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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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그대로가 참선
어느 것 하나를 봐도 내 스승 아님이 없어

지난번에 다섯 가지 마음의 향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그것이 제일 첫번째 목적이기 때문에 한 번 더 말씀해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해탈할 수 있는 수행 자체가 바로 그 길을 들어서는 것이거든요.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까지 다섯 가지 목표를 세운 겁니다. 여러분이 예불 모실 때도 항상 독송하고 계십니다만, 하면서도 그저 입으로만 염(念)하면 되는 줄 알고 그냥 지나치시는데 그 말씀을 그대로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서 자기 마음을 발전시켜야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소신껏 개발시켜서 자기의 능력을 창조로까지 이끌고 가야만 자유인의 맛을 볼 수 있을 텐데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아서 한마디 더 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한마디뿐만 아닙니다. 항상 ‘관하라, 관하라’ 해도 그 관하는 도리를 완전히 터득을 못해서 미흡하게 그저 놓았다 꺼냈다, 놓았다 꺼냈다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떤 심부름을 시켜도 믿고 맡기는데 하물며 자기 집합소를 끌고 다니는 참자기를 못 믿어서 놓았다 꺼냈다 하면서 진짜 심부름을 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스님네들도 더 한층 발전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창조력을 기르기 위해서도 그렇고, 살림하는 신도님들도 가만히 틀고 앉아서 하라고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그대로가 참선이니 참선 아닌 게 하나도 없다고 가르치셨는데도 불구하고 실행을 제대로 못해서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한테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의 네 가지 재료가 주어져 있고 그 재료가 충만한 데도 불구하고 재료를 끌어 쓰지 못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다시 짚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들은 열 마디, 백 마디 해줘도 잘 모르는 게 많습니다.
먼저 ‘계향’이니 부처님 법에 누(累)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거사든 보살이든 또는 출가한 스님네들이든 자기 은사에 누가 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얘기죠. 그런가 하면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자기에게 누가 되게 하지 말라는 얘깁니다. 몸뚱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 상대성이 생기고 모든 게 벌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모든 게 내가 이 세상에 나온 탓이죠. 그러기에 내 탓으로 돌려야지 남의 탓으로 돌린다면 아니 되죠. 잘못된 것도 잘된 것도 다 내 탓으로 돌리고 일체를 내 탓으로 돌림으로써 남의 탓을 안하게 됩니다. 남을 원망 안하면 부질없는 미움도 안 생길 거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겠죠. 자기 있는 곳이 바로 도량입니다. 내 깊은 내면 마음속으로, 내 탓으로 돌린다면 부드러운 말이 저절로 나오고, 부드러운 행동이 저절로 나와서 화목을 도모하고, 의리를 도모하고 진짜 사랑을 베풀면서 서로가 서로를 도와가면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잘못되는 것은 내 탓으로 돌리고 한생각에 마음을 잘 내는 것이 바로 계향 아닌 계향입니다.
정향이라고 하는 것은 내면세계에 내 자성 주인공을 세워 놓고 잘못되는 것은 잘되게끔 한생각 돌려서 놓고 믿어야 합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구정물도 그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 속에서 새 물도 나오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든 일체가 다 말입니다. 그렇게 믿고 잘되는 것은 감사하게 놓고, 자기가 좋은 일을 했든지, 좋은 말을 했든지, 좋은 행동을 했든지 감사하게 생각해서 놓고 물러서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정향입니다. 이건 입으로 아무리 말해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물이 차다 뜨겁다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먹어본 사람이나 뜨겁고 찬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먹어보지 않는다면 뜨거운지 찬지 얘기만 들었지 정도를 감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스스로 체험하고 다스리면서 넘어가야 한다 이겁니다.
그리고 혜향이니, 지혜로운 마음으로써 내면세계와 물질세계를 둘로 보지 않으면서 관찰하면서 체험하는 것이 바로 혜향입니다. 둘로 보지 않으면서 듣고 보고 느끼고 체험한다면 해탈이 오는 것입니다.
다음은 해탈향이니, 만물만생이 무명에 묶였음을 풀어서 여여하게 다스려 나가는 것이 바로 해탈향입니다. 집을 지으려면 기초를 튼튼하게 해야 집이 무너지지 않듯이 계향을 아주 철저하게 지키고, 정향을 철저하게 잘해야만이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이 스스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탈지견향이라 했으니, 삼라만상 일체만물 만생이 보살피고 느끼고 항상 밝아서 걸림없이 구족한 것을 이름해서 해탈지견향이라 하는 겁니다. 일체 만법을 내 마음 하나로 인해서 들이고 내고, 들이고 내며 반복하면서 돌아가는 상대성 원리, 살림살이 이 모두를 마음에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자기가 느끼고, 다스리고, 실험하는 것이 바로 지금 시대에 생각하면서 뛰고, 뛰면서 생각하는 마음의 참선…. 이 마음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기여할 수 없고, 발전할 수도 없고, 창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떠나서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할 문제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는다면 지금 이 시대가 과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무명을 쓰고 나오든지 간에 이 세상으로 다시 나올 땐 미래이자 현실입니다. 그래서 삼세에 모든 업을 짓는다면 악한 일을 행한 것이 업보가 돼서 삼독이 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내일이자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교차로를 연방 넘나들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며 가는 사람도 역시 그 삼독을 면치 못한다 이런 소립니다. 삼독을 면치 못하는 원인은 내 마음이 툭 트이지 못해서입니다. 내 마음이 한계성을 느끼고, 살아오면서 관습에 젖어가지고 한치도 나가지 못하는 마음이란 말입니다. 요건 요렇게 해야 되고 조건 조렇게 해야 되고, 어디를 가려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고, 문을 열고 나와야 하고, 물에 들어가면 빠져 죽고, 불에 들어가면 타 죽고, 또 무서운 데에 가면 무서워서 죽고, 귀신에 말리면 무서워서 죽고, 이런 생각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이사를 잘못 가면 안 되고 삼재가 들면 안 되고, 안 되는 게 왜 그렇게 많은지 온통 안 되는 것뿐이죠. 그래서 그 안 되는 업보로 오간지옥고를 받는다 하는 것은 땅끝에서 국 냄새, 밥 냄새도 맡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간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고생해서 살만하면 어려운 일이 생기고, 살만하면 또 복잡한 일이 생기고, 이렇게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지옥이 따로 있습니까, 이 세상이 지옥이지. 지옥도 자기네들이 만들어서 지옥에 살고, 자기네들이 만들어서 승천해서 극락에 살기도 합니다. 삼독을 면하려면 마음의 관습이 떠나야 될텐데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으니 마음이 문제입니다. 자유스럽게 벗어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가지고도 내 마음대로 못하니 이 노릇을 어떡하면 좋습니까.
여러분! 내 마음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못한다면 이것은 노예이지 자유인이 아닙니다. 왜 이 세상에 남들처럼 다 타고나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여러분도 눈 달리고, 부처님도 눈 달리고, 코 달리고 다 똑같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인간인데 왜 자유스럽게 살지 못하고 왜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까. 과감하게 뛰어넘어야죠. 죽으면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입에 밥 들어가지 못할까봐 걱정, 옷 헐벗을까봐 걱정, 거리로 나앉아서 잘까봐 걱정, 죽을까봐 걱정을 하다보니까 과감히 뛰어넘을 수 없는 옹졸한 마음이 돼서 항상 노예로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과감하셔야 됩니다. 마음은 이 자리에 앉아서 그냥 뛰어넘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몸을 두고도 우주 탐사를 할 수도 있고, 이 지구 바깥을 벗어날 수도 있고, 집에도 갔다 올 수 있고, 회사에도 갔다 올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신발 한 짝이 어디 놓여 있는지, 맛있는 음식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못 믿습니까? 그래서 ‘삼독을 제거한다면….’ 하는 소립니다.
아까 계향, 정향, 혜향까지 탁 둘 아니게 관찰하고 체험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해탈은 스스로 오는 것이고, 해탈지견향 역시 스스로 오는 것입니다. 삼독을 제거한다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마음이 한마음으로 나투어 주시는데, 나투어 주시면 몸과 마음이 항상 밝아서 일체 고에 물들지 않고, 번뇌에 물들지 않고, 일체 굴레에서 벗어나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저 언덕이라는 것도 이름해서 언덕이지 우리가 자고 깨고, 자고 깨고 하는 교차로를 언덕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꽃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하는 것도 공즉시색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얘기해서죠. 어렵게 생각을 하지 마세요. 정신계와 물질계, 몸과 정신, 마음이 바로 공ㆍ색입니다.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니라. 꽃이 필 때는 색이요, 꽃이 질 때는 공이니라.’ 하고 표현해도 됩니다. 어디다가 비교해도 연결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팔만대장경입니다. 어떻게 글로 다 쓰리까. 어떻게 말로 다 하리까. 그 세밀하고 아주 묘한 도리는 자기 마음 속에서 스스로 지혜로워질 때 혜향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계향도 정이요, 혜향도 정이다, 그 정(定)을 안다면 해탈향은 물론이거니와 해탈지견향도 그대로 포함되는 겁니다.
‘오신통을 이룬다 하더라도 오신통을 이뤘다 하지 말라. 오신통에서 벗어나야 오신통을 굴릴 수 있느니라’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신통을 구하려고 노력을 하고, 해탈을 구하려고 노력을 하고, 부처를 구하려고 애쓰지만 어리석지 않은 사람들은 해탈을 구하려고 아니하고, 부처를 구하려고 아니해도 저절로 구해진다 이겁니다. 욕심이 앞서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문을 찾아서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옴짝달싹도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구하고, 자기 자신을 구하고, 지혜를 구하고, 진짜 사랑 아닌 사랑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전체가 문이죠. 문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문 찾아 들고 나는 사람들은 소인들이고, 대인은 문이 있으나 없으나, 벽이 있으나 없으나 그대로 통달해서 한 도량이죠. 그래서 마음이야 어찌 한 도량에 넘나들 수 없겠느냐 이겁니다. 마음이야 어찌 걸려서 못 가고 못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네 마음부터 알아야 일체 만물만생의 마음을 알 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 마음을 알아야 응신으로 화해서 여여하게 어떠한 용도든지 나투어 주신다는 겁니다. 한 철 캠핑 왔다가 홀가분하게 목마르면 물마시고,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자고 싶으면 자고, 똥마려우면 똥을 누니 사람 사는 것이 이만하면 족하지 뭣이 따분한 게 있고 뭣이 답답한 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이들은 마음의 노예가 돼 가지고 한발짝도 떼 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누가 사랑을 하지 말랬나요, 돈을 가지고 살지 말랬나요, 좋은 집에 살지 말랬나요. 정도에 넘치면 해(害)가 오니 정도에 넘치지 않게 하라는 것뿐이죠.
재산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관리인일 뿐이고, 몸은 자생중생의 집합소입니다. 그리고 자생중생들이 안에서 심부름을 해줘야 겉에서 건강하게 뛰어다니는데 안에서 심부름을 안 해준다면 몸뚱이가 한 치도 걸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생중생을 먼저 제도하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계향도 올바르게 지켜야 하고, 정향도 지켜야 하고, 혜향도 지켜야 하고, 해탈향도 지켜야 하고, 해탈지견향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지키기는 지키되 물질로 지키지 말라. 내 마음의 향, 다스리는 마음으로…. 그런데 다스리는 마음이 첫째는 화목해야 하고, 성내지 말아야 하고, 남을 탓하지 말아야 하고,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고 푸근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써 행을 해야 하는 것이죠.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린다면 남을 미워할 게 없고, 불안하게 해줄 게 없고, 언짢게 말해줄 게 없고, 탓할 게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모르는 사람, 잘못하는 사람을 봤을 때는 몰랐을 때의 내 모습으로 둘로 보지 않는다면 해탈은 물론이거니와 해탈지견향까지 구족하게 되는 겁니다. 살아서 구족해야지, 죽어서 구족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서 먹은 마음이 죽는다고 달라질까요? 이 모습을 가지고 인간 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생각해보세요. 한번 개구리가 됐다 합시다. 그러면 개구리의 습성이 딱 붙어서 그 습성 떼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개구리의 습성, 뱀의 습성, 개의 습성, 돼지의 습성, 소의 습성 등 갖은 곤충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 천차만별로 돼 있으면서 살아나가는 그 습성을 떼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곤충에서부터 태로 날 때까지 계단 없는 계단에 서려면 얼만큼 거쳐야 되며, 그 습성을 얼만큼 떼야만 인간의 모습을 타고 나겠느냐 이겁니다.
인간의 모습을 타고 나서 정신계의 어버이로서 훌떡 벗어나야 될 텐데 우리가 인간으로 살면서 회사에서 좌천되듯이 좌천이 돼서 되겠습니까? 인간의 모습을 타고 났으면 역시 그 모습이 다해지기 전에 이 도리를 알고 넘어서야죠. 이 모습으로 살다가 만약에 돼지가 됐다 합시다. 돼지같이 살아서 돼지가 됐다면 속으로는 인간의 의식이 있다 할지라도 겉으로는 돼지 모습을 썼으니 돼지 대접밖엔 못 받겠죠. 의식은 사람의 의식이지만 꿀꿀대고 눈물을 흘리니 돼지 대접밖엔 못 받습니다. 이것이 내 앞에 닥치지 않았으니까 ‘뭐가 그래? 죽으면 그만이지.’ 이러고 아주 태평하게 있지만 그렇게 태평해할 게 아닙니다. 이 도리는 무섭고 에누리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컴퓨터에 모든 것을 입력해 놓으면 틀림없다고 하죠. 그러나 더 무서운 컴퓨터는 숙명통으로 인해서 간접적으로 입력되어 있는 마음의 컴퓨터입니다. 자동적으로 자기가 마음먹고, 행동하고, 말하고, 살아나가는 일거일동이 자동적으로 그냥 입력이 되는 것이니 부모의 병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아이구, 지겨워.’ 이런 생각 마시고 ‘아, 이것도 바로 내 탓이로다. 내가 이런 인연을 안 지었더라면 왜 내 앞에 왔을까? 얼마 안 있다가 또 다른 모습으로 나오실 텐데, 그리고 얼마 있다가 난들 안 그러랴.’ 하고 내 모습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공경을 잘 하고 미워하지 않고 지겨워하지 않고 꾸준히, 잘하는 척하지도 말고 못하는 척하지도 말고 그냥 여여하게 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대성공을 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자식들을 기르는 데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모두 살아나가는 데 자식들이나 부모들이나 일체 만물만생이 전부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하다못해 풀뿌리를 봐도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죽을 것 같은데도 묻어 놓으면 살고, 아무리 캐어내도 어디다가 뿌리를 붙이면 살고 그러거든요. 그렇게 생명이 지겹도록 튼튼하게 이어가는 것은 참 처음 봤습니다. 그런 걸 보면서 우리의 인생 근본도 이렇게 영원한 것이 아닌가 하면서 공부하는 거죠. 그러니 어느 것 하나를 봐도 내 스승이 아님이 없는 것이죠.
어제도 그런 말을 했지 않습니까. 일체 삼세 부처님의 마음과 일체 만물만생이 다 스승이 돼 준 까닭에 이렇게 말 한마디라도 할 수 있었고, 행동 하나도 할 수 있었고,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감사함을 어찌 말로 얍삽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는 지금처럼 배불리 먹지 못했을 때여서 겨울에도 누구 말마따나 배는 등에 달라붙고 땀은 뻘뻘 흐르는데, 물 한 모금을 먹으려고 도랑에 가니까 큰 뱀이, 그건 뱀도 아니고 구렁이였던 것 같은데 틀고 앉았는 겁니다. 그러니 웬만하면 기절을 했을 텐데 아주 침착해지는 거예요. 무슨 능력이 있어서 침착했던 게 아니구요. 내 바른대로 얘기하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누구나 다 죽는 건데 그까짓 것 죽는 것이 뭣이 그렇게 어려우냐. 네가 인연이 돼서 나를 물어 죽인다 하더라도 너를 원망 안 한다.’ 그러고서는 보니까 목마르다는 생각이 싹 없어지면서 뭐가 보이느냐 하면,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원이 보이는 겁니다. 원!
원이 보여서 무심코 ‘아, 이 세상은 모가 나지 않고 저렇게 둥글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뱀이 어느 틈에 머리를 번쩍 들고 혓바닥을 낼름낼름 하는데 ‘고개를 들었으니 백(白)이면서 바로 법이로구나. 고개를 일으켰으니 법이고 혓바닥을 내밀었으니 행동 하나하나가 살아 있구나.’ 하는 걸 느꼈단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 짓도 안 하고 가지도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뱀도 오히려 두려웠던지 길게 몸을 끌고 가는 겁니다. 아, 그걸 보면서 ‘원에 모든 진리는 하나로 돌아가는구나’ 하는 걸 또 느꼈습니다. 그러니 모든 매사 하나하나가 스승 아닌 게 어디 있겠습니까. 네? 꼭 말을 해야 스승입니까. 꽃이 피고 지는 것도 스승이요, 밥을 먹고 똥을 싸는 걸 봐도 스승이요, 서로 악다구니처럼 싸움을 하는 것도 스승이고….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감사함을 느낀다면 누구를 원망할 수 있으며, 누구를 증오할 수 있으며, 누구를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을 하면 건방지다고 하겠지만 나는 여러분과 둘이 아닌 마음, 이 세상천지가 다 둘이 아니게 전달을 하고 돌아갑니다. 마음과 마음이 말입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은행나무와 은행나무가 사랑하고, 사과나무와 사과나무가 사랑하고, 진달래나무와 진달래나무가 사랑하고, 싸리나무와 싸리나무가 사랑하는 거 보셨습니까? 사랑 빼놓고 없습니다. 모두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는데도 마음을 너그럽게 굴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자동적인 자유자재권이 있어야 되는데, 곤충들은 자유자재권이 없어서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한테 자기 몸을 다 바쳐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뺐다 끼웠다 하는 지혜에 달려 있는데 그걸 둥굴릴 수가 없고 자유자재할 수 없이 곧이곧대로 사니까 곤충으로밖엔 못 살죠. 어떻습니까.
사람들도 좀더 마음이 탁 트여서 훌떡 넘어가야 합니다. 귀신이 무섭다고 하는데, 사람이 살다 죽은 것이 귀신인데 귀신이 뭣이 그렇게 무섭습니까. 그믐밤에 묘지에 가서 밤을 새우라면 무서워서 쩔쩔 매실 거지만 그것도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 마음을 좀 활짝 여세요. 우리 몸뚱이는 문을 열고 닫고 다니지만 마음은 벽도 소용없고 봇장도 소용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진짜 믿으세요. 왜 믿지 못하고 줬다 뺐었다 줬다 뺐었다 이러십니까. 지혜롭게 믿고 밀고 나가세요.
내가 여러분이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지혜를 넓히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찾아주기 때문에 지혜를 넓혔고, 사랑도 할 줄 알았고, 네 자식 내 자식 따로 없는 것도 알았고, 네 부모 내 부모가 따로 없다는 것도 알았기에 여러분이 정말 저에게는 스승이며 부처이십니다. 그러니 어디 따로 있습니까. 더불어 같이 도반이요, 더불어 같이 가지 않습니까.
이만하고, 공부하시면서 어떠한 체험이라든가 또는 질문하실 거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 질문드리게 된 것을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옛 선사가 이르시기를 “처음에 나였다가 나중에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부처였는데 나중에 내가 되었더라.” 하셨습니다. 제 나름대로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만 스님의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스님: 네. 그래요. 나중에 부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처음에 부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로 그냥 부처입니다. 그대로 부처인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를 구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부처를 구해서 나중에 되는 게 아니라 마음을 구하니까 그대로 부처가 되더라는 얘깁니다. 부처 아닌 부처요, 자유인이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나를 모르고 있다가 나를 찾았다는 겁니다.
▲질문자1: 두번째 질문 드리겠습니다. 스님을 모시고 가르침을 듣는 법회 때마다 저희들 중 몇 사람이 의문 나는 점을 여쭈곤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고 물어서 답을 얻으려 하기 보다는 스스로 의증을 들고 주인공의 답을 들을 때까지 참구해 들어가야 함이 옳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의 이런 생각이 바른 지견인지 가르침 바랍니다.
▲스님: 네. 그것이 바르죠. 그런데 말입니다, 스님네들이나 물론 살림하시는 여러분이나 다 그렇습니다만 스님네들은 모든 것을 다 맡겨 놓고 거기서 답이 나올 때를 지켜보지만 살림하시는 분들은 질문도 해야 합니다. 질문이 아주 없어서도 아니 되고 물어보기만 해도 안 됩니다. 길 가는 요령을 알기 위해서 질문을 하는 것이거든요. 길 가는 요령을 알아서 반드시 맡겨 놓고 가야 된다는 얘깁니다. 길을 알아 가지고 맡겨 놓는 거하고 모르고 그냥 맡겨 놓는 거하곤 다릅니다.
▲질문자1: 세번째 질문, 한 선사가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경계를 인식하는 주체가 남아 있는 한 인식된 모든 것은 속임수다.”라고 하셨습니다. 인식하는 주체가 사라진 경계란 어떤 경지일까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그때는 주인공만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제 나름대로 헤아려 봅니다만 이에 대해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그러니 아까도 얘기했죠. 물맛을 알려면 내가 직접 먹어봐야 안다구요. 정말 뜨거운지, 미지근한 건지, 따뜻한 건지, 찬 건지 먹어본 사람이나 알겠죠. 그러니까 내가 먹어보지 않은 이상에는 모두 거짓말이라는 얘깁니다. 아시겠습니까? 쉽게 말을 하는 겁니다. 말로만 듣고, 책을 보고, 이론적으로만 해나가면 모두 거짓말이 되고 모두 헛되게 됩니다. 그래서 물을 마셔 보고 ‘이 물은 마시니까 시원하더라’ 하고 주는 것이 바로 약사보살이 감로수를 주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먹어보지도 않고 물맛이 어떻겠다 생각하고 그냥 주는 게 아닙니다. 누구든지 나 아님이 없을 때는 바로 내가 물이 되는 겁니다. 물맛을 아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물을 줘도 그때는 아주 맛이 나고 감로수가 되는 거죠.
지혜를 얻으려면 나부터 먼저 알아야 지혜가 늘어가요. 나부터 알아야 해요. 우리 형제 법우님들께서 이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셔야 됩니다. 내 마음이 틔어야 남도 이끌어갈 수 있지 내가 눈을 뜨지 않고, 내가 귀를 열지 않고 남을 이끌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열심히 해서 진짜로 보시해야 합니다. 금 한 덩어릴 주고서 늘려라 그랬더니 그 금이 없어질까봐 늘리지 않았다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거기다 놓고 체험하고 가면서 남들한테 마음공부를 전달해주게 되면 그만큼 공덕이 큰 겁니다. 이건 세세생생에 공덕입니다. 올바로만 관법을 일러준다면 그 또한 공덕이 되겠죠.
한 사람을 이끌면 수십억의 중생들을 이끈 셈이 됩니다. 그건 왜냐하면 집합소 하나를 포교했는데 집합소 안에 들은 중생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 집합소 안에 있는 자생중생들이 전부 화해서 보살로 화했으니 그 얼마나 공덕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옛날 같으면 이런 질문을 하면 주먹을 번쩍 들거나 주장자를 내리치거나 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해가지고 여러분을 이끌어갈 수가 없습니다. 귀띔을 해줘 가면서 이렇게 해야죠.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는 도리를 어찌 알아서 산은 산대로 있고 물은 물대로 있는 도리를 알겠습니까.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67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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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