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를 거기다 맡기고 편하게 사십시오
문
문공부해도 어려움에 부딪쳐요
선원에 나온 지가 얼마 되진 않습니다만, 일 주일에 한 번씩 법회에 참석하면서 스님 법문을 듣고 오면 그 다음 주에는 일할 때도 즐겁고 맘이 착 가라앉음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 주일이 빨리 갑니다. 그런데 선원에 다녀왔는데도 어려운 일이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왜 그런 것인지요?
답
그게 공부할 수 있는 재료를 제시하는 겁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자기가 배워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재료를 하나씩 던져 주는데 그 재료를 받아서 넘길 수가 없으니까 답답한 겁니다.
내가 항상 얘기했듯이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 재료가 오든지 그냥 그저 탁탁 용광로에 집어넣으면, 그리고 지켜보면 자동적으로 재생이 돼서 새로 다시 나옵니다. 그런데 그걸로 뭘 하느냐에 따라서, 또 생각을 하면 뭐가 돼서 또 나오게끔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부할 수 있는 재료를 던져 주는 거지 정말 그렇게 되나와서 던져 주는 게 아닙니다. 그걸 모르니까 겁이 덜컥 나는 거예요. 겁부터 벌써 덜컥 나죠. 그러다 보면 잘못돼서 고생을 하게 될까 봐 걱정을 하게 되죠. 그러나 그러는 동시에 자꾸자꾸 지혜가 넓어지고 자꾸자꾸 공부가 익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환경에 처한다 하더라도 그걸 공부의 재료로 삼고 모든 것을 그저 거침없이 하시도록 하세요.
문
업보를 언제 받게 되는지요?
선업과 악업을 몸속에 가지고 있고 그 선업과 악업대로 인생을 지금 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은 저희들이 살면서 지금 행하고 있는 이 선업과 악업이 다음 생에까지 연결된다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은 전생에 익혀온 선업과 악업에 의해서 이생을 살고 있고 이생에서 지은 선업과 악업은 내생에서 받게 되겠지요.
답
어저께 누구 따귀를 때렸는데 맞은 사람이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다가 그 이튿날 와서 아주 직살나게 팼다면 그것도 과거에 지은 것대로 현실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런 거와 같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현실에 받고 현실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미래에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자체, 과거도 오늘이요, 미래도 오늘입니다. 연방 연방 오늘입니다. 그러니까 알고 지은 것은 알고 받게 마련이고 모르고 지은 것은 모르고 받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팔자 운명이 그렇게 주어져 있지만 선업은 감사하게 놓고 악업은 거기서만이 해결 할 수 있다는 그 믿음에 의해서 선업으로 돌리면 모든 오간지옥이 무너진다 이 소립니다. 오간지옥이 무너지고 유전성이나 영계성이나 업보성이나 세균성이나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새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무너진다 하는 것은 컴퓨터에 입력이 된 데다가 새 거를 자꾸 넣으니까 앞서 입력했던 것이 다 없어진다 이겁니다. 앞서 넣었던 것이 다 없어지고 새로 자꾸 입력이 돼서 들어가니까 새로 입력된 대로 하나하나 다시 나오는 겁니다. 그래 나오는 대로 다시 또 놓으니까 어저께 넣은 것이 다 없어지고 없어지고 하니까, 현실에 생각하는 대로 넣고 그러니까 그릇에 잔뜩 담겨 있을 수가 없죠. 그러니까 새 거를 자꾸자꾸 넣을 수가 있는 거죠. 잘된 거든 잘못된 거든 잔뜩 차 있는 데는 아무리 좋은 게 닥쳐도 넣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릇을 자꾸 비워서 잘못 입력된 거를 제거시키고 새롭게 잘 입력해라 이겁니다.
문
자꾸 울게 됩니다
스님이 들으시면 웃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참선을 하다보면 자꾸 울게 됩니다. 삼라만상을 보면 가슴에 닿아서 울게 되고, 울지 말아야 될 텐데 남이 언짢은 걸 봐도 울고 남이 좋지 않아서 내가 돕고 싶은 마음이 나도 울게 됩니다. 이렇게 우는 것을 좀 막을 방법은 없는지요?
답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뿌리로부터 거죽으로 왕래가 되기 때문에 해동이 되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아주 얼고 언 나라가 봄이 오려면 한정 없이 얼음이 녹아서 쏟아집니다. 그러니까 업보가 녹느라고, 그 얼음덩어리가 녹느라고 여러분의 눈을 통하고 혈맥을 통해서 그 얼음이 녹아내리는 겁니다. 지옥고가 무너지느라고 그럽니다. 추운 겨울날이 지나 봄이 오느라고 그럽니다. 해동이 되어 꽃이 피니까요.
그렇다고 그냥 아무 데서나 울지 마시고 ‘아무 데서나 눈 퉁퉁 붓게 울도록 해동을 시키면 어떡해? 아무도 없을 때나 좀 그러지.’ 그렇게 관하세요. 그러면 절대 누구 있는 데서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것도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겁니다. 참, 이 공부가 얼마나 좋은 공부인데요. 정말 자유스럽게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뿌리를 믿고 하나하나 넘어가 보세요.
문
끊는 게 더 어려운데…
불교에서 무상이라고 하는 것이 집착을 끊으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사실 집착을 끊는 게 더 큰 고통으로 이끄는 것은 아닌가, 모습 있는 나를 고집하지 말라고 그러지만 그 고집을 끊는 게 오히려 더 큰 괴로움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과연 생사문제 해결이라든지, 집착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불교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건지 여쭤 보고 싶습니다.
답
지금 질문하시는 분이 생각을 하고 말을 하기 때문에 도(道)도 있는 거고 또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죠. 그러나 아무리 말을 잘해도 그 내용을 모르시기 때문에 모르시는 거죠. 또 때로는 알면서도 모르고 모르면서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죽었다 안 죽었다 이러는 게 아닙니다. 말로는 다 아는 것 같아도 아무것도 거기에는 적용이 되지 않으니깐 죽어야 너를 본다고 말을 한 겁니다. 즉 말하자면 내가 죽어야, 껍데기인 내가 죽어야 보는 거고, 육안이 아니라 법안으로 보는 거고, 또 내가 죽어야 부와 자가 만나고, 과거 자기하고 현재 자기하고 만나면 그게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둘이 아니면 그때서야 자기를 만날 수 있다, 또 자기를 불안(佛眼)으로 볼 수 있다고 말을 하죠. 그러니깐 자기 주인공을 믿고 모든 걸 무조건 걸림 없이 그냥 맡기라는 얘기죠.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 가정에서 아버지가 “얘, 아무개야!” 하고 자식을 부르면 그 자식이 대답을 하죠? 또 “아빠!” 그러고 부를 때에 아버지가 대답을 하죠. 순간순간 그렇게 바뀌면서 돌아가는데 어떻게 믿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삶이 없이 사는 것이고 함이 없이 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렇게 해서 고통이 더 있다면 그건 어리석다고 봅니다. 그걸 어리석다고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그건 고통이 아닙니다. 그건 그렇게 됐으니깐 그렇게 됐을 뿐이고 그렇게 생각이 되면 되는 거고 그렇죠. 또 그렇게 생각을 안 하면 나가서 뛸 수 있고요. 그러니까 나라고 고집을 한다면 괴로울 것이고 그 나마저도 벗어나서 모두가 공생 공심으로 공식함을 믿고 그렇게 행을 한다면 굳이 생사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겁니다.
문
물질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물질 최초의 창조와 그 창조된 물질이 최후에 어디로 가느냐 하는 거에 대해서는 현대과학에서도 아직 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가 꼭 풀려야만이 우리 인류평화에 공헌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저도 항시 그 문제를 화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스님께서는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보시는지, 생각하신 바가 있으시면 하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물질이 어디로 가느냐고 그러는데 물질이 뭘 어디로 갑니까? 그 자리에서 나와서 그 자리로 갔다가 그 자리에서 또 나오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지 딴 데로 가거나 그런 것도 없습니다. 자리를 딴 데로 옮기거나 그런 것은 화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 자리로 갑니다.
보이지 않더라도 그 자리요, 보이더라도 그 자리인데 그것이 화해서, 우리가 저녁에 잠을 자는데 저녁에 잠을 자는 거는 에너지를 흡수해서 생산해서 낮에 그 에너지로 인해서 살게끔 돼 있습니다. 과학으로는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겠지요. 허나 불교의 법으로서는 우리가 없다고, 몽땅 다 없다고 봐야죠. 없는 데서 그냥, 즉 말하자면 하나의 생각을 지었다 이럴 때는 그냥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그게 묘법이 아닌 가 하는 겁니다.
문
불자로서 추구해야 할 목표
수행을 해 나간다고 하면서도 기실 마음공부의 대상이 어떤 사사로운 이익에 제한되어 있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기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고통과 고난의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제자로서, 불자로서 진정 새롭게 추구하고 또 바래야 될 희망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가르침 주셨으면 해서 글 올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직장에서 일할 때, 또 가정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칠 때 자기에게 이익 되는 것에만 너무 집착을 하게 되고, 그래서 실제로 우리가 마음을 제대로 마음자리에 두지 못하고 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생활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될 구체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한 가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답
지금 ‘부처님의 제자로서’ 이렇게 했는데, 우리가 넓게 생각을 한다면 풀 한 포기도 스승 아닌 게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나가다 보면 강도짓 하는 사람을 보고도 깨닫는 게 있습니다. 나는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강도질 하는 사람을 보면서 생각을 할 때도 있으니까 그 강도도 스승이요, 풀 한 포기 돌 하나, 물이 흘러가는 것도 스승입니다.
그렇게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 모두를 한데 합쳐서 주인공이라고 그런 겁니다. 일체 만물만생, 또 과거 현재 미래 삼세 삼심을 한데 합쳐서 주인공이라고 하는 거니까 주인공 하나만 생각하면 뜻으로다가 그냥 둥글려지는 겁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세요. 이것저것 자꾸 생각하면요, 마음이 산란해서 진짜로 곧장 들어갈 것도 못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한데 모아서 맡기시고 지켜보는 그런 참된 선(禪) 수행자가 되세요.
그리고 어떨 때 보면 여러분이 좀 어리석게 사는 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회사에서 직원들을 데리고 일을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하면서 사람이 안 온다고 하는 문제들을 보면, 이(利)가 부진하다는 문제들이 있을 때 ‘이런 공부를 하면서 내가 어떻게 이익을 취할 수 있을까?’ 이러는데 진짜로 믿는다면, 오든지 가든지 그런 걸 상관 안 하고 거기다가 턱 맡기고 진짜로 내가 한다는 생각 없이 한다면 아무 괴로움이 없어요. 돈이 많이 벌려도 걸림이 없고 돈이 안 벌려도 ‘너만이 할 수 있다.’ 하고 거기다 놓기 때문에 괴로운 게 없어요. 그런데 믿지 못하는 까닭에 자꾸 이 생각 저 생각 지어서 하게 되니 괴로울 수밖에요.
간단히 생각을 하세요. 돈을 수억을 번다 하더라도 걸림이 없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자기 혼자 갖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 번 것도 아니고 자기 혼자 가질 것도 아니고 자기 혼자 쓸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거기 걸립니까? 내가 또 많이 번다고 하는 ‘내가’라는 생각으로 나를 내세우기 때문에 그게 걸리는 거지 한마음 주인공 자리에서 본다면 일체가 다 나 아님이 없는데 구태여 왜 거기 걸립니까?
그러니까 선지식들은 개구리 하나를 죽여도 죽인 사이가 없고, 깨치지 못한 자는 개구리 하나를 죽여도 살생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거는 여러분의 마음을 증득해야 알아져요. 그러니까 자기 주인공을 믿고 일체를 맡겨 놓으면서 지켜보시고 그러세요. 그리고 거기에 걸림이 없어야 됩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욕심을 내서 한다면, 어떤 생각이 일어나도 혼자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십억의 의식들이 한데 모여서 그렇게 생각을 한 거지요.
어떤 분들은 장사를 하거나 회사에 다니거나 또는 회사를 경영하더라도 남과 같이 돈을 벌어야 살 수 있고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는데 다 놓고 어떻게 돈을 벌어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느냐고 생각하시지만, 한번 뒤바꿔서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절에 걸어오실 때에 그냥 서서 걸어오라는 게 아니거든요. 걸어오긴 했는데 발자취를 하나도 짊어지고 온 게 없죠? 생각해 보세요. 돈벌이하지 말라는 게 아니잖아요. 여러분이 발자취를 걸머지고 다니십니까? 걸어오긴 틀림없이 걸어왔는데 걸어온 사이가 없다는 거죠. 내가 짊어지고 온 게 아니니까요.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있는데, 우리가 걸어온 거와 똑같아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하되 자기가 했단 말 하지 마라, 자기가 했다고 생각하지 마라, 모두가 공용으로 했다고 생각하라 이겁니다. 주인공에서 모든 것을 공용으로 한 것이지 자기 개별적으로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동시에 우리가 걸음을 걸어왔는데, 한 발 떼어 놓고 한 발 떼어 놓고 걸어오긴 했는데 걸어온 자취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도 혼자 걸은 게 아닙니다. 여럿이 작용을 해 주기 때문에 여러분이 걸어왔지 아마 몸속에서 위 공장 하나만 그냥 파워가 일어나도 다리도 떼어 놓지 못하고 걸어오지도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몸만 놓고 보더라도 혼자 뭘 했다는 게 없는데 하물며 가정이나 직장에서야 말해서 뭐합니까? 세상 돌아가는 걸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공심으로 공생하고 공용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같이 한 거다 이거죠. 어떤 걸 하더라도 내가 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거기엔 걸림이 없습니다. 그게 참 묘하죠. 말로는 할 수 없는 묘한 도리입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서 열심히 한번 해 보세요.
문
삼합에 대해서
『한마음 요전』에 보면 삼합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영원한 생명의 불씨와 육신과 마음’, 그리고 “내가 들어가고 나온 자리를 모르고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는 소와 달구지, 달구지를 탄 사람의 비유와 흡사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깐 소와 달구지와 마부 삼합을 비유를 하셨습니다. 소와 달구지, 달구지와 달구지를 탄 사람, 달구지를 탄 사람과 소 이 모두를 한 생명으로 묶어 보아야 옳은 것인지 가르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불씨는 우리 원소의 에너지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불씨는 마음을 내게 할 수 있는 활동력이 있죠.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쳐지면 불이 들어오듯이, 그렇게 불이 들어올 수 있게끔 하는 바탕이 바로 원소 자체의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를 불씨라고 합시다. 불씨가 없으면 마음을 낼 수 없고 마음을 낼 수 없다면 육체가 움죽거리지 않는데, 어떻게 할 겁니까? 삼합이 동일하게 하나가 돼서 지금 움죽거리고 말을 하고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바로 소를 타고 피리를 분다 이 소리와 똑같습니다. 지금 소를 타고 달구지를 끌고 다닙니다. 즉 말하자면 마부는 마음이요, 육신은 달구지요, 소는 자기의 주인공, 바로 자기 조상입니다. 과거에 살던 자기, 현실에 사는 자기는 달구지요, 과거에 살던 자기는 바로 소입니다. 그렇게 비유한 겁니다. 그래서 마부는 그 소를 쳐야지 달구지를 잘 끌고 가지 않느냐. 달구지에다가 모든 걸 다 실었는데 어떻게 달구지를 치느냐? 지금 기복으로 나가는 게 달구지를 치는 법이요, 바로 지금 마음법을 가르치는 게 소를 치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삼합이 같이 동일하게 움죽거리고 가는 것을 바로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인공, ‘나’이면서도 내가 공(空)해서 쉴 사이 없이 돌아가면서 화해서 돌아간다, 이런 뜻으로써 주인공이란 얘기죠. 그러니까 소는 과거 자기, 달구지는 현실 자기, 마부는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으로써 그냥 무조건, 달구지가 깨지든지 말든지 그냥 치는 마음이냐, 잘 다스려서 잘 이끌어 가는 지혜로운 다스림이냐 이거죠. 마부는 마음이니 마음으로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달구지를 치느냐 소를 치느냐 하는 겁니다, 이 마음이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 그렇게 바깥으로 빌어야겠습니까? “네 뿌리가 네 나무를 돕지 어느 누구가 돕겠느냐.” 하고 안으로 해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바깥으로 지금 찾아야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안으로 찾는 건 제 뿌리를 제가 찾는 것이요, 바깥으로 찾는 거는 남의 뿌리의 이름을 부르는 거와 똑같죠.
그러니까 안을 치느냐, 바깥을 치느냐에 달려 있죠. 바깥으로, 달구지를 치면 절대로 안 갑니다. 소가 가질 않죠. 그러니까 소를 쳐야 달구지를 끌고 가죠. 그와 같이 우리가 지금 안의 소를 쳐야 바로 소가 작용을 하고 작용을 하니까 제도가 되죠. 작용을 하니까 일체가 다 제도가 된다는 게 뭐냐 하면, 그것이 그대로 통신이 되면 어느 한 부분에만 통신이 되는 게 아닙니다. 안을 치면 누진으로 통신이 돼 가지고 사대로 통신이 되는데, 그게 신호입니다. 그러니까 안을 치면 바로 사대, 즉 말하자면 세계로 친다면 세계가 다 통신이 되는 거와 똑같죠. 이 몸뚱이 세포 하나하나에까지도 통신이 되니까요.
그렇게 통신이 되면 어떻고 어떤 건가를 전부 다 알게 돼요. 통신을 안 하면 모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제도가 되질 않아요. 그런데 거기 통신이 돼서 다 알고 자꾸자꾸 내 마음이 둘이 아니게 돌아가다 보면 둘이 아니게 부처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제도가 돼서 ‘위로는 일체가 둘이 아닌 줄 알고, 아래로는 둘이 아닌 도리로 제도해서 자꾸 안을 치면 그 소가 달구지를 끌고 작용을 한다. 그래서 제도가 된다.’ 그래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니라. 위로는 부처를 모시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느니라.’ 이런 겁니다.
문
어떻게 나를 찾아서 벗어나는지?
스님께서는 우리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나 자신이 수행을 통해 스스로를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어떤 인과 관계에 의해서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나와 내 가정, 나와 내 사회와의 상호 연관적으로 생활이 연계돼 있어서 나는 벗어나고자 하더라도 내 주위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그때는 제가 어떻게 나를 찾아서 벗어나야 되는 건지요.
답
불교를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나 사는 생명들은 인과관계에 의해서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은 금끼리 모이고 깡통은 깡통끼리 모여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깡통끼리 만나서 살고 있다면 서로 말만 해도 소리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당신만이 당신을 알지 딴 사람 제삼자는 모릅니다. 그러니깐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지 말고 스스로 벗어나려고 노력을 하세요. 누구나 제각기 자기 근본을 다 가지고 있어요. 다 가지고 있는 거니깐 없다 있다 이런 투정 할 필요도 없이 나부터 금이 돼 가면 주위 사람들도 서서히 나를 닮아 가게 돼 있으니까 말로 하지 말고 마음으로 자꾸 관하면서 무르익어가 보세요.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신도 집에서 며느리가 피가 멎질 않아 죽게 됐다고 시어머니가 전화를 했습니다. 병원엘 갔는데도 영 멈추질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냐고, 알았다고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해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긴 전화도 없다고 그랬죠. 그랬는데 사흘 됐나? 피가 멎고 정신이 들었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감사하다고 하면서요.
그러니깐 그게 뭡니까. 아무도 모르지만 부처님의 뜻은 항상 화하는 겁니다. 그대로 계신 게 아니라 항상 화해서 이걸로도 화하고 저걸로도 화하고 그러니깐 어떻게 여기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여기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생각에 따라서 자꾸 화해서 변해야만이 나나 상대에게 필요한 거를 주고 또 어떠한 모습으로 해야만 그 사람한테 필요한가를 봐서 응해 주는 겁니다. 모두 찰나찰나 바뀌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모습이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자기도 있는 겁니다. 그게 없는 게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그건 둘이 아니다라는 얘기죠. 모습과 자기 과거 불성은 둘이 아니다 이런 말이죠. 그런데 여러분은 항상 둘로 보는 겁니다. 둘로 보기보다도 둘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냥 가는 분들도 많이 계시죠.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가 다 결국에는 자기가 있습니다. 자기가 있어서 보이는 모습은 그 참자기를 믿고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꼭 자기를 믿고 살아야 됩니다. 자기를 믿지 않으면 무엇을 결정지을 수도 없고, 뭐 되는 건지 안되는 건지도 모르고 살게 됩니다. 꼭 반드시 진짜 자기를 믿고 일체를 나온 거기에다 돌려놓는다면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지금 이 육신 껍질은 없어지지만 자기 근본은 남아서 또 새 옷을 입고 재생을 해서 다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일체를 거기다 맡기고 편하게 사세요. 그리고 내가 변해야 상대도 변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부터 알고 나부터 믿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