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가 알고 접하고 있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는 부처님 당시 두 사람의 본래색깔이라기 보다는 후대 선종이라는 가치관이 알게 모르게 투영된 모습이라 할 것이다.
초창기 교종의 득세 속에서 선종은 율종사찰에 당우 한 칸을 얻어 더부살이를 하는 처지였지만 수행에만 전념했다. 두타행을 자청하고 고행에 익숙한 그들의 눈에 교가(敎家)란 부처님 말씀을 앵무새마냥 외우는 그런 부류로 비쳐졌을 것이다. 마음의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똥닦개 같은 대장경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눈 어두운 무리들로 치부했다. 이런 저변의 기류는 나중에 가섭존자가 주관하는 결집에 아난존자는 부처님말씀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그래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집장소 대문 밖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감수해야만 했다.
가섭존자는 두타행자로서 가장 선종적인 이상적 인간상에 근접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삼처전심의 주인공이다. 부처님께서 꽃을 드시니 가섭만이 웃었다는 그 유명한 ‘염화미소’를 비롯해 늦게 온 가섭존자를 위해 부처님께서 당신의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주었다는 ‘다자탑전 반분좌’와 열반하신 부처님께서 늦게 도착한 가섭을 위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이셨다는 ‘곽시쌍부’를 통해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바로 전수받은 선종 2대 조사의 모습으로 정착시켰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가의 대표적 인물인 아난까지도 가섭에게 “세존께서 금란가사를 전해주신 이외에 무슨 법을 전해 주셨습니까?(선문염송 81칙)”라고 되묻는 것으로 ‘선종적 매듭’을 짓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부처님의 말씀도 ‘선어록’의 범주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을 병행했다. 최초의 선종전등역사서라고 알려져 있는 <보림전>에는 〈사십이장경>의 전문(全文)이 실려있다. 경전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것이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전문을 최초의 선종사서에다가 일부러 싣고있는 것은 무언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중국인들에게 최초로 전해진 경전이 〈사십이장경>이었다. 그래서 <보림전>이 편찬될 무렵 이 책은 이미 중국인에게 불교개론서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대중화되어갔다. 선가에서는 이를 선종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보림전>이라는 전등사서 속에 편입시켰다. 이는 〈사십이장경>을 선종의 초조인 ‘부처님 어록’이라는 지위와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우리들이야말로 부처님의 마음에 가장 부합된 수행자라는 사실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선가의 사상적 수행적 우월감과 자신감의 반영이라 하겠다. 이렇게 하여 〈보림전본 사십이장경〉을 ‘최초어록’으로 규정했다. 이는 뒷날 깨침의 언어인 선어록을 경전과 동등한 위치를 부여하기 위한 기반마련이 그 목적이다. 그리하여 〈사십이장경〉〈유교경(遺敎經)〉과 함께 위산선사의 어록〈위산경책( 山警策)〉까지 합하여 ‘불조삼경(佛祖三經)’ 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선종의 필독서로 권장되면서 어록과 경전을 같은 무게로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역사란 근본적으로 현재의 역사가 될 수 밖에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선종이 중국의 불교계 뿐만 아니라 사상계를 완전히 평정하면서 기존의 종파불교까지 완전히 흡수·소화시킨 새로운 수행불교의 완성을 의미한다. 즉 불교의 역사 역시 선가의 관점에서 다시 선종사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각 역시 당송(唐宋)시대의 선종전성기의 관점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