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에 대한 집착은 행복 주지 못해
물질·정신·시간 다 벗어나야 ‘자유인’
생명체는 존재하는 순간부터 주위에 의존하게 된다. 열역학적으로 볼 때 흩어져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을 거역하며 잠시나마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주위로부터 무언가를 섭취하여 그 에너지 차이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존재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연기적 관계는 결국 소유라는 형태를 통하여 안전한 자신의 존재 유지를 하고자 한다.
생명체가 지닌 이러한 자기 유지에의 끊임없는 욕망은 생존의지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워지지만, 인간은 그 탐욕성에 있어서 매우 독특하다. 사자와 같은 육식동물은 배부르면 옆을 지나가는 사슴이 있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필요한 것을 소유하고도 만족하기 보다는 더욱 소유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경쟁하고 노력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생태계를 파괴하고 팽창하면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인간 문명도 인간이 지닌 이러한 모습의 또 다른 한 면일 뿐이다.
인간이 지닌 탐욕은 끊임없는 생산과 소유를 미덕으로 하는 자본주의 속에서 정당화되면서 인간들은 소유를 위한 삶 속에서 자신들의 탐욕에 갇혀 평생 개미처럼 일하다가 사라져간다.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어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그 속에 빠져 허덕이며 사는 이들에게 행복과 자유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소유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소유의 삶이 될 때 얻어진다는 것을 많은 현인들이 이야기해 왔다.
하지만 무소유의 삶의 완성은 정신적, 물질적 무소유 외에 시간의 무소유로부터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반드시 죽음으로 향해가는 있는 육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있지도 않는 시간을 상정한 후 그것을 소유하고자 함으로서 스스로가 만들어 낸 시간의 노예가 된다.
시간에 대한 소유를 근거로 하여 나타나는 우리들의 삶은 과거, 현재, 미래로 표현되면서, 과거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 삶의 무게로 현재를 힘들어 하며,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은 희망의 무게로 현재를 힘들어 한다. 한편, 현재라는 시간을 소유한 사람들은 지금을 만끽하고 즐기기 위하여 삶을 소진하고 있다. 결국 시간의 무소유란 무엇인가. ‘지금 이 자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살게 되는 것이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대한 소유마저 비워버릴 때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없는 지금 이순간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종종 우리가 말하는 지금 현재를 위해 살라는 말은 여전히 시간을 소유하고 그 속에 갇혀 있는 잘못된 표현인 것이다.
불행히도 인간만이 시간을 탐욕스럽게 소유한다. 특히 서양 근대 문명은 과학이라는 방법을 통해 시간의 소유를 조장해왔다. 현재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생명과학도 잘 들여다보면 우리의 시간 소유량을 증가시키고자 애를 쓰는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진정 대자유인이되고자 한다면 물질과 정신적인 소유 외에 시간을 소유하고자 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