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스님(1)

고산 스님께서 쌍계사 주지 소임을 맡은 것이 70년대 중반인 듯싶다. 그 때만 해도 농촌지역의 사찰이나 암자에서는 소외된 이웃을 배려하는 사회활동이나 신행활동은 거의 없었다. 법회는 신년 초나, 사월 초파일에 하고 일년에 한 두 번만 절에 가면 부처님께서 우리 가정을 잘 돌봐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쌍계사는 구례에서 가는 것이 하동보다 더 가깝다. 나는 고산 스님이 쌍계사에 오시기 전에는 광주 향림사를 다녔다. 향림사는 천운 스님이 계신 곳이다. 고산 스님과 천운 스님은 도반이기도 하지만 두 분 모두 포교 역량을 마음껏 펼쳐 포교에 큰 획을 그은 분들이기도 하다. 천운 스님은 오두막에서 오갈데 없는 고아들을 보살피면서 도심포교를 해나가셨고, 고산 스님은 해박한 교학과 근면을 바탕으로 부처님말씀을 실천으로 옮기셨다.
고산 스님이 쌍계사로 오신 이후부터는 큰스님을 모시고 여법한 법회를 볼 수 있으니 구례지역의 불자들이 쌍계사로 몰리게 되었다. 산골이나 농촌의 불자들은 쌍계사 보살계 법회 때 서울이나 부산에서 온 불자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이렇게 큰 법회를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큰스님과 함께하는 발우공양과 금당에서의 철야정진 등은 신심을 크게 돋우는 계기가 되었다.
시골의 불자들에게 고산 스님의 존재는 대단한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구례에 쌍계사 신도회가 조직되었고 회장소임을 나의 속가 모친이 맡게 되었다. 당시 나는 대학에 가기 위해 서울 정릉 봉국사에서 학원을 다니면서 재수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큰스님과 나의 모친이 이야기 도중에 내 문제가 거론되어 나는 영문도 모르고 큰스님을 친견하게 되었다. 삼배를 드리고 나자 스님께서 “너, 내 상좌 해 볼 생각 없느냐?” 하셨다. 내가 기죽은 소리로 “스님, 저는 대학을 가려고 절에서 공부하고 있는데요.” 대답했다. 그러나 스님은 내가 봉국사에서 출가하기 위해서 있는 줄로 알고 계신 듯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큰스님과 유발상좌로 인연을 맺었다. 열 살도 되지 않은 막내 동생은 이미 큰스님의 유발상좌였다. 막내 동생이 유발상좌가 된 내력이 특이하다.
속가 모친과 막내 동생이 큰스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삼배를 드리는데, 여섯 살도 채 안된 꼬마가 절을 하다말고 큰스님 품속으로 뛰어들어 가슴에 착 안기고는 서럽게 울면서 이제 집에 안가고 큰스님과 함께 절에서 살겠다고 했다. 그러는 꼬마를 가만히 내려다 본 큰스님이 꼬마 하는 말이 기특하고,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해서 꼬마의 원대로 해줬다. 너는 나와 전생에 지중한 인연이 있다. 하지만 절에서 생활하기에는 너무 어리니 고등학교만 마치고 오면 그때 머리를 깎아주겠다는 말에 꼬마의 얼굴이 풀어지더라는 것이 나중에 모친의 얘기다. 그 바람에 큰스님과 나와의 인연도 맺어지고 모든 가족들이 큰스님 법력의 외호를 입고 모두 부처님말씀을 따르는 신행생활에 충실하며 건강하게 사회생활도 하고 또 가족 중에 세 사람이나 출가를 하게 되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쌍계사에서 방학을 보냈다. 그리고 스님을 모시고 여기저기 다녔는데, 스님 옆에만 있어도 마음이 아주 편했다. 난 그게 무척이나 궁금했다. 친부모로부터도 느끼지 못했던 묘한 편안함이었다. 다른 스님 곁에도 가서 앉아 보고 해도 고산 스님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스님은 여행이 아무리 고되고, 일이 많아서 늦게 주무셔도 새벽 예불은 빠뜨리지 않으신다. 몸이 편찮으셔도 그랬고 백팔배도 빠뜨리는 법이 없다. 그리고 예불 시작 전까지 좌정해 계시는 모습은 말 그대로 거룩하고 청정하기 그지 없어, 나는 스님의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스님의 뒤에서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스님은 절이 불사중일 때는 잠시도 쉬지 않고 인부들과 함께 일하신다. 들어서 신심 나고 재밌는 이야기에 귀기울이다 보면 힘들던 일도 어느새 끝이 보이게 마련이다. 나무와 채소 가꾸는 일도 손수 하신다. 하루는 신도가 개업하는 병원의 안택 의식에 <금강경>을 암송하는데, 스님의 총기에 주눅이 저절로 들었다. 음식도 잘 만드시고, 집도 잘 짓고… 아무튼 나의 좁은 소견으로도 고산 큰스님은 수행자로는 한마디로 ‘딱’ 이다.
행자생활만 7년을 하시면서 외워야 할 것들은 그때 모조리 다 외우고, 스님으로 배워야할 것도 다 배웠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무채 써는 시범을 보이는데, 채공보살이 저절로 주눅이 들 정도다. 참으로 다재다능하시다. 그러다보니 스님은 상좌가 굼뜨거나 똑바르지 못하면 불호령을 내리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