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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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재를 시작하며
일상성의 종교인 선종의 진면목
오늘의 우리 이야기로 풀어보자

틈 나는대로 경전을 읽고 선어록을 열람하고 또 나름대로 글을 써왔다. 그리고 가끔 번역도 하고 그걸 묶어 책으로 세상에 선보인 적도 있었다. 그런 일련의 작업 속에서 선불교가 가지고 있는 숨어있는 매력들이 읽혀지기 시작했다.
선종승려들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현실관 그리고 생명력은 ‘일상성의 종교’로서의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수행자로서의 엄격함과 칼날같은 정진력 뒤켠에서 묻어나오는 인간적 번민과 고뇌 그리고 인정스러움이 때로는 더 가슴에 와 닿았다.
그야말로 ‘사람냄새’가 주는 아름다움이었다. 때로는 ‘인간적’이라는 말이 가지는 한계인 속스런 차원에 매몰되지 않고 이것을 공부로 승화시켜 버리는 승속불이(僧俗不二)의 그 절묘한 반전은 지혜 그 자체이다.
비구와 비구, 비구와 비구니 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승려와 거사, 그리고 승려와 청신녀 등 다양한 상황의 설정과 긴장감이 주는 팽팽함은 이제 천년세월을 넘어 또다른 신화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신화는 생명력을 어떻게 불어넣느냐에 따라 현재가 되기도 한다. 삶 따로 불교 따로, 당송(唐宋)시대 따로 한국시대 따로가 되어버린다면 그 책임은 현재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잘못이다.
신화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또다른 우리의 현실이다. 바로 우리의 현재이기도 하다. 또 그렇게 되어야만 신화로서의 진정한 의미가 살아난다.
그래서 이제 그 선종사의 신화같은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오늘에 다시 되살려보겠다는 것이 연재하는 사람으로서의 변(辯)이라면 변(辯)이다.
선종의 1700공안은 이미 법칙화되어 오늘날 우리에게는 또다른 박제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만 그 당시에는 일상적인 생명력 그 자체였다.
따라서 그 공안이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선 지금도 계속 화두가 만들어져야 하는 당위성이 도출된다.
그 공안은 ‘차나 한잔 마시게’ 대신에 ‘커피나 한 잔 하게’라는 뭐 이런 식의 모방이라면 그것도 곤란하다. 그나마 현재 가장 대중화되어 있는 ‘이뭣고’ 화두는 만들어진지 1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순수토종 창조적 공안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1700공안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 공안이 단절되었다는 것이 더 문제인 것이다. 이후의 역사가 없다보니 과거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복제로 가게 됐고, 복제는 박제가 되고, 그러다보니 현재와 무관한 남의 나라 먼 이야기가 되어 복고주의라는 불교사의 퇴행적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일상성의 종교’인 선종(禪宗)의 진면목을 한 꺼풀식 벗겨내면서 그 일화가 의미하는 당시의 일상성을 읽어낼 수 있다면 오늘날의 그것도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닌다. 고전이 가지는 영원한 생명력의 원천이 여기에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이요 법고창신(法古創新)이며 계왕개래(繼往開來)가 아니겠는가.

원철 스님(사진)은 해인사로 출가하였으며, 해인사승가대학·실상사화엄학림·동국대(경주)불교학과 강사를 지냈다. 번역서로는 <역주 선림승보전 上·下>(장경각)이 있으며, 틈틈이 경전과 선어록 번역에 힘을 쏟고 있다. 현재 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을 맡고 있다.
2005-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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