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나이가 먹는 것,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대해서 다른 감회를 느낄 것이다. 불교의 시간관은 인도의 전통적인 시간관인 순환적인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진행적인 시간관에 비해서 순환적인 시간관은 원과 같이 시작과 끝이 따로 없이 돌고 돈다는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
어느 시간관이 더 옳은가를 알기는 참으로 힘들다. 현대 물리학은 우주에 관한 한은 진행적인 시간관에 손을 들어주는 것과 같이 보인다. 즉, 우주가 매우 짧은 시간에서 생겨났으며, 이때부터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작점이 있어서 이를 기점으로 우주가 팽창한다는 모델이 멀리 있는 별들일 수록 더욱 빠른 속도로 거리가 빨리 떨어진다는 관측과 일치하고 있다. 마치 풍선이 부풀어 질수록, 풍선의 그림들이 서로 빨리 멀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특이점, 즉 시간이 생기기 시작하기 전에 대해서는 함묵하고 있다.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고민을 하지 않아야 하는 항목 중에서 우주를 누가 어떻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든다. 이 가르침에는 많은 의미가 있으리라.
차라리 깨달음을 위한 노력을 하는 편이 낫다는 실용주의 측면이 있을 수도 있고, 깨닫고 나면 그러한 질문들이 자연히 해결된다는 진리에 대한 종교적인 측면이 있을 것이다. 어느 한 면을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 두 가지 면을 다 말씀하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험에 의거한 생각들이 얼마나 진리에서 먼가를 현대과학이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빛의 속도에 관한 것, 시간에 관한 것, 공간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경험과는 다르게, 빛의 속도는 관측자에 따라서 일정하다. 달리는 기차에서 보면, 옆에서 달리는 기차가 서 있는 듯이 보이지만 빛에 대해서는 이러한 경험이 통하지 않는다. 시간 역시 빨리 달리는 로켓에서는 더 천천히 흐른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칸트가 분류한 진리, 즉 우리의 경험과 관련이 없다는 순수 진리, 예를 들어 직선은 공간상의 가장 가까운 두 직선이라는 진리 역시 칸트의 머리에서 나온 한계가 있는 진리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공간 역시 중력에 따라서 휘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은 서양 문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학은 서양의 전통, 즉, 논리를 숭상하는 철학적 전통에서 생겼다. 철학(philosophy)이라는 단어자체가 앎에 대한 사랑을 나타나는 말이고, 이 앎이라는 자체가 철저한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러한 전통에서 수학이 생기고 경험적 관측을 수학화하고, 수학이 새로운 사실을 예측하도록 함으로써 위대한 과학과 철학의 전통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과 기술이 우주 존재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 인간의 안전과 예측 가능한 삶을 보장해 주는 단계를 뛰어 넘어서 진화의 법칙을 제어하고자 하는 생명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21세기를 지배하는 물질 문명의 새로운 논리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 및 철학이 미치는 영향이 왜소화하는 시대에 부처님과 성인들의 가르침이 전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빛을 주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빛이 현대 과학기술과 어떠한 관계에 있으며, 불자들뿐만이 아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박영준 교수는
현재 서울대학교 전기공학부 교수로 서울대 교수불자연합회 ‘불이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서울대에서 학사와 석사를, 미국 매사추세츠대학에서 전기공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서울대 나노응용시스템 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