨닫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 육신이 태어났으면 다시금 정신이 태어나기 위해서 자아궁 속으로 다시 한 번 들어갔다 나오너라. 또 네 몸뚱이 속으로 다시 한 번 들어갔다 나오너라.’ 이러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을 넓게 하고 주인공에 일임하면서 다시 입력을 해서 앞서의 입력된 것들은 폐지시키면서 이렇게 들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다가 우리가 듣고 보지도 못했으면 중용을 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나 들었던 거라면 살아가는 중에는 생각이 안 나다가도 그와 비슷한 환경이 딱 닥치면 생각이 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그냥 밀고 나가라고 했다는 이런 생각이 딱 나면 그냥 밀고 나가는 거죠, 뭐. 그래서 체험을 얻고 발전을 하고, 그래서 언덕을 넘어설 수가 있다는 얘기죠.
누구든지 가만히 보면요, 자기 좁은 몸뚱이 하나도 돌아다볼 줄 모르고 그저 앞만 향한 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면서 벌어진 것에만 끄달려서 허덕이고 다니거든요. 그러니 침착하게 고개를 숙여서 심안을 봐라, 심안! 각자 심안을 견고하게 보면서 뚜벅뚜벅 걸어라 이겁니다. 비가 쏟아져도 종종걸음으로 걷지 말고 뚜벅 뚜벅! 그러는 사람이라면 한 걸음에 천 리를 뛴다고 했습니다.

행사에 계속 참여해야 하는지요?


저희 집안 대대로 불교를 믿고는 있지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건 다름이 아니고, 천도재를 올렸는데도 촛불재니 또는 조상을 위한 백종 같은 이러한 행사에 계속 참여해야 하는지, 그래야 한다면 참여해야 하는 그 의미는 무엇인지 그것이 의문이 생깁니다.

왜 밥을 먹고 또 밥을 먹습니까? 아침 먹었으면 됐지 점심 저녁까지 먹고, 그 이튿날은 또 왜 먹습니까? 아침 쇳송에 부모의 은혜를 갚고, 국왕의 은혜를 갚고, 만물의 은혜를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듯이 낳아서 길러서 이렇게 성장시켜 놓은 부모입니다. 그러면은 그 부모가 낳아서 기르느라고 이 도리를 잘 배우지도 못한 채 그냥 허덕지덕 허덕지덕 하다가 돌아가셨다 이겁니다.
그러면 천도를 시킨다는 것은 조상들이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무죄 석방이 되게끔 하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개와 같은 성품으로 살았으면 개로 태어나고 독사같이 살았으면 독사로 태어날 텐데 그것을 무마시켜서 다시금 인도환생하라고 천도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뒤에는 또 뭐가 따르느냐? 인간으로 태어나서 마음 도리를 공부하면서 부처님과 한자리를 하게 해 드리기 위한, 그 은혜를 갚고 묵은 빚을 갚는 그런 것이 즉, 재(齋)라고 봅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 어린애를 낳아 놓기만 하면 다 사회인이 됩니까? 길러서 가르치고, 가르쳐서 다 정상으로 만들어 놔야만이 그때 어른입니다. 그럴 때까지는 해야죠. 그러다 보면 끝인가요? 그러곤 또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했던 것이 또 부모가 돼서 끝이 나고, 자식들이 또 그렇게 해야 하고 이렇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름해서 효도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면 예를 들어서 증조부 증조모, 할머니 할아버지, 윗대 조상들을 우리 아버지가 천도를 시켰다면 천도된 분들은 그만둬야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하지만, 이 세상에 다시 나와서 깨우쳐서 부처님 한자리를 했다 할지라도 천도가 되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는 시기가 있고, 위에 올라가 앉아서 ‘아! 저놈은 참 착하구나.’ 하고 내려다보는 시기가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내 부모만 부모입니까? 정말 부처님 자리 한자리를 했다 할 때는 그렇게 공을 들이고 촛불재를 하고, 백종을 지내고, 사월초파일에도 등을 달고 다 이렇게 조상들을 위하는 게 결국은 자기를 위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높은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높은 자리에 가면 하나로 돌아가니까, 전부 일체제불과 더불어 일체 중생이 하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네 자식 내 자식 따질 수가 없고, 네 부모 내 부모 따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 있다면…, 지금 검사 판사가 됐다고 해서 내 자식이 나쁜 짓을 해도 그냥 무죄로 해 주고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듯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기가 있고, 아래서 허덕거리고 올라가려고 애를 쓰는 시기가 있다 그럴 때, 우리가 천도재를 하는 것은 부모님들이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지 말고 인도환생하여 태어나게 해 주시라고 하는 겁니다. 또 부모가 인도환생이 된 후에도 부처님 가르침을 알아서 정말 한자리 하도록 원하는 그 자식들의 은혜를 갚는 마음이 아주 끝간 데 없이 계속돼야 됩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밥 한 번 먹고는 어떻게 밥을 또 안 먹습니까? 지속적으로 살아야 하고, 지속적으로 배워야 하고, 지속적으로 그 뜻을 알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입력이 잘 지워지지 않아…


스님께서는 늘 되입력 하는 도리를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만 먼저 입력된 것이 잘 지워지지 않는 경우는 그것이 습이 워낙 중한 까닭인지요, 아니면 되입력 하는 마음의 힘이 약한 때문인지요? 놓고 또 놓는다고 하면서도 되나오는 것을 보게 되면 괴롭습니다.

그건 입력이 제대로 안됐기 때문에 되나오는 것이죠. 그것이 말입니다, 자기한테 자기가 자꾸 따지는 버릇을 갖는다면 습입니다. 자기한테만 따지는 게 아니라 상대방한테도 일일이 따지죠. 그게 왜냐하면요,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몸속에 자기가 다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과거는 없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몸속에 전부 들어 있습니다. 거기서 솔솔 나옵니다. 이때 한 거는 이때 나오고 저때 한 거는 저때 나오고, 그냥 입력된 대로 순서대로 착착 나옵니다. 착착 나오는데 그 나오는 의식들이 수가 없습니다. 그 의식들이 입력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자꾸자꾸 거기서 나오는 대로 나오는 그것만 알지 업식 때문에 그것이 잘되고 잘못되는 거를 모르는 중생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오는 대로 거기서 나온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 어느 수좌가 동짓날 팥죽을 큰 솥에다 쑤는데 팥죽이 부글부글 끓어서 팥죽 방울이 수없이 나오거든요. 수없이 나오니까 퍼뜩 그 생각을 한 겁니다. ‘아, 우리 속에 있는 팥죽 방울이 이렇게 나오는구나. 그러니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되겠구나. 방울이 따로따로 있는 줄 알고 했는데 한 팥죽 솥에서 나오는구나!’ 하고요. 한 팥죽 솥에서 방울이 나오는 거지 팥죽 솥이 따로 있어서 방울이 나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 자기 법이란 얘기죠. 법신! 요것도 법신! 요것도 법신! 하고는 주걱으로 때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부가 스스로 익는다면 벌써 팥죽은 다 익었으니까 열기가 더 오르지도 않고 더 내리지도 않고 아주 평상시처럼 따뜻하게만 하고 가거든요. 그러니까 팥죽 방울이 올라오지 않죠. 모두가 하나가 돼 버렸으니까 그냥 모두가 팥죽이 돼 버렸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듯이 어떠한 화가 올라오든지, 또 자기에게 누가 되게끔 생각이 나오든지, 또 집안 식구들한테 짜증이 나든지, 자식이 잘못해서 속이 상하든지 모든 것을 거기다가 그냥…, 자식의 일이든지 뭐든지 다 거기다가 맡겨 놓으셔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오는 걸 거기다가 맡겨 놓을 때, ‘동시에 이렇게 나오는 거라면 돌아서 잘 나오게도 할 수 있잖아!’ 하는 생각이 아주 필연적으로 따라다니지 않습니까? ‘안되는 일도 거기서 나오는 거라면, 되게 할 수 있는 일도 거기서 나올 수 있잖아?’ 하고 돌려놓는 겁니다.
속에서 불이 일어나게끔 나올 때도 불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도, 이럴 때는 아주 선선하게 마음이 곧바로 화해 가지고는 아주 좋게 나옵니다. 즐겁게 나옵니다. 그렇게만 하신다면 모든 게 더함도 덜함도 없는 잘 익은 팥죽이 돼서 맛있게 맛을 볼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하려면…


스님께서는 한생각에 이 우주천하를 집어먹고 토해낼 수 있어야 나뿐만 아니라 내 가정과 사회를 건져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저의 생각으로는 저의 마음과 둘 아니게 통신이 돼야 상대에게도 통신이 오고 갈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하고 통신을 하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요?


우리는 지금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어항 속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공기주머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야만 하니까 우리가 이 도리를 알고 배우고 증득해서 그 어항 속을 벗어나야만이 자유롭게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지금 세상에는 텔레비전도 보고, 듣는 것도 많고 보는 것도 많아서 모두 너무 아는 게 많기 때문에 이 공부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봅니다. 좀 모르는 듯 하고 어리석은 듯 해야, 옛날에는 선지식들께서 화두를 주면 그냥 무지막지하게 밀고 넘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화두선이 그렇게 빛을 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해도 내가 아는 게 많기 때문에, 얼른 쉽게 말해서 물질로 치닫는가 하면 형상으로 치닫고, 형상으로 치닫는가 하면 모든 점에서 정신세계는 무시하고 돌아가는 경향이 많다 이겁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디 그렇습니까? 만물만생은 다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을 하고 또 우리 인간은 말과 말로 전달을 하면서, 그것도 모자라서 통신으로 전달을 하면서 살아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되는 도리를 여러분이 하나도 몰라요. 그저 조급하게 불끈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해치워 버리고 그냥 말해 버리는 경향이 많이 있거든요. 자기를 자기가 구워 먹고 삶아 먹는 경향이 그런 데서 벌어진다고 봅니다. 우리가 하나도 걸림이 없이, 돌 위에 세워 놔도 살 수 있는 법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긁어서 고(苦)를 만들고, 자기가 긁어서 애고를 만들고, 자기가 긁어서 모든 병고를 만들고 이럽니다. 그러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합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사대(四大) 육신은 지수화풍으로 한데 합해져서 이 세상에 나왔는데 지수화풍으로 뭉쳐졌기 때문에 지수화풍을 먹고 지수화풍을 또 내놓습니다. 먹는 대로 내놓습니다. 그럼 내놓는 것 가지고 어떻게 활용이 되느냐? 바로 증발이 되고 모두 화(化)해서 일체 만물만생에게 도로 전달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전달한 까닭에 다시 또 먹습니다. 그러니 내놓으면 먹게 되고 먹게 되면 내놓고 이러는 작업이 계속되죠. 이 도리를 우리가 상세히 알아야합니다. 과거에 살던 것, 미래로 인해서 오늘 현실에 오는 것, 이 전체를 삼라만상이라고 합니다. 삼세(三世)라고 그러죠. 또 삼심(三心)이라고 그럽니다. 이렇게 굴러 오면서 교차하면서 살아나온 자기의 인과 업이, 선하게 행을 했다면 선행의 업이 있을 거고 악하게 행을 했다면 악행의 업으로서 진행되는 것이 여러분 몸속에 다 있다는 얘깁니다. 그것들로 구성돼 있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여러분한테, 그 구성원들을 교화를 시키는 데 여러분 마음의 채찍이 필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위로는 일체제불과 둘 아닌 마음을 지니고서 자기 주인공을 진실히 믿고, 아래로는 그 믿는 마음으로써 채찍질을 한다면 아래 내 몸속의 중생들은 스스로 제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말도 그런 뜻에서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도 있죠. 정(定)에 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뜻이 뭐냐? 그냥 정에 들려 하면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고 해서 정에 드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닙니다. 양면을 다 작용하면서, 우리가 지금 내면에다 놓고 들어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 정에 드는 방법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전달돼서 작용하는 그 묘법과, 묘용, 광대무변한 법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빛으로 화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리를 전 세계에서 알면 좋겠는데 가만히 보면 전부 타의에다가 기도하고 상대에다가 빌고 잘되게 해 달라고 하지, 자생을 제도하면서 자기를 자기가 채찍질하면서 자기 완성을 하려고 작업을 하는 사람은 아주 적어요. 한다고 해도 그렇게 직접적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방법을 취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 마음 자체가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부처가 되느냐 중생으로 그냥 남느냐 결정이 됩니다. 여러분이 내 마음을 깨닫는다고 합시다. 그거를 돈오(頓悟)라고 한다면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자생중생들을 제도해야 하기 때문에 점수(漸修)가 또 들어갑니다. 나를 깨우치는 거는 쉬워도 둘 아닌 도리와 둘 아니게 나투는 도리를 포착하려면 그만큼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겁니다. 그건 왜냐하면 자생중생들은 내가 바깥으로 끄달리게 되면 제도할 수 없습니다. 안으로 놓고 들어가야 통신이 돼서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돼서 따라가서 제도가 되는데, 바깥으로 끄달리면 절대로 통신이 되질 않아서 제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안에서 제도가 못 되는데 어찌 내가 제도가 되겠습니까? 상대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대로만 해결하려고 한다면 서로 마음으로 통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 통신을 해야 서로 둘 아니게 한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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