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 하나도 십년 넘게 사용
경·율·론은 물론 모든일 ‘박사’
고산 스님이 오시기 전 쌍계사는 살림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뒤주에는 쌀이 없어 늘 텅 비어 있었고, 요사채는 퇴락할 대로 퇴락해 남루하기 그지 없었다. 신도도 없었다.
그러나 스님이 오시고 부터 도량 곳곳에 변화가 왔다. 요사채를 비롯 모든 전각은 단정하게 정비되었거나 알맞은 크기로 자리잡았고, 신도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남의 손으로 넘어갔던 사찰의 토지도 모두 되찾았다. 버려져 있던 밭들은 스님의 손에 의해서 여름에는 고추와 상추가 가득했고, 가을에는 무와 배추로 넘쳐났다.
고산 스님을 뵈려고 오는 신도들은 낮에는 밭이나 불사 현장에서 스님을 친견할 수 있었다. 스님은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방에 계시지를 않았다. 추운 겨울에도 밖에서 장작을 패는 등 늘 부지런한 스님 모습에 신도들은 더욱 더 신명이 났다.
한번은 스님이 방 횃대에 걸려있는 수건을 가리키며 “십 년째 사용한 것”이라고 지나가듯 말씀 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시줏물과 신도들의 공양물을 대하는 스님의 사고방식과 그 근검절약하는 생활이 얼마나 생활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고산 스님은 경, 율, 논에도 해박하지만 농사일이나 원예에도 ‘박사’ 소리를 들을 정도로 능통하니 스님의 상좌들은 은사스님 앞에만 서면 저절로 경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도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스님이 부처님일은 말할 것도 없고, 농사, 원예, 목공일까지도 막힘이 없으니 그저 자랑스러워 할 뿐이다. 내가 옆에서 지켜본 고산 스님의 하루는 1년 365일이 한결같았다.
고산 스님은 당대의 대 강백 고봉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고, 부산 내원정사 창건주인 석암 노스님으로부터 계맥을 이었다. 쌍계사에서는 보살계를 설해서 많은 불자들에게 법의 진수를 맛보게 하고 있다. 스님이 가시는 곳마다 신도들이 넘쳐 나고, 하시는 불사마다 성황을 이룬다.
부산 연산동의 혜원정사와 부천 원미동의 석왕사는 고산 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당시만 해도 사찰의 창건은 인연 따라 짓는 것이 스님들의 일반적인 사고였다. 하지만 스님께서는 부산시청이 동래로 옮겨온다는 것을 알고 혜원정사의 부지를 매입하였고, 석왕사는 부천이 인천과 서울의 최대 배후도시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30년이 지난 지금의 혜원정사와 석왕사의 사세(寺勢)는 도심 포교당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혜원정사가 위치한 인근의 연산동 로타리에 부산시청이 옮겨와서 부산의 중심지가 되었고, 석왕사는 창건당시에는 한적한 산밑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수도권의 비약적인 팽창으로 부천의 불교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부산 혜원정사 법당 불사 때 나는 스님 옆방에 기거하면서 심부름을 했다. 스님은 새벽예불이 끝나면 저녁 공양 때까지 인부들과 함께 일을 했다. 스님과 함께 일하다 보면 너무나 강도 높게 일을 하기 때문에 반드시 사흘 안에 코피를 쏟게 되어 있다. 나도 사흘만에 코피를 쏟았다.
고산 스님은 평생동안 기도와 불사로 일관해 왔기에 어느 정도 사람에게 일을 시켜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금새 읽어내신다. 마주앉아서 스님의 눈과 마주치고 있으면 그 형형한 눈빛이 내 속을 훤하게 꿰뚫는 것 같아서 저절로 가슴이 움추러 든다. 또한 스님은 이야기도 청산유수로 잘 하신다. 곁에서 일하면서 스님말씀을 듣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을 모르게 된다. 스님은 사람을 끌어모으는 탁월한 매력이 있다. 그것은 물론 당신이 부처님 가르침을 청정하게 실천하는데 기인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는 서울 강남지역에서 아파트나 주택단지의 종교부지를 확보하여 오늘날의 급성장을 이뤄냈다. 그것은 정부의 정책을 계획이나 입안단계서부터 접근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설정이 매우 중요하다. 정보도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도시개발의 산물인 종교부지를 타종교가 독식하고 대도시의 전도활동에 역동적인 힘을 쏟아부을 때 불교는 오히려 도심의 한 축인 봉은사의 그 광활한 땅을 헐값에 매각할 정도로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당시 불교의 지도자급 스님들이 도심포교의 중요성에 제대로 눈뜨지 못하고 있었을 때 고산 스님은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고 철저한 수행과 앞서가는 안목으로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에 불교가 동력의 축이 되게 한 것이다. 이렇게 스님의 탁월한 안목과 견고한 수행력에는 늘 고개가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