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과 해일로 수십만명이 쓸려 나간 그 아수라장의 바다를 황황히 뒤지다 지친 50대 여인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여기 더 계셔도 찾을 희망이 없을 것 같은데요.”
이 물음에 그 여인의 단호한 말이 카메라 곁으로 흘러나왔습니다. “생때같은 자식을 죽여 놓고, 시신도 못 찾고 내가 어떻게 돌아가요?” 저는 그 ‘죽여 놓고’라는 말에 더 큰 슬픔과 막막함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 놀란 분도 많았을 것입니다.
자식을 삼킨 것은 지진과 해일인데, 그 어머니는 왜 ‘자신이 죽였다’면서 가슴을 후벼 파고 있는 것일까요.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한국인 여성이 살인죄로 기소되었습니다. 사정인즉, 미군 지아이(G.I.)와 이혼한 이 여성은, 보모를 구할 형편이 못되어서, 아이를 집 안에 혼자 두고 직장에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집에 불이 났고, 아이는 잠긴 문을 열지 못해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 여성은 불난 집 앞에서 망연자실, “내가 애를 죽였다!”면서 꺽꺽 울었는데, 이 말을 들은 미국 경찰이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그 여성을 ‘살인죄’로 기소했던 것입니다. 한국인 변호사들은 미국과 한국 사이의 문화적 차이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한국인들은 사태를 ‘연기적(緣起的)’으로 이해합니다. 즉 하나의 사태가 일어난 원인을 단 ‘하나’에 돌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과연 어떤 일의 ‘원인’을 주체적 행위자 당사자에게만 귀속시킬 수 있을까요. 사건이나 사태에 대한 원인과 조건들은 무수하고 다양하며, 그리고 그 원인과 조건은 직접적이고 인접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고, 겉으로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간접적이고 격리된 것들까지 사슬로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곧, 하나의 사태에 우주의 전 요소들이 간여하고 있다는 화엄(華嚴)의 근본 이치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 전체적 연관 속에서 모든 ‘부분’들은 자기도 알 수 없는 일에 연루되어 있고, 침투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소식입니다. “하나(一)는 전체(多)에 연루되어 있고, 전체는 하나 속에 침투하고 있다.”
이 총체성 속에서 ‘나’는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유기적으로 간여되어 있고, 그런 점에서 일정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인드라망(Indra 網)의 발상에 생래적으로 젖어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지진과 해일이 자식을 죽여도 그 책임은 내게 있고, 불이 나서 아이가 죽어도 그 책임은 결국 내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바닷가의 어머니는 생각합니다. “내가 그날 결혼을 시키지 않고, 신혼여행을 그쪽으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아이는 죽지 않았을 것을….” 아이를 방에 두고 문을 잠근 어머니 또한 과실과 의도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 사태의 구성에 있어 자신의 행동이 수많은 인연 가운데 결정적 하나로 기여했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어디 그 분들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부임한 날 터진 비리에 대해서도 신임 장관은 땀을 흘리며 변명을 해야 하고, 이름도 모르는 말단 사병의 탈영에도 사단장이 책임을 지고 옷을 벗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대통령은 이 나라의 번영과 안정에 ‘총체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연기(緣起)의 사고입니다.
그 이치를 모르고, 대통령이 “그걸 왜 내가 전부 책임져야 돼?”할 때는 모두의 억장이 턱 막힙니다. 억울하기도 하겠지요. 경제난이나 비리, 쌓인 국가적 아젠다 등은 취임 이전에 만들어진 공업(共業)의 결과물이고, 그걸 대통령이 혼자 감당하거나, 하루아침에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인데, 왜들 자신만 들볶느냐고 하소연하겠지만, 그러나 지도자가 ‘가슴 속에서’ 그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고 느끼고, 그 진정이 전달될 때, 사람들은 ‘희망’의 불씨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 ‘하나 된 마음’이 모든 것을 기적처럼 한꺼번에 바꿉니다.
인과율적 사고와 연기법적 사고
동양인들은 대체로 사태를 이렇게 유기적이고 전체적으로, 즉 ‘인연법적으로’ 사고합니다. 이는 서양인들이 사태를 인과율적(causalistic)으로 생각하는 것과 극히 대조적입니다.
인과율적 사고란 하나의 단일하고 주요한 ‘원인’이 있어, 이 원인이 특정한, 거역할 수 없는 결과를, 필연적으로, 산출한다고 믿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 발상에서 서양인들은 주체적 의지를 갖는 자유로운 ‘개인’을 중심에 두는데 비해, 동양인들은 그보다는 하나의 사태에 작용하는 다양한 요소들, 즉 동시구기(同時俱起)의 상황과 계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기 자아 혹은 의지는 그런 다양한 계기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래서 서양철학의 오래된 주제인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논란이 동양에서는 심각한 문젯거리로 등장할 수 없었습니다. 불교식으로 하자면, 자유의지는 천둥소리에 화들짝 놀라 핀 노란 국화
인간의 의지를 지나치게 뻥튀기한 상견(常見)이고, 결정론은 인간의 발심과 역할을 하찮게 여긴 단견(斷見)에 해당할 것입니다.
동서양의 이 구분이 너무 단순한 일반화가 아니냐고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최근 리처드 니스벳이 쓴 <생각의 지도>는 이 구분이 유의미하고 실증적이라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미국 대학의 어느 공학도가 기대한 성적을 받지 못해 장학금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교수에게 항의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바탕 총기 난동을 부리고 자신도 자살하고 만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신문들은 이 사태의 ‘원인’으로 그 학생의 성격이나 자아에 초점을 맞추는데 비해, 같은 사건을 중국의 신문에서는 그를 그 지경으로 몰고 간 상황적 요소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중국 신문은 한두 가지 ‘인연(因緣)’만 바뀌었더라면 그 안타까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쓰고 있었는데 비해, 미국의 신문들은 한두 가지 계기가 달라졌더라도 그 중국계 학생의 ‘성격’은 결국 총기 사건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불황에 오히려 늘어난 기부금
인연법적 사고는 죄의 책임을 당사자에게만 전적으로 덮씌우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죄를 지은 자에게는 관용과 연민을 내보이고, 또 한편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둘러 선 구경꾼들에게는 “네게 죄가 없다 하느냐”고 아프게 묻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세상의 악과 죄에 대한 본능적 부채의식이 있습니다. 세상이 어려워지자 자선냄비와 기부금은 30% 이상이 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상대적으로 안전한데 대한 미안함에다, 자신의 부와 자산이 ‘자기능력’ 플러스, 수많은 인연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인지한 결과가 아닐까요.
■한국정신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