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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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묘희 스님
가난한 이들과 늘 함께

경기도 화성의 자제공덕회 ‘묘희원’ 찾았을 때 묘희 스님(69)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기자를 맞았다. 1980년대 말 누구보다 먼저 불교계 노인복지현장에 뛰어들었던 스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운 모습이었다. 아무런 말씀 없이 환한 미소로 기자를 반긴 스님은 2차례 수술을 받았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아 안정을 취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묘희 스님은 1936년 경북 점촌역 부근에서 시계방을 운영하시던 아버지 이춘식 거사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불심 깊은 부모님이 기차시간을 놓친 인근 봉암사, 김용사, 대성사 스님들을 집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아 스님도 자연스럽게 불연을 맺었다. 이무렵 성철 청담 향곡 스님 등 당대의 젊은 선지식들도 묘희 스님의 속가에서 신세를 진 일이 흔했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스님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14살 어린나이로 윤필암의 월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51년 자운 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이듬해에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스님의 부모도 속가집을 모두 정리하고 두 분이 각기 다른 곳에서 출가해 온 집안이 불문에 귀의했다.
동학사 강원 시절 스님은 한국전쟁 와중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보면서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큰 서원을 세웠다.
74년 신림동 약수암 주지를 맡으면서 중앙승가대에서 3년간 학감으로 재직했다. 83년부터 10년 동안 사당동 시립유아원을 운영하면서 전국비구니회에서 소임을 맡기도 했다. 한창 왕성한 활동력을 자랑하면서 조계종 제8대 중앙종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스님이 본격적인 사회복지사업에 뛰어든 계기는 86년 대만 자재공덕회의 쳉엔(證嚴) 스님을 만나면서 부터다. 묘희 스님은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가지고 있던 이상을 먼저 실천에 옮긴 쳉엔 스님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89년 경기도 화성에 지금의 부지를 매입해 이듬해 한국 불교 자제공덕회를 설립했다.
자제정사는 91년 ‘노후수도도량’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이곳은 단순수용시설이 아니라 스님들과 할머니들이 함께 수행하는 ‘도반’처럼 살아가는 곳이다. “자비는 봉사가 아니며 이름이 나기를 바라서도 안된다”는 묘희 스님의 평소 말씀대로 모든 구성원이 수행과 생활을 병행하며 살아간다. 가난한 살림을 나누고 도우면서 꾸준히 성장해 지금은 80명이 넘는 할머니들과 스님들이 생활한다.
자제정사가 안팎으로 알려지면서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어르신들을 감당하기 위해 불사가 계속됐다. 그러나 가난한 노인들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스님은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에 소홀했다. 일생을 포교와 사회봉사에 헌신하다가 건강을 잃은 스님은 <법화경>에 의지해 기도에 매진하고 있다. 이제 스님을 바라보는 많은 이들은 “묘희 스님은 이제 부처님의 마음을 닮아 가고 있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화성=조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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