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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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각림 스님
목숨 내걸고 정진 또 정진

“신도들에게는 관음주력도 시키고 절 수행도 하라 하는데 그래도 내게는 선이 첫째라. 선수행은 앉으나 서나, 죽으나 사나 해야 하는 것. 이생에 다 못하면 내생에서라도 해야 할 출가자의 사명이오.”
각림 스님(사진)은 1999년 상좌 혜욱 스님에게 봉덕사 도량을 맡기고 다른 상좌와 함께 하안거를 나러 서울 승가사선원으로 향했다. 세수 57세 이상은 받아 주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고 우겨서 들어갔다. 비장함 그 자체였다.
“그때는 참선하다 죽어야겠다 했지. 아무도 못 말려. 그러고는 해제를 하고 나왔어.” 그렇게 첫 번째 한 철은 별 탈 없이 마쳤다. “겨울에 다시 수덕사 견성암으로 방부를 들였는데 그만 한 달 만에 탈이 났지 뭐야. 병이 나서 그냥 나왔지.”
노구를 돌보지 않는 무리한 정진 탓인지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다. 그런 스님을 상좌들이 다시 봉덕사로 모셔왔다. 혜욱 스님은 “정말 가시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때가 스님의 세수 77세이던 해였다. 평소 늘 77살까지만 살면 이생의 연은 끝내리라던 스님은 가실 날, 시간까지 미리 정해두셨던 분이었다.
각림 스님은 거짓말처럼 평소 말씀하시던 그날 그 새벽 백짓장 같은 얼굴로 수차례의 고비를 넘겨가며 혜욱 스님과 상좌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그렇게 밤을 새고 난 스님은 이튿날 오히려 정신도 밝아지고 잃었던 건강과 언어도 다시 되찾았다.
상좌들은 스님이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했다.
올 여름에는 중앙승가대에서 열린 세계여성불자대회까지 참가할 만큼 건강도 회복됐다. 불편한 거동에도 여전히 아침, 저녁 예불은 거르는 법이 없다.
그런 스님에게 요즘 새로운 기쁨이 하나 생겼다. 지난해 7월 태어난지 하루 밖에 되지 않은 갓난 아기를 속초에서 데려와 키우는 일이다. 이름을 ‘도솔’로 지은 스님은 도반들 모임에 나가거나 외부 신도들이 찾아오면 도솔이 자랑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이렇게 거동하고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부처님께 감사해요. 난 이제 내일 당장 숨이 멎어도 아쉬움이 없어요. 그냥 새 옷 갈아입는 거라 생각해요. 다만 내생에는 성불할 수 있기를 기도할 뿐이지.”
각림 스님은 1927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양주 회암사에서 은사 고근 스님을 모시고 출가,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 이후 대성암, 석남사, 내원사 등 전국의 선방을 다니며 수행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대중교화에 원력을 세우고 춘천 봉덕사 창건불사를 시작했다.
전법과 봉사활동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아 춘천교도소 교화위원, 전국비구니회 강원지회장으로도 활동했다. 혜욱, 명관, 현욱, 청욱 스님 등 도제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93년 춘천시로 부터 연꽃어린이집을 위탁받아 어린이들이 불법의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어린이 포교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조용수 기자
200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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