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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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 스님의 스님이야기-설송 스님 (上)
7년간 한결같이 행자생활
일의일발로 전국 돌며 정진

토함산(吐含山)의 새벽을 깨우는 도량석 목탁소리가 석굴암 경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마하수리 수수리사바하…
청아한 목소리였다. 아무런 티끌도 묻어있지 않은 맑은 음색이었다. 그저 맑고 청아한 목소리라는 표현밖에 달리 할 말이 없는 그의 염불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일정한 음조(音調)로 이어지는 그의 독경은 새벽 냉기와 어울려 서늘한 새벽 산사의 공기와 어우러져 잠든 만물을 깨어나게 했다.
노행자(老行者)라 불리던 설송(雪松) 스님. 입산한 지 6년인가 7년이 지났는데도 수계를 하지 않아 그렇게 노행자 또는 늙은 행자로 불려지다 여러 스님들의 설득에 마지못해 계를 받고 ‘설송’이란 법명을 받은 터였다. 그러나 스님의 일상은 계를 받기 전이나 후나 다를 게 없었다.
새벽 도량석을 시작으로 공양간 허드렛일, 마당쓸기, 나무하기 등 그의 일상은 한결같았다. 맑은 목청으로 목탁을 두드리며 독경하고 산중의 잠든 왼갖 사물을 흔들어 깨우던 노행자 설송 스님. 스님은 지금 어디서 이 겨울을 맞고 있을까.
떨어진 나뭇잎들이 뜨락을 휩쓸고 다니는 이 스산한 계절에 그는 지금 어디서 망연히 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까. 알 수 없다. 허나 짐작컨대 그는 여전히 일의일발(一衣一鉢)로 전국의 심산고사(深山古寺)를 떠돌며 때묻지 않은 미소를 머금은 채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가끔씩 새벽 도량석 목탁소리를 듣고 있다가 그를 떠올리곤 했다. 목소리처럼 눈도 깊고 그윽하게 맑은 노행자, 그를 떠올리며 알 수 없는 향수에 젖어들곤 했다. 육조 혜능을 좋아하고 그의 행적을 기리던 설송 스님. 그도 혜능처럼 죽어라하고 방아만 찧다가 어느 날 문득 해탈의 문턱에 이르고자 했음인가. 그리하여 혜능처럼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강호의 어느 골짜기에 연기처럼 숨어 버리고자 했음인가.
삐쩍 마른 훌쩍 큰 키의 그가 납의를 걸치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뒷모습이 망막을 스친다. 참된 행자(行者)의 길을 가고자 했던 그는, 그 길을 가고자 염원하고 갈망했던 그는,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절에 편안히 안주(安住)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이 불안하고 어두운 시대에 우리 승가가 가야할 궁극의 가시밭길을 홀로 묵묵히 걸어가고 있음을 믿는다. 진정한 사표로서 숱한 유혹의 손짓에 휘둘리지 않고 조용히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임을 믿는다. 평상심이 곧 도라고 하지 않았는가.
서두르지 않고 소걸음처럼 천천히 묵묵히 한 눈 팔지 않고 걸어가는 자야말로 피안에 이를 수 있다. 행주자와(行住座臥)에 흐트러짐이 없는 평상심을 유지하고 지켜나가는 자만이 피안에 이를 수 있다. 부모미생전의 면목, 무상의 보리를 증득(證得)할 수가 있다. 허나 말이 쉽지 어디 그게 뜻대로 되는가.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조금 편하면 더욱더 편해지고 싶은 게 인간의 속성이다. 유혹에 물들지 않고 평상심을 지켜나간다는 것, 그렇게 참으로 힘들다.
노행자 설송 스님. 마치 그의 법명 그대로 설송(雪松)처럼 꿋꿋하길 기원한다. 엄동설한에 가장 먼저 일어나 찬물에 세수하고 목탁 두드리며 온 도량 돌던, 온 산중 생령들을 흔들어 깨우던 맑은 목소리의 설송 스님이 그리워지는 새벽이다.
그가 무엇을 그리 가진 게 있으랴만 늘 무엇인가를 남에게 주고싶어 하던, 그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보시행이 새삼 그리워지는 새벽에 일어나 목탁 소리 울리는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겨울 찬 달이 서천에 걸려 있다. 눈푸른 납자들이 머물고 있는, 제방의 선원 뜰에도, 거기 하늘에도 찬 달이 서천에 걸려 있으리라.
노행자 설송 스님, 그가 조금은 그리워진다. 날씨가 추워지는 이 새벽에… 노행자 설송 스님께서도 어느 선원을 향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으신지, 어느 비어 있는 토굴을 찾아가 겨울내 지필 땔나무를 하고나 있으신지, 합장하고 합장한다. 땔나무는 저번에 살다간 어느 스님이 다음 오실 스님을 위해 해놓았을 것이지만… 그래도 노행자 설송 스님은 움직이고 또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의 한 생애가 저문 들녘에 저 혼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처럼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다. 노행자 설송 스님의 행보가 이 시절의 어느 변방을 향해 아무런 지향점도 없이 가고 있다. 가고 있으므로, 저 혼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처럼 그저 그냥 고즈넉할 따름이다.
■봉화 청량사 주지
2005-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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