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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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쉬었다 가는 이 교차로에서 너를 깨달아라
한 구멍에다 다 놓고 돌아가야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아니 간사하다기보다는 사람 사는 게 그런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새해를 맞이하면 새해를 맞이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마음이 출렁거리고 새로운 무엇을 찾아보려는 그런 마음, 아마 그것이 정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의 도리를 잘 알 수 있다면 경거망동을 하지 않고 모든 문제에 대해서 침착하게 질서와 도리를 지키면서 기꺼이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길을 택할 겁니다.
어떠한 회사든 사찰이든 또 가정이든 간에 모든 문제들을 가지고 살아나가는데 대해서, 예전에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한식구라면 한마음으로 단결해서 가정을 이끌어나가는 데에 운력하는 마음을 조금도 잃지 말아라. 그것이 그대로 여여함이니라.’ 라고 말입니다. 이거는 어디를 막론하고 해당되는 얘기지요.
그런데 몸을 버리자니 마음이 울고 마음을 버리자니 몸이 운다는 말이 있죠. 물질을, 즉 몸을 배척한다면 마음은 보이지 않고, 마음을 배척한다면 몸이 또 송장이 되니 보이지 않느니라. 그래서 마음과 몸은 동시에 작용과 운력을 통해서 질서를 지키고 화목을 지키고 또는 도의 의리를 지키면서, 모든 일에 대해 서로 돕고 아끼면서 살아나가는 그것이 선과 교가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넓고 지혜로우면 어리석은 짓을 안 할 것입니다. 권속이 백 명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요, 내 생명과 둘이 아니요, 내 모습과 둘이 아니기에 잘못하는 걸 봐도 전자에 잘못할 때 내 모습 같다고 생각한다면 역시 둘이 아니게 돌아가고, 자비를 베풀 수가 있고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낼 수가 있는 겁니다. 사실이 또 그러니깐요. 그대로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권속들이 좌선을 할 때면 같이 좌선을 하고 운력을 할 때는 같이 일을 해야 한다 이겁니다.
그건 왜냐하면 운력이라는 자체가 너 나가 없이 일이 닥치는 대로 몸을 움죽거림을 말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움죽거리는 거를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앉는 좌선만이 공부라고 생각한다면 좌선하는 사람은 방에 앉을 이유도 없고 먹을 이유도 없고 입을 이유도 없어요. 그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남이 만들어 놓은 옷 입고, 남이 농사지은 것으로 먹으면서 물질세계의 모든 움죽거림을 거부한다면, 죽은 도를 믿는 거나 같습니다. 그래서 상하 사방이 탁 터졌으니 거칠 게 없다는 말이 있는 거지요. 적으나 크나 짧으나 기나 일하는 거나 앉아있는 거나 서있는 거나 모든 게 걸림이 없음이고 통 속을 벗어나야 어리석음을 다 태워버리고 자유자재할 텐데도 불구하고 우정 앉아서 내가 마음공부를 꼭 해야지 하는 것도 물리가 터지질 않은 지혜롭지 못한 이치다 이런 겁니다. 또 생활 속에서는 도를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해도 어리석은 겁니다. 생활 떠나서는 불교가 없고 불교 떠나서는 생활이 없는 겁니다. 여러분이 여래요 여러분이 바로 부처인 것인데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다르게 행동한다면 부처가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어리석음을 떨쳐버리고 앉으나 서나 일을 하나 하지 않으나 참선이 아닌 게 없다고 생각할 때에, 몸과 마음을 둘이 아니게 침착하게 다스리면서 관하고 나가는 것이며 회향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회향 말입니다.
옛날에 백장 선사도 그랬듯이 하루 일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 했는데 그건 왜 그랬을까요? 미워서 그랬을까요? 정맥과 동맥은 동시에 움죽거려야 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느라고 그랬지요. 마음이 없으면 육신은 태어나지 않았을 거고 육신이 없어도 마음이 없을 것이니 마음과 육신은 항상 같이 동일하게 움죽거리는데 어찌 자기 몸을 버리겠다고 하느냐는 뜻이죠. 몸이 없으면 부닥침도 없고 보는 거 듣는 거 말하는 모든 것이 다 부닥침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거지요. 양면이 다 가지런히 동시에 움죽거리는 그 가운데서 내 마음이 선장이 되어 다스리는 것이 바로 안과 밖을 평등하게 다스리는 참(眞)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하는 것도 바로 그 자리에서 몸을 다스리는 거요, 가만히 앉았게 하는 것도 그 자리에서 다스리는 거요, 깨닫게 하는 것도 그 자리에서 하는 거요, 물리가 터지게 하는 것도 그 자리에서 하는 것이죠. 내면의 한 구멍에서 일체가 들고 나며 한 구멍에서만이 바다를 삼키고 토한다 이 소립니다. 딴 구멍은 없어요. 그래서 불교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너의 어머니 자궁 속에 한번 더 들어갔다 나와야 되겠구나 하시더랍니다. 몸은 탄생했으나 마음이 탄생을 못했으니 다시 한 번 들어갔다 나오라고 하는 어느 선사의 말이지요. 그랬듯이 우리가 단순하고 어리석어서 현실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면서 어설프게 나가는 그러한 행동과 마음이라면, 개선해야 할 점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앉으나 서나 일을 하나 하지 앉으나 이 바쁜 세상에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시공을 초월하여 고정됨이 없이 공해서 돌아가는데 어떻게 일하는 게 다르고 공부하는 게 다르겠습니까! 다르다면 생활 속에서 어떻게 공부를 하겠습니까. 한시도 쉴 사이 없이 식구들 먹여살리기 위해 사회에 나가서 벌이하는 등 이러고저러고 하다가 몇 시간 눈 붙이면 하루 24시간이 그냥 다 흘러가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무슨 공부가 따로 있겠습니까. 그것을 떠나서는 진리도 없는 것이고 참선도 없는 것이고, 부처도 없는 것이고 중생도 없는 것입니다.
육조 스님 당시에 토굴에 들어가서 모두들 공부한다고 벽을 쳐다보고 틀고 앉았는데, 육조 스님이 들여다보고 하는 소리가, 참선을 하려면 밥도 먹지 말고 오줌도 누지 말고 일어나지도 말고 옷도 입지 말고 남이 떠오는 물도 마시지 말아야겠구나. 일어나면 선이 끊어지고 오줌을 누다 보면 선이 끊어지고 옷을 입다 보면 선이 끊어지고 밥을 먹다 보면 선이 끊어지는데 어찌 그렇게 하겠느냐 했더랍니다. 생각들을 해보세요. 모두가 혼자 살 수 없는 사실을 말입니다. 농사를 짓고 산다 하더라도 혼자 살 수 없고, 회사를 경영한다 하더라도 혼자 살 수 없고, 또 사찰에서도 시주자들이 없다면 스님네들이 살 수 없으며 스님네가 없으면 시주자들이 믿고 배워 나가며 행을 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첨단을 넘을 수 가 없는 이치가 되니 서로서로 둘이 아니게 시공을 초월해서 고정됨이 없이 화해서 나투게 되는 것입니다. 찰나찰나 우리가 마음이 바꿔지면서 나투면서 응하면서 이렇게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몸속에 있는 자생중생들을 먼저 제도해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제도해라 하기 이전에, 즉 일체 사는 거, 움죽거리는 거 안 움죽거리는 거를 한 구멍에다 다 놓고 돌아간다면 앞서의 입력된 것이 없어지면서 새로운 입력이 들어가서 현실에 나오니, 그것이 얼마나 심성과학적이고도 천체물리학적이고 의학적입니까? 나중엔 철학적이기도 하고 천문학적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만 더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사회인들보다도 더 한층, 스님들은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생각지 않고 개선할 줄 모른다면 마음의 개발이 있을 수가 없고, 마음의 광력이라는 빛이 발현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어떻게 창조를 일으키며 노력 없이 어떻게 개발을 해서 앞장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처음에 내디딘 발자국이나 나중에 내딛는 발자국이 항시 똑같았습니다. 잘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서 진실한 내 마음, 그 진실한 마음으로 지혜롭고 포용력 있게 팔을 벌리고 다 집어먹어야 집어먹을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지요. 다 집어먹어보지 않는다면 다 집어먹을 게 없다는 걸 몰라요. 또 다 버려보지 못한다면 다 버릴 게 없다는 사실을 몰라요. 다 버려서 얻는다고 한다면 바로 다 삼키고 다 토해낼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한 사찰에서도 운력을 제대로 못하고 질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또 화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집어삼키고 토할 수 있겠느냐 이 소립니다. 안 그래요?
이 몸뚱이의 집은 못생겼든 잘생겼든 상관이 없이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다 집어넣어도 작지 않으니까 모습을 보고 못생기고 잘생긴 걸 평가를 한다면 아니 됩니다. 사람들의 몸은 작든 크든 간에 만 명이든 수십만 명이든 천만 명이든 헤아릴 수가 없이 나가서 활약을 하는데, 그 활약하는 모습이 응해 달라는 대로 모습을 화해서 나투고 그 나툼은 전부 다르니 어떤 거를 꼭 집어서 나다 이럴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 그렇게 나고 들며 함이 없이 여여하고 어떠한 모습을 집어서 나라고 할 수 없다 이거예요. 이 집은 일체제불의 마음이 들락날락해도 손색이 없는 집이요, 일체 중생이 다 들락거려도 손색이 없는 법이요, 둘이 아니게 다 들락거리고 하나로 몽땅 다 들어온다 해도 작지 않은 그릇입니다. 이 도리를 알려면 무조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닥치는 대로 집어삼켜야 되지 않을까요? 이거는 틀렸다고 안 하고 저건 하기 싫다고 안 하고 이거는 밉고 저건 곱다고 분별해서는 다 삼킬 수가 없어요. 부처님까지도 삼켜야 하는데 무슨 시간이 남아서 허방지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기는 시장에 가 물건을 사 와도 모든 스님네들이 다 나가서 운력으로 같이 해요. 나까지도 같이 운력으로, 아랫사람들이 애를 쓰는데 나도 해야지 하고, 또 아랫사람들은 스님이 저렇게 애쓰시는데 나도 해야지 하면서 운력을 하고 나간다구요. 현실로서 그렇게 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발전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생각을 하지 않으면 발전이 될 수가 없거든요. 우리가 생각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몸을 일으킬 수가 있으며, 또 거기에서 무엇을 하겠다고 생각을 안 한다면 무엇을 할 수가 있겠어요. 우리가 발전하지 못하고 또 창조력을 기르지도 못하고 불을 켜고 앞장설 수가 없거니와 목석과 같은 거겠죠. 오늘 살다가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지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쾌활하고 날로 발전하며 살다가 그냥 어느 순간에 내가 빠지면 이 옷만 남게 해야지요. 이렇게 살 수는 없을까요? 이 모든 것을 알고 보면 하루 한나절 울어도 시원치 않을 겁니다.
탤런트들이 왜 서슴지 않고 배역을 맡아가지고 연기하는 줄 아십니까? 탤런트들이 왜 거지 역 죽는 역 임금 역 머슴 역, 뭐 사기 치는 역 사기를 막는 역 등 그렇게 어려운 배역을 맡아가지고도 왜 좋다고 할까요? 배역을 맡지 못하면 안 되고 배역을 맡아야만 좋아할까요? 그건 드라마가 끝나면 다 버리고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에요. 그 배역에서 벗어나 제자리로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나온 자리를 알고 갈 자리를 안다면 걸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탤런트들이 어떻게 행하는지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탤런트들이 잠시잠깐 배역을 맡아서 대사를 외우고 연기를 하는데, 거지의 역을 맡았든지 임금의 역을 맡았든지 상관없이, 감독한테 뽑힌 게 좋아서 아주 쾌히 응하는 그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아마 내내 거지로 박혀서 살라고 한다면 전부 꽁무니를 빼고 안 하겠지요. 그러나 잠시잠깐이거든요. 잠시잠깐이니깐 돈도 벌고 이름을 가지고, 또 그렇게라도 나가지 않는다면 아주 끊어질까봐 그렇게 하는 거지요. 꼭 그 말대로는 아니지만 보통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활약을 하다가 모든 것을 다 끝내고 나면 속이 후련하게 술 한 잔을 마시든가 하면서 탁 털어버리고 원점으로 돌아왔다가 또 다시 배역을 맡으려고 하는 그 점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듣지 마시고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며, 어디로 가기 이전에 무엇을 하는가 하고 생각을 해보면 탤런트들이 배역을 맡는 것과 똑같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원점에서 와서 원점으로 가는구나.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또 다시 소임을 맡아 가지고 나온다는 사실을 안다면 지금 어떠한 소임을 맡았든지 겁이 나지를 않아요. 잠시잠깐이기 때문이죠. 우린 연기자들이 연기하는 것처럼 잠시잠깐 쉬었다 가는 길입니다. 부처님께서 쉬었다 가는 이 교차로에서 너를 깨달으라고 하신 겁니다. 만약에 그 이치를 모르고 원점으로 돌아간다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이죠.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또 다른 모습으로 형성이 되어 이 세상에 다시 나와서 또 괴로운 고비를 넘겨야 하니까요. 마음을 아주 팽팽하게 가지면서도 지혜롭고 폭이 넓게, 준 사이 없이 다 내주고 또 들여놓을 때는 들여놓는 사이 없이 다 들여라 이 소리입니다. 모두가 너그럽고 좀 더 지혜롭다면 포용력 있게 질서를 지키고 도의를 지키고 나와 네가 둘이 아니게 의리를 지킬 수 있겠지요. 또 과거나 현실이나 미래나 내가 수억겁 광년을 돌아올 때 무엇은 안 됐고 무엇은 어리석게 안 했겠는가 하고 한번 침착하게 생각해본다면 나 아님이 하나도 없어요. 미우나 고우나 말입니다. 잘못해도 불쌍하고, 비록 잘못한다 해도 그 사람이 잘못하는 게 아니라 모르고 산 것 때문에 그렇지요. 그러니 얼마나 눈물나는 얘깁니까? 얼마나 기가 막힌 얘깁니까! 강도질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기를 치는 사람들 가만히 보게 되면, 과거로부터 오는 것도 있지만 현실에 짊어진 가정환경으로부터 오는 걸 볼 때는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고 아픈지 여러분은 모를 겁니다. ‘저 사람 괜히 저러는 거 아냐?’ 할지 모르지만 괜히라는 건 있을 수가 없어요.
모두가 내 자식이 아님이 없고 내 부모 아님이 없어요. 공동묘지에 가니까 남녀노소가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늙었더라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요. 나는 그전부터 군더더기가 붙는 거는 싫어요. 그래서 말 잘하든 못하든 그저 실천하는, 참(眞)을 얘기할 뿐입니다. 남들이 듣기 좋게만 하는 사람은 못됩니다. 삶에 실천으로 옮길 수 있고 실천함으로써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분들이 되시기 바라면서 이런 얘기들을 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사람이 죽으면 묘지를 쓰고 제사를 지내고 또 이사를 갈 때는 손을 본다고 합니다만, 나쁘다고 하는데 이사를 가면 안 된다는 점과, 제사 지내고 묘지 쓰고 묘지를 파내는 것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모두 하나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아둬야 할 점이 있죠. 첫째, 묘지를 쓸 때엔 우리 자체가 바로 지수화풍인 까닭에 지신과도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땅을 관리하는 흙과 지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흙이 지신이라는 얘깁니다. 얼른 말해서 흙도 생명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 안 드세요? 흙에도 생명이 있다는 거 아시죠? 물도 생명이 있고 바람도 생명이 있고 불도 생명이 있어서 한데 모여 동참을 하니까 공기로서 인간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신도 나요 목신도 나요 그 영혼 자체도 둘이 아닌 것이요, 영혼과 영혼을 한 물에다 집어넣으면 한 그릇이지 두 그릇이 아닙니다. 영 해도 둘이 아니요 영, 영, 영 해도 둘이 아닌 것이죠. 이렇게 얘기해드리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아둬야 앞에 닥칠 때 방어를 할 수 있지 않겠나 해서 하는 얘깁니다. 이게 문제가 아주 큰 것 같아 새해를 맞이해서 한번 얘기해드리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묻을 때도 주인공에 ‘감사합니다!’ 하면서 마음으로 절을 하면 모두가 혼합이 돼서 전부 빈손이 돼 버려요. 그러면 산 사람들한테도 문제가 없게 되죠. 땅을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서 산소를 파낼 때도 흙이 지켜줬지 않습니까. 여직껏 지켜줬으니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흙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물 한 그릇에, 혹 어떤 사람은 떡 한 그릇을 해놓는 등 이것도 두 층 세 층이 있습니다. 이 도리를 완벽하게 아는 사람은 물 한 그릇을 떠놓지 않아도 바다를 갖다 놓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바다를 갖다 놓고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을 다 갖다 놓고 지내는 것이 되지요. 그런데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는 물, 향, 초를 준비하고 또는 땅의 고마움을 해결하고 땅을 파는 사람들을 위해서 막걸리 한 통에 안주라도 준비해 놓고 절을 올리면서 주인공에 모든 거를 맡겨 놓고 파내면 아무 지장이 없어요. 그런데 도리를 아주 모르는 그런 사람들은 스님한테 와서 “이렇게 이렇게 하겠으니 마음 좀 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자기가 거기에 일치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전부 따로 흩어지니까요. 그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만 모두들 보이지 않는다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걸 모르고도 당하고 알고도 당하는 사람들이 허다히 많습니다.
그리고 또 이사를 가는 얘깁니다. 어느 집이나 이사를 가는 데는 반드시, 우리들이 지금 공부하고 나가는 도리를 응용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저 관습 때문에 ‘이사를 가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부터 하는 겁니다. 자기가 공부하는 것은 둘째고, ‘이사를 가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부터 하는 겁니다. 그런 생각부터 앞서게 되지요. 그래서 여기 다니면서도 몰래 빠져나가 어디 가서 보기도 하고 그러죠. 뭐 토정비결을 안 보나 점을 안 치나 관상을 안 보나, 이래가지고야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겠습니까? 뛰어내리면 죽는다 하는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서 바로 성립이 되는 거지, 무난하게 가는 데서 성립이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 깨우침도 마찬가지예요. 아주 아슬아슬하게 뛰어넘을 수가 없을 그때에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고통스러워서 한 발짝도 떼놓을 수 없으리 만큼 격할 그때 요절이 나는 거지 이렇지도 않고 저렇지도 않은 데서 뭐가 요절이 납니까? 깨지든지 다른 큰 그릇으로 바뀌든지 해야 뭐가 되는 거지 그런 게 없는데 어떻게 돼요. 그러니까 딱따구리가 나무를 뚫듯이 그저 끊임없이 안으로 뚫으라는 거지요. 운력을 하고 싶지 않아도 ‘운력을 하게끔 주인공이 만들어 놨으니까 해야지’ 하고 오로지 뚫기 위해서 거기다 놓고 자꾸 뚫어라 이겁니다. 수억겁 광년을 거치면서 뚫어지지 않고 찔깃찔깃하게 겹겹이 붙어 있는 거를 뚫으려고 하는데 한꺼번에 뚫리겠습니까? 그러니까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거죠. 뚫는 거는 마음의 선장밖에 뚫을 수가 없어요.
이사를 갔는데 그 집이 묘지로 그냥 벽지 바르듯 했다고 해도 모든 것을 주인공에 합일시킬 수만 있다면, 진짜로 믿고 ‘모두가 둘이 아니기에 당신만이 이 터를 편안하게 할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가 놓고 맡기라는 거죠. 이것이 방편이자 진실이고 진실이자 해결책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손이 없는 날 가야 하느니 손이 있는 날 못 가느니 하면서, 사람이 살아나가는 데 다른 일로도 괴로운데 그런 것마저도 괴로워서 되겠습니까? 정말 잘못 가면 곱사도 되고 일이 벌어져서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사람들도 있긴 있습니다. 많습니다. 그런 거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얘기 안 해드릴 수가 없군요.
그러니 큰 방편인 줄 아시고 허방지방하고 무꾸리 하러 다니지 마세요.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허방지방하다가 내생에 또 올 때도 허방지방하게 온다면 세세생생에 허방지방할 겁니다. 그러니 이번 쉬었다 가는 길에 배워서 아주 뿌리를 뽑으세요. 그리고 재사 지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주인공에 모든 조상들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영령들이 그 속에 들어가보니까 확 뚫렸거든요. 모두 이 공부를 하고 나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체제불의 마음과 일체 중생이 둘이 아니게, 곳곳마다 통하지 않는 데가 없고 곳곳마다 보이지 않는 데가 없이 탁 뚫렸으니 뭘 바라겠어요. 모두 하나가 되지요. 그리고 사람의 생각으로서 이 세상 어느 곳에 내놔도 손색이 없지요. 우리가 완벽하게 안다면 우리 마음이 벌써 다 모셨고 다 해결을 했기 때문에 판결을 한 거지요. 더하고 덜함도 없이 배고프다 배고프지 않다도 없이…. 즉 말하자면 도리천좌에 전부 한자리를 하게끔 하는 거지요. 그러는 반면에 위패나 천혼문이 필요 없지만 그런 걸 모르는 분에 한해서는 위패는 써놓되, 물 한 그릇 떠놓은 데다가 소하라는 거는, 영혼을 붙들어 매놓으면 거기에 영혼이 부착이 돼 가지고 산 사람도 귀찮고 죽은 사람도 귀찮기 때문에 위패를 해놓더라도 태워야 하고 천혼문을 썼더라도 둘 다 다 태워야 됩니다.
그리고 차리는 음식을 ‘사람이 먹는 거지 귀신이 먹는 게 아니다’ 이렇게 한번 바꿔 보세요. 그렇다면 아무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떡 한 그릇에 그저 과일 서너 가지 해놓고 많은 물, 초, 향이면 이 세상이 다 엎어져도 궁색하지 않을 겁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듯이 모든 조상들이 다 한자릴 하게 되면, 그래도 손이 들이굽지 내굽겠습니까. 모두가 그러합니다. 그러한 이치를 모르고 형식적으로만 이것도 해놓고 저것도 해놓고 온통 이런다면 돌아가신 영령들을 기리는 게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조상들 때문에 우리가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은 좀 버리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어떤 집에 사람이 들어가기만 하면 그냥 피를 토하고 죽곤 했어요. 일본 사람들이 지은 집인데 그 집만 들어가서 살았다 하면 그냥 그렇게 죽는 겁니다. 그냥도 죽지 않고 피를 토하고 죽는데 어디다 물어보고 아무리 해도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겁니다.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은 들어가고 또 그냥 그렇다 싶으면 나가고 또 들어가고 나가고 또 들어가고, 이렇게 수 해 동안 수십 명이 죽었다 합니다. 그것도 멀지 않은 데서 말입니다. 그랬는데, 그래도 공부하는 사람이 있어서 아주 판 치고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는 ‘칼에 맞아서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기가 막힐까. 둘이 아니니 그것도 바로 나지.’ 하고 밥을 지어서 큰 그릇에다가 떠놓고는 물 한 그릇, 향, 초를 켜놓고 과일 세 가지를 차려놓고, 너와 나와 한잔하자 하면서 “둘이 아닌데 이럴 수가 있어? 그렇게 고통받고 죽었다면 우리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야지 어떡하겠느냐” 하면서 대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냥 내버리다시피 한 집을 그저 술값 정도 집어주고 사버렸어요. 그 후 아주 잘됐지요. 주위에 있는 논 삼분의 일은 다 사들였으니까요. 어떤 사람은 그렇게 주인과 부하가 둘이 아니게 잘 살고 오히려 자식들을 잘되게 도와주고 삽니다. 자기라는데 어떻게 안 도와줍니까? 자기를 자기가 죽일 수는 없지요.
그래서 이사를 가는데도 너와 나를 두 편으로 가르지 말라는 겁니다. 모든 거를 주인공에 넣고 다 그냥 한데 합치는 거죠. 마음 놀음으로 인해서 도깨비가 되고 마음 놀음으로 인해서 선자가 되는 겁니다. 이 마음으로 인해서 얼마나 타격을 받고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럼 질문하실 거 있으면 질문하세요.

▲질문자1: 새해에도 법체 강건하시어 단비 같은 법문을 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많은 중생들에게 한량 없는 법의 양식을 주시고 또한 저에게도 질문의 기회를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에 스님을 만나지 못하고 이 마음공부를 하지 못했다면 우리 집안은 진작 파산이 되고 저는 이제까지 살지도 못했고 또한 병고액난으로 지옥 같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ˆ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갑술년 새해를 맞아 우리 중생들이 무한한 법을 청합니다.
▲스님: 나로서는 신도님들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서 오늘도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 얘기가 한데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실천만 제대로 한다면, 그건 이 세상을 간파할 때 땅을 치고 울고 하늘을 쳐다보고 웃으면서 결심한 겁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자. 모든 사람들이 고통받는 게 바로 내가 이 세상을 두루두루 돌면서 고통받은 것이지.’ 하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얘기해드리지 않습니까? 잘 실행하세요. 그것만 잘 실행한다 하더라도 살아나가는 데에 생활이 거기에 부착되니까 고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여러분이 실천하고 체험하면서 개선해나갈 거는 개선하면서 나가세요.

▲질문자2: 사실 요즘 현대는 과거보다도 상당히 생활이 편리해졌고 풍요스러워졌지만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당히 마음이 조급하면서 여유롭지 못하게 살아가는 경향들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사회적인 대형 사고들이 빈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갑술년 새해에 스님께서도 큰 마음 한번 내주시고 저희 선원 가족 모두 좀 더 우리 자신과 가족의 안일만을 생각하는 관이 아닌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관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씀 올립니다.
▲스님: 우리가 ‘관’하면 과거생이나 현재생이나 미래생을 포함해서 삼심을 일심으로 규합을 시켜서 하고 있는데 어찌 현 사회의 문제를 관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의해서 관해야 할 일들이 지금 급하게 닥친다고 봐도 됩니다. 정치인들이 대통령과 더불어 폭넓게 그릇을 크게 만들어야 세계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겠고, 받아들였으면 바로 세계적으로 내보내야 할 지혜로움도 필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렇게 되게끔 관해야 합니다.
또 지금 사업가들이 사업을 제대로 못하고 가는 형편이라고 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나라는 좀더 마음이 넓지 못한 까닭인지 몰라도 모두가 제한이 돼 있습니다. 그 제한을 조금 풀어 주고 자유롭게 할 수 있게끔 넓혀주면 사업이 잘 되지 않을까. 또는 조그만 사업체들을 큰 사업가들이 좀 똘똘 뭉쳐서 돌봐주는 마음과 정부에서 돌봐주는 마음이 한마음으로서 구성이 된다면, 앞으로 발전되어서 우리나라에 경제혼란이나 또는 어떠한 거라도 타개하고 넘어갈 수 있지 않느냐 이런 거구요. 또 사람들이 모두 정신계를 추구하고 가야 할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물질계에서 헤매이고 온통 이론으로만 나간다면, 절대로 성립을 못한다는 것이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기를 들여다볼 줄 모르고 자기가 어떻게 걷고 있는지 모르고, 발전을 해나갈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이 마음공부를 모두 할 수 있게끔 하면 좋지 않은가 싶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생각이라면 꼭 그렇게 하면서 지켜보도록 하세요. 모두 그런 마음으로 지켜보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게 우리 사회 국가도 잘 살 수 있는 그런 기반이 갖춰질 것입니다.
오늘 모두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살아나가면서 생기는 모든 일은 주인공 자리에 몰록 놓아 타파할 수 있을 때 이것이 바로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니 진실로 믿고 놓는다면 바깥으로 끄달리지 않으니 잘못될 이유도 없어요. 바깥으로 끄달렸다 하면 잘못되는 공부입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천 가지 만 가지로 화해서 나온다 하고 부처로 보이고 거지로 보이고 마구니로 보인다 하더라도 허허 웃고 ‘한 구멍에서 나오는 것을 왜 내가 속아서 이러구저러구 하랴. 공부시키려고 그러는 것을.’ 하고 거기다 되맡겨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교차로를 뛰어 넘을 수가 있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이만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76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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