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의 상판은 꼭 돼지처럼 생겼소이다
진실은 하나인데, 관련된 사람의 ‘증언’들은 서로 다릅니다. 달라도 너무나 다릅니다. 사람들은 이 점이 범죄라는 특수한 사태와 관련된, 특수한 사람들의 악의적 ‘사기’와 ‘기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이 사태는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실상을 아는 것이 깨달음의 시작이고 반야의 출발입니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농담 한 자락
저번 강의에서 불교 유식에 삼성(三性)이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인간이 대상을 바라보는 세 가지 방식’, 그 가운데 첫머리가, 바로 변계소집(邊計所執)입니다.
“제 멋대로 생각하고, 그것을 고집한다(妄計因成執)”는 뜻입니다. 그 결과는 새끼줄을 보고 뱀이라고 여기는 데까지 이릅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대학시절 어느 산사에서, 한 밤중에 달이 너무 밝아 폭포로 향한 오솔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길 한 중간에 호랑이 한 마리가 떡 버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공포와 긴장은 강렬하게 내 몸을 훑고 지나갔고, 잠시 지나자 그것이 달빛을 등에 진 바위의 형상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돌을 호랑이라고 착각한 것은 바라보는 사람 내부에 있는 공포와 긴장감 탓입니다.
공포의 바닥에는 욕망이 있습니다. 자기 보존의 뿌리 깊은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공포나 두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겠지요. 이 공포와 욕망은 거의 무의식적 수준에서 사태를 판단하고, 사람을 평가하는 메커니즘을 작동시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든 분별(分別, vikalpa)은 결국, 자신의 관심의 투사(project)일 뿐입니다. 그러니, 객관적일 수가 없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이처럼 자기 관심에 의해 왜곡되고 굴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왈,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것입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왕사 무학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날 딱딱한 신하들과의 격식과 공식 사무에 지루해 하던 절대권력 이성계가 무학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대사, 우리끼린데 너무 딱딱하게 하지 말고, 오늘은 농이나 한번 합시다.” “좋지요.” “누구부터 할까요?” “전하부터 하시지요.” “그러지요. 그럼 나부터 시작합니다. 대사의 상판은 꼭 돼지처럼 생겼소이다.” “그런가요. 전하의 용안은 부처님 같으십니다.” 농담을 하자는데, 무학이 정색으로 자신을 찬양하자, 이성계는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어허, 대사. 농담하는 시간이라니깐.” “전하,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이옵니다.” 이성계는 이 한 방에 껄껄 웃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러나 농담이 아니고, 인간의 근본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진담 중의 진담입니다. 저는 대개 사람들이 상대방에 대해 하는 말이, 결국 ‘그 사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칭찬하고 욕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거의 틀림없습니다. 비판이 각박한 사람들, 입을 열면 남의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대체로 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남의 잘못에 관대하고, 혹시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돌아보는 사람들은 대체로 선량합니다.
이렇게 ‘자기 관심’의 뿌리는 너무 완강하고, 그 ‘자기 방어’의 추진력 또한 너무 강력해서, 웬만해서는 이 폭풍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작용은 대부분 자신도 모르게 은밀하게 행해집니다. 때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자기기만이나 정당화로 문제의 실상을 덮고 왜곡하기 일쑤입니다. 이 사태를 보다 분명히 알고 싶은 사람은 이를테면, 니이체의 <차라투스트라>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책들은 환상 없이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데 큰 깨우침을 줄 것입니다.
사건에 늘 개입하는 자기기만과 정당화
‘라쇼오몽’ 또한 그 기만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사건에 개입한 사람들이 어떻게 남과 나를 ‘기만’하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는지, 세부 곡절을 좀 더듬어볼까요. 저는 이렇게 분석합니다.
산적: 강간이 우연적이었고, 살해는 정당방위였다고 말합니다. 1) 산들바람이 부는 바람에 내가 눈을 떴고, 거기서 모든 사태가 시작되었다. 2) 또 여자가 나를 불끈 끌어당겼다. 여자가 좋다는 데야 어쩔 것인가. 3) 싸움도 여자가 제안한 것이므로 내 책임이 아니고 4) 죽인 것도 결투에서의 정당방위였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하면, 나는 죄가 없거나, 있더라도 아주 조금 있다.
아내: 겁탈이 불가항력이었다고 말합니다. 1) 그런데도 남편은 나를 차갑게 조롱하며, 증오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2) 나는 남편의 칼에 죽으려고 했지만, 실신해버려 그 기회를 놓쳤다. 3) 다시 깨서 남편의 죽음을 확인하고 따라 죽으려 했지만, 시도는 실패했다. 요컨대, 나는 지금 살아남았지만 내 뜻은 아니고, 나는 남편을 위한 정절을 훌륭하게 지켜낸 열녀이다.
사무라이 남편: 그는 자신의 비겁한 태도와 불명예스런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1) 아내가 산적에게 나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2) 나는 그 뻔뻔스럽고 냉혹한 배신감에 치를 떨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 사람 모두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다들 꼭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지 않습니까. 산 사람들은 그렇다고 쳐도, 이제는 죽어 귀신이 된 사무라이마저, 무당의 입을 빌어 자신의 거짓, 혹은 환상을 진실인 양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관찰자로서의 나무꾼에게 기대를 걸어보지만, 그 역시 현장에서 여인의 단검을 주워 주머니에 슬쩍함으로써 객관성을 허물어뜨리고 맙니다.
주관적 환상(幻妄)을 넘어 객관적 사실(實際)을 향하여
오직 승려만이 이 사태의 진실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사태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은 空, 즉 ‘비어있기’ 때문에 진정 객관적일 수 있습니다. 공(空)이란 ‘자기 이해와 관심’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합니다!
공(空)이 무아(無我)와 동의어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이 참에 말인데, 제발 공을 설하면서 물리학에서 말하는 아원자 세계의 내부 공간의 휑한 공간 운운하는 논법은 삼가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말씀은 불교의 적절한 이해를 심각하게 그르칩니다.
불교가 공(空)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객관적 세계(法界)는 ‘거기 그렇게(眞如, 혹은 如如)’ 역력(歷歷)하게 존재합니다.
불교는 다만 그것이 ‘자아의 투사로 물든(染) 주관적 세계(我相)’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할 뿐입니다. 이 구분을 절대로 놓아서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