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한 모습(蘊)으로서의 생명체는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생명체가 머무르지 않는 열림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곧 관계(關係) 그 자체임을 말하고 있다. 관계란 이것이 있음에 저것이 있음이요,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음이다.
현대 생명과학은 지금까지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오온(五蘊)을 해체해 각 구성인자를 찾아가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 결과 유전자 지도가 나오고 단백체공학이 나타났으며 생명체복제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제 되돌아보면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발전하는 현대 생명과학에서 더욱 요구되는 것은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인자에 대한 지식이나 이들에 대한 조작이 아니라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균형잡힌 관계에 대한 지식이며 이러한 관계의 복원, 그리고 이를 위한 전체적인 연구 방향의 정립이다. 즉, 지금까지 우리가 생명과학이란 이름으로 해체해 온 관계의 복원과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
한편, 불교는 생사(生死)를 뛰어넘는 깨달음을 말한다. 허나 깨달은 자가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불가에서는 불이(不二)라는 말이 있듯이 생과 사가 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생(生)을 그리 열심히 추구하는 생명과학과 불가의 연결점은 어디일까?
생명과학이 지금처럼 생명체의 소멸이라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살아있는 상태에 대한 집착을 만족시키는 수단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 불교가 지향하는 고(苦)의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고란 열린 관계가 머물러 닫히며 억압될 때 생겨난다. 따라서 생명과학이 관계에 바탕을 두어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은 생명과학의 바닥에 깔려 있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전환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결국 우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죽음과 삶과 고통에 대한 인식전환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인식이 이 세상은 살아있어 항상 열려 있는 관계 그 자체이라는 것으로 철저히 바뀌어야 한다. 이미 이 세상(생명)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식의 전환을 통한 열림에 대한 자각이란 그 무엇도 절대화 시키거나 이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멀리해야 함을 뜻한다. 주위에서 종종 깨달음이라고 말하면서 승속을 막론하고 어려운 말로 열심히 이야기하는 이들을 본다. 그것은 닫힘이다. 깨달음이 체화(體化)되어 우리의 삶이 펼쳐지고 있는 일상의 언어로 나타나지 못한다면 그 깨달음은 머물러 닫혀 죽은 것이 된다. 선종(禪宗)의 위대함은 일상(日常)의 재발견을 통해 불교를 재발견한 것에 있다. 그렇기에 밥 먹고 잠자며, 생로병사가 있는 이 일상의 삶은 버려야 할 화택(火宅)이 아니라 생명체의 천진(天眞)한 모습이니 생명과학은 이를 위해 있을 뿐이고, 그렇기에 불교를 통한 생명과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조건 죽음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를 중생수순(衆生隨順)으로 열려있게 하여 진정 자유롭고 평화로운 존재가 되게 하는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