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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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심봉을 놓치지 않고 관하면서 생활해야
모든 것을 마음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어


어려운 시대를 슬기롭게 살려면…
또 한 해가 밝았습니다. 그렇지만 시작이 그렇게 밝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경제 침체와 참혹하리만큼 가해지는 대자연의 시련들이 더욱 새해를 어둡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어려운 시대를 슬기롭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요?


가까운 여러 나라에서 난리가 나서 힘들어 하는 걸 보면서 마음들이 어떻습니까? 어떻게 해야 잘 살 것 같습니까? 누가 대신 마음을 내 주고 누가 대신 살아 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한생각이 여러분을 편안하게 살게 할 수 있고 여러분의 한생각이 여러분을 괴롭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당연한 사실이니까요.
정녕코 제각기 자기 자신을 이끌어 가는 자기 주처가 바로 자기한테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그거를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나가려면 공생이라야 되고, 이 몸을 보더라도 공생이어야 하고, 몸의 움죽거림을 봐도 공심이라야 하고, 몸의 움죽거림을 봐도 공용입니다. 그리고 공체이고 공식을 합니다. 그렇게 인간 모두가 더불어 살아나가는 현실입니다. 항상 그런 말을 여러분한테 해 드렸는데 그것을 어느 때는 백 번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다가 어느 땐가 모르게 가슴에 와 닿을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모두 편안하게 사실 수가 없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 때문이고 차원에 따라서 분별에 따라서입니다. 꼭 그렇게만 생각이 되거든요.
이 세상 진리라는 것은,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구리는 구리하고 첨보가 되고 금은 금하고 첨보가 되고 무쇠는 무쇠하고 첨보가 되고 철은 철대로 첨보가 되고, 이렇게 제각기 천차만별이 다 그렇게 끼리끼리 만나서 부합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 에너지의 근본은 한군데서 나지만 갈래갈래 차원대로 끼리끼리 뭉쳐지는 것은 여러분이 지금 세상 살아나가는 도리를 보신다면 다 아실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곱게 가느냐, 좀 거북하게 가느냐, 아주 거북하게 가느냐 하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물로 죽고 불로 죽고 지진이 나서 죽고 이렇게 했지만 지금은 마음에 따라서 문제가 일어난단 말입니다. 이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마음은 한 찰나에 전 우주를 도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따로따로 용해가 있고 그런 게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은 따로따로 분별을 하겠지만 아는 사람들은 그러지를 않아요.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공용이라고 그러죠. 공용을 하고, 때에 따라선 공체로 공심으로 공생으로 공식을 한다는 얘깁니다.
경전엔 원식이라고 그랬지만 우리가 지금 세상에 알기 쉽게 누구나가 다 알게끔 공식인 것도 똑같습니다. 이 몸 하나를 보더라도 공생으로 산다는 걸 아시죠? 공용으로 산다는 것도 아시고, 공심이 돼서 천차만별의 마음을 낼 수가 있다는 것도 아시구요. 그러면 그거를 퍼 집어서 하나로 공식으로 뭉쳐서 우리가 여여하게 해 나간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차원에 따라서 살지만 지금 처음 듣는 사람도 있고 또 여러 번 들었어도 이해가 가질 않는 분도 있고, 또 이해가 넉넉히 가는 분도 있고, 이해를 아주 잘해서 아주 여여하게 사시는 분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여여하게 하고 알고 가고 보고 이러는 것만, 그것만이 도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전부 첨보해야 됩니다. 그래 진실을 그대로 실천을 해 나가는 거죠.
그래서 살기 힘든 분들은, 여유가 없는 분들은 마음내는 게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이것저것을 따지고 하는 게 아니에요. 따지면, 이것은 그르고 이거는 옳다 이렇게 가면 공법은 못됩니다. 그래서 천차만별로 여러분에게 말을 어떻게 해야만 옳겠느냐?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삼 분단으로 나누어서 이렇게 말할 때에 여유가 없는 분들은 여유가 없는 대로 그냥 무조건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편안하게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한 생을 살다가 가는 것이 소꿉장난하다가 하루 저녁에 해가 지면 다 헤어지는 거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 게 아니라 아주 모르는 분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고 안다고도 생각 마시고 그대로 편리하게 생각하세요. 편리하게 하시고 무조건 자기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놓고, 편안하게 말입니다. 거기다 놓지 않으면, 그 기둥 자기 주장자에다 놓지 않고는 안 되는 거니까요. 이 우주의 삼라만상 모두가 통신처가 거기니까요.
그래서 놓고 가되 만약에 지구의 어느 편에 무슨 일이 생겼다, 일이 생긴다 이럴 때 어떻게 생각을 해야 편안하게 사시겠습니까? 이거는 누구도 해결을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나 마음은 해결을 할 수가 있다 이 소립니다. 내 마음이 공심으로 공생으로 살기 때문에 공용을 하고 공체로서 공식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맡기면 그대로 일체가 속속들이 다 연락처가 되는 겁니다. 공심으로 공용을 하게 되죠.
그러니깐 우습게 듣지 마시고 우습게 알지 마시고 자기를 진짜로 믿어라 이겁니다. 자기 껍데기를 믿으라는 게 아니라 자기 내면처를 진짜로 믿어라 이겁니다. 지금 내면처가 아니라면 일체 부처님도 상봉을 못하게 되어 있다 이겁니다. 이 세상에서 대신 죽어 줄 수도 없고, 자 줄 수도 없고 먹어 줄 수도 없고 아파 줄 수도 없고, 여러분한테 먹고 잠자고 그래 줄 수도 없지 않습니까? 대신 누가 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가 자기 생각으로 인해서 외부의, 내부나 외부나 다 살고 또 여러분의 말 한마디 부드럽게 하는 데에서 남이 섭섭지 않게 생각하고 유하게 생각을 하고…. ‘그게 뭐 그런다고 뭐 되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구요. 항상 그렇게 버릇을 하면 모두 습이 그렇게 된단 얘깁니다. 그렇게 해 보지 않던 분은, 죽어도 그렇게 안 되죠.
그러니 자기 중심을 항상 확고하게 세워 놔야 합니다. 자기가 살려면 자기 자리를 자기가 꼭 지켜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세계적으로나 지구적으로 그런 문제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기 심봉을 놓치지 않고 항상 관하시면서 생활해 나가시기를 꼭 당부합니다. 자기는 자기만이 살릴 수 있어요. 그래야 가족도 사회도 모두 살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어떤 식으로 공부해야 하나?

저는 어렸을 때부터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게 뭔가에 대해 생각을 항상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출가를 해야 되나, 아니면 결혼을 해야 되나, 그런 식으로 항상 갈등을 하다 보니 제 자신이 굉장히 괴롭습니다.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해야 할는지요.


공부하는 거는 출가를 했든지 안 했든지 하는 겁니다. 출가를 하는 거는 가정을 다 버리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죠. 가정을 버려야 하고 부모형제에 대한 애착을 다 버리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안에 들어와서는 나도 버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공부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철 살다 가는 건 다 마찬가지인데 스님네들이, 스님네들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마음공부 한 사람들은 생사윤회에 걸리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죽고 사는 데만 걸리지 않는다면, 이런 거 있죠? 죽어도 이 자리 살아도 이 자리죠? 죽어도 이 자리, 살아도 이 자리입니다. 그런데 죽은 사이가, 아니 살아 나온 자리가 없기 때문에 죽어 갈 자리도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생사윤회를 다 치워 버렸다 이겁니다.
그러니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하려면 이렇게 이렇게 해라 하기보다도 내 몸뚱이가 공해서 없는데, 세상이 공해서 없는데 그 자리에서 오기는 어디로 왔으며 그 자리에서 어디로 갈 것이 있느냐 이렇게 하세요. 그 뜻을 한번 잘 생각해 보면 한 철 나는 데에 사실은 장가가고 시집가고 이래서 때로는 더 얽매이는 수가 있고 그래도 이 도리를 공부를 열심히 하면 펼쳐지는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

스님께서는 책을 통해서 진리를 구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을 밝힌 뒤에 책을 봐야 글자에 놀아나지 않고 진실을 알 수 있다고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또한 그 말씀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 내 안에서 올라오는 의문이 있으면 되놓고 합니다만, 우연히 들렀던 법당에서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자꾸 의문이 생겨 질문을 올립니다. 그 하나는 바로 저의 근본을 뜻하는 걸로 생각이 들지만 그 하나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래요. 우리 공부하는 거는 딱 한 구녘으로 들어가서 둘 아니게 돼야 됩니다. 한 구녘이라야만이 진정코 믿고, 오직 우리가 살아나가는 거 일거수일투족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그놈한테, 거기에 다 있어요. 그리고 원력도 오직 한군데밖에는 없다 이겁니다.
일체 모든 흙이든지 물이든지 구름이든지 허공이든지 모두가 일체 살아나가는 게, 하다못해 꽃 한 송이도 거기서 나오지 딴 데서 나오는 게 없다. 한군데서 나오지. 그래서 지금 물은 것처럼 ‘세상은 하나로 돌아갑니다’ 하고 제자가 대답을 했더니 은사 스님이 그렇게 묻더라는 겁니다. 그 하나는 어딨는고 하고 말입니다. ‘이 세상의 진리는 어떠한고.’ 하고 물으니 ‘하나로 돌아갑니다’ 하니까 ‘그 하나는 어딨는고.’ 하고 물었던 거죠. 모든 게 하나 아닌 하나예요. 이 모습도 숫자가 뭐 얼기설기 수많죠. 생명들이 얼마나 많아요? 몸 하나를 본다 하더라도. 사실 몸뚱일 보면 깨끗한 게 하나도 없고 또 더러운 것도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생명, 아주 고귀한 생명은 하나밖에 없어요. 여럿이 그렇게 견뎌도 공생입니다. 모두가 같이 살고 있단 말입니다. 근데 공생이라구요. 따로 떨어져서 공생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한 주장자에 모두가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주장자를 놓고, 대나무 한 주장자를 놓고선 빈 속, 대나무가 속이 비어 있죠? 오직 속 빈 그릇으로 그냥 모든 것을 다 넣어라. 넣으면 나오는 것도 그 자리요 들어가는 것도 그 자리다. 그것이 죽비 가운데를 피리로 표현할 수도 있고 바다로 표현할 수도 있고, 모든 것은 다 그런 겁니다. 그러니깐 나 하나를 배우는 데 나를 버려야 된다. 나를 버려야 된다 하는 건 믿음이 이걸 내면에, 이거를 만약에 대 주장자라고 하고 이걸 믿었다면 오직 여기 하나밖엔 없는 겁니다.
지금 시대도 그렇고 우리가 앞으로 큰 나무가 돼서 열매를 맺고 열매를 열리게 하고 누구든지 그 열매를 제 나무에서 익어서 먹일 수 있고 이렇게 된다면, 그건 아주 큰 나무도 무지하게 큰 나무인데 그거를 아예 요만하게 좁쌀 알갱이처럼 해서 우주를 담을 수도 있다 이겁니다. 이게 생각하면 엄청난 문제지만 주인이, 우주의 주인이 누구냐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깐 그 배우는 과정에 오직 너 하나가 있다면 너 하나는 너 하나에다 넣어라. 꺼내는 것도 너 하나에서 꺼내라 이겁니다.
그러게 양 무제가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그러니까 달마 대사를 미워서 죽였는데, 죽여서 묻었는데 신발 한 짝은 무덤 속에 놓고 신발 한 짝은 들고 다시 나온 거예요. 그걸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니깐 아무리 내가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그 그릇을 얘기하는데 꼭 그릇 속에다가 그걸, 그 말을 믿고 해라 이겁니다.
그런데, 스님의 말을 들으려면 책도 보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래야 하지 않느냐 하는데 그게 아니죠. 아주 옛날에 선지식들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책을 보되 네가 책을 보지 말고 책이 너를 보지 않아야 된다.” 그러니까 보는 사이 없이 봐야지 내가 책을 본다고 그러고 안다 그러고 보지 마라 이 소리죠. 오직 거기서 보게, 너를 형성시켰으니까 보는 거지 네가 보는 게 아니지 않으냐 이겁니다. 모든 게 다 자기가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내가 이런 말을 별말 아닌 거같이 이렇게 해도 내가 하는 말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진정코 믿고 해야 할 것은 자기만이 자기를 믿을 수가 있는 거지, 누가 대신 믿어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천 일을 서산 대사가 기도를 하면서도, 기도를 한 게 아니라 오직 놓고 그 하나를 믿기 위해서, 믿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겁니다. 그러니깐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니까, 과거의 너와 현재의 너가 둘이 아니니까 하고 한데 합쳐 주는 소리가 그렇게 컸단 얘기죠. 그래 우리가, 내가 아주 잘났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못났다고도 생각하지 말고 항상 고개를 들지 말라. 고개를 들지 말고 오직 하나만이, 그 하나가 커지는 사이 없이 커져야 줄이는 사이 없이 줄어지고 마음대로 자유자재할 수가 있는 거다 이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만나는 소리가 견성의 소리요, 만나서 배우는 그것이, 그냥 없는 색경이 거기서 절로 나와서 둥글게 에너지가 주장자가 돼서 딱 나온다면 성불입니다. 누가 갖다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깐 공부해서 내 자리를 내가 찾고 내면 자리를 정말 큰 공치기 할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 놓고 공을 칠 수 있어야 되는 거다 이겁니다.
그래서 옛날에 선지식들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미쳤다는 소리를 한번 안 들으면 정말 크게 깨칠 수가 없다고. 그렇다고 그냥 미친 사람처럼 못나게 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 안에서 하나를 한다 하더라도 거기서 하는 거고, 하나를 내놓는다 하더라도 거기서 하는 거고, 누가 하는 놈이 없이 그놈이 다 형성시켰으니깐 그놈이 하는 거 아닙니까.
평상시에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것도 그놈이 다 움죽거리게 에너지를 주니까 이렇게 하는 거지, 자동적으로 나오니까 사는 거지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거를 공부하게 되면 그 에너지가 어떻게 돼서 끊어지고 어떻게 돼서 이어진다는 것도 알게 되고 다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깐 오직 자기 아닌 자기 한 구녘에 넣고 꺼내는 겁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책을 보되 보지 마라 이런 소리죠. 책을 보되 보지 마라. 그래서 이전에 금강경이고 뭐고 다 집어 팽개치고 태워 버리고 한소식을 얻었다 이렇게 말을 하잖아요? 근데 그거를 태워 버린 게 아닙니다. 마음으로써 모든 거를 집어넣었으니 없는 거죠. 한번 봐서 집어넣어 버리니깐 본 게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한 것도 없고 본 것도 없고, 그러면서도 상식적으로 우리가 모두 방편으로 배울 거는 배우고 나가면서도 배운 사이가 없고 한 사이가 없고 했다는 말이 없다 이겁니다.


믿고 맡기기만 해도 되는지요.

스님께서는 세 번을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주인공에 믿고 맡기는 것으로 세 번 죽기가 가능합니까? 아니면 스님께서 해 오신 바와 같이 목숨을 떼어 놓고 들어가야 합니까?


주인공을 일심으로 발견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가, 거지든 거지가 아니든, 남자든 여자든 막론해 놓고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이라고 할까요, 내일이라고 할까요, 오늘이라고 할까요? 어느 동자가 말입니다, 부처님과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는 동안에 부처님께서 동자더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자야! 내 발과 네 발의 차이가 어떠하냐?” 하고 물었습니다. 동자의 말이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했습니다. “차이가 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고?” 하고 또 부처님께서 물었습니다. 동자가 대답하기를 “내가 부처님한테 가면 부처님으로 하나가 되고 부처님이 내게로 오면 나와 하나가 되니 어찌 차이가 난다 하겠습니까?” 했더랍니다. “그러면 그 하나로 돌아가는 것은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고 또 물었답니다. 이리 가도 하나고 저리 가도 하나라니 말입니다. “그 하나로 돌아가는 건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고 부처님께서 또 물었답니다. 이 동자는 “박 넝쿨이 담 너머로 넘어가서 박이 열린 까닭입니다.” 했더랍니다. 그러니 부처님 말씀이 또 “그래 박은 여여한가?” 했더니 “박은 제 나무에서 익어서 맛이 좋습니다.” 했더랍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 만공에 꽃이 두루 피고 향기가 두루 나고 만 가지 맛이 나는구나. 그대로 그냥그냥 익었도다.” 했더랍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지금 한 말을 그대로 연결해서 잘 들으셨으면 어떻게 들으시겠습니까? 침착하게 그 과정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바깥으로 경전으로 알려고 하지도 말고 내 마음 가운데서 ‘둘이 아닌 고로 그 하나는 담 너머로 박 넝쿨이 넘어가서 박이 열린다.’ 그 박도 익었어야죠, 또. 그래야 제 맛이 나겠죠?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우리가 마음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마음 밖에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수없는 억겁으로 진화돼서 나오면서 그래도 선근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것입니다. 인연이 없다면 모이질 않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이 우리가 이런 손수건을 하나 들어도 인연입니다. 이 손수건을 내가 들어 주지 않는다면 이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손수건이라는 이름조차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써 주니깐 바로 이 손수건이라는 빛이 있는 겁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만나는 인연들도 같이같이 만나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한 철 나와서 만나는데 그 만남에 의해서 ‘구덩이에서 빠지느냐 구덩이로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가 있거든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안으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착하게 마음을 쓰고 선한 일을 많이 하시고 악하게 생각을 갖지 마시고, 항상 부드럽게 한마음 속에, 더불어 같이 내면이나 외부나 모든 것이 직결돼 있고 가설이 돼 있는 한마음 속에 모든 것을 놓으시고, 거기다 맡기시고 어떠한 억울함도, 참으라는 게 아니라 거기다 맡겨 놓고 ‘네놈만이 해결을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시고 물러서지 마십시오. 겉으로도, 말로 부드럽게 하시고 거기다 맡겨 놓으면 자기라는 게 없어집니다.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행동을 부드럽게 하시고, 그렇게 무조건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면 아마 조건 없는 사랑이 내 앞에 올 것입니다. 이 미묘한 도리를 여러분이 직접 실험해 보십시오. 실험을 해 보지 않는다면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은 다리 절름발이가 돼서는 아니 됩니다. 즉 무심과 유심이 절름발이가 돼서는 아니 됩니다. 동시에 같이 돌아간다는 자체를 아셔야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과 마음내는 거와 육신이 움죽거리는 거와 동시에 돌아가죠? 어디 따로따로 돌아갑니까? 눈과 귀가 따로따로 돌아갑니까, 어디?
그러니까 동시에 악도 선도 거기 놔라. 악한 거는 ‘선하게 이끌어 줄 수 있지 않으냐.’ 하고 놓고, 선하게 돌아가는 거는 감사하게 놓고, 모든 거를 한군데다가 놓는 것이 자기가 공해서 본래 없는 것이기에 따로 없다 이 소립니다. 따로 내가 없는데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거는 잘못돼 돌아가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독불장군이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더불어 같이 돌아가고 있죠. 그러니까 그것을 완벽하게 알 때까지는 모든 것을 ‘내가 따로 없으니까’ 하고 거기다 놔라 이겁니다. 그게 죽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내가 따로 없는 반면에 모두가 하나로 돌아갑니다, 모두가. 안 그렇습니까? 공생이며 또는 공체며 공용이며 공식화 하고 모두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간다 이겁니다. 그 도리를 완전히 알게끔 하려면 겉으로, 이론적으로, 학술적으로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으로서 ‘한마음 속에서 모든 게 들이고 내는 그 무쌍한 만법이, 그대로 더불어 돌아가는구나.’ 하는 거를, 둘이 아니게 말입니다. 그거를 진심으로 자기 속으로 확철히 알려면 거기다가 또 놓고 돌아가야 하니까, 또 두 번째도 죽어야 한다 이 소립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말라’ 이 소리가 죽어야 한다 이 소립니다.
세 번째도 같이 돌아가면서 서로가 인연에 따라서 손수건을 쥐었으면 손수건을 들고만 있는 게 아니라 땀을 닦는 겁니다. 어디를 씻든지. 그러면 나와 수건과 인연이 마주쳤기 때문에 씻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건 발전의 작용입니다. 발전의 작용! 그렇기 때문에 나툰다고 하는 겁니다. 나툰다. 예를 들어서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땀이 나면 손수건을 들고, 말소리를 내려면 마이크를 들고. 일체 만 가지 만물이 다 나 아님이 없이 나투면서 돌아간다는 얘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거를 알려면 또 놓고 가야 된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한 번도 죽어야 하고, 두 번도 죽어야 하고, 세 번도 죽어야 구경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 이거죠.
그러니 내가 죽지 않는다면 전체 모두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이치도 모를 거고,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 그 원리가 바로 공했다는 사실을 모를 것입니다. 그거를 알기 위해서 한 번도 죽어야 하고 두 번도 죽어야 하고 세 번도 죽어야 한다 이런 말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동자가 얘기를 했는데 부처님 발과 그 어린 동자의 발과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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