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화살처럼 빠르다. 또 연말정산을 할 때다. 해가 바뀔 때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고 의지를 다진다.
올 한 해 대한민국은 소시민의 어려운 살림살이, 청년 실업 등 ‘이곳의 작은 정의’가 아니라, 국보법 폐지, 과거사 규명, 사학 민주화 등 자고 새도록 ‘저곳의 큰 정의’를 위한 싸움에만 매진하였다.
시부모 모시는 논쟁에서 모든 남편은 모든 아내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듯이, 혹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보검(寶劍)을 지닌 생명·의료윤리학자는 복제기술자보다 언제나 유리한 논쟁의 입지점을 가지듯이, 지난 한 해 우리는 공정성, 민주, 진보, 개혁이라는 고상한 이름의 ‘저 크고 강한 로고스’에 짓눌리며 살아왔다. 압도적인 다수이면서도 헤겔 풍으로 ‘현실적인 것은 정의이고, 정의로운 것은 현실’이라고 항변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정치는 현실이기에, ‘현실 정치’는 사실을 지향해야 하지만, 우리의 ‘정치 현실’은 일년 내내 꿈을 지향해 왔다. 저러한 소수의 유토피아적 정의론자들 앞에 서면 우리는 늘 타협에 익숙한 비겁한 현실주의자로 한없이 작아진다.
대의(大義)와 소견(小見)의 갈등을 정면 돌파하기보다는 소극적인 회피 전략을 쓴다는 점에서 나는 비겁한 현실주의자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는 소견으로 사는 현명한 길임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돌아보는 삶은 아름답지 않다’는 원칙이 필요하다. 이 원칙에 근거하여 동문회를 비롯한 일년을 회고하는 각종 송년 모임에 나가지 말자. 왜 안 오느냐고 물으면, 1년이든 10년이든 인생 전부든 한 게 없어 차마 부끄러워서 못가겠다는 공식적인 불참이유를 대면 된다.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후회도 반성도 필요 없고, 긍정과 부정을 넘어 가치중립적인 연말정산을 할 수 있으며, 한 번의 판단 착오가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오직 그 순간에만 유효한 판단만 하기 때문에, 의사결정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의 시처럼, 바람보다 먼저 판단하고, 바람보다 먼저 결정하는 이런 원칙은 결정과 판단의 오류가능성을 누구보다도 많이 짊어져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다. 오류가능성이 큰 결정은 타인보다는 자신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이 원칙은 자기 파괴적이라 비판할 것이다. 그래서 ‘남보다 먼저 포기하라’는 제1 보충 원칙이 필요하다.
이는 매사에 ‘지는 게임’을 하자는 것인데, 처절한 생존 게임에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태도만큼 든든한 배후는 없다. 그것은 수없는 ‘패배’를 통해 확인된 철저한 경험법칙이다.
이로부터 ‘인생을 계획하지 마라’는 제2 보충원칙이 나온다. 모든 인생계획은 자유를 제한하지 않고는 수립할 수 없다. 계획을 세우는 순간 우리는 이미 계획의 노예가 된다. 그래서 나는 삶을 자신의 계획 하에 둘 수 있다고 믿거나,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것은 내가 신념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깨달아서가 아니라, 뜻을 세우기에는 자신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대원칙과 두 개의 보충 원칙은 종도 다양하지 않고 개체수도 적은, 그러나 고고한 1급수 어종에 해당하는 유토피아적 정의론자들의 눈엔 타락한 기회주의자, 무책임한 쾌락주의자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붕어처럼 3급수 탁류에서 행복해지고 싶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희망의 원리’일지도 모른다. 이 원칙으로 연말 정산을 하면, 내년 1월에는 ‘찰나적이고, 아슬아슬한 임기응변이 주는 즐거움’을 추가로 환급받을 것이다.
※小見 한자는 필자가 의도적으로 왜곡시킨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