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갖는다면 할 수 있어
여러분께서 추석을 지내셨습니다. 추석을 지낸 뜻을 우리가 한 번쯤은 음미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분이든지 밥 먹지 않고 사는 사람 없고, 옷 입지 않고 사는 사람 없고, 물 안 먹고 사는 사람 없고, 불 쓰지 않고 사는 사람 없고, 땅 딛고 다니지 않는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기를 마시지 않고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추석이라고 하는 것은 일년 내내 농사를 지어서 첫 곡식으로 밥을 지어서 놓든 떡을 해서 놓든 무엇을 해서 놓든, 일체제불의 마음과 더불어 일체 만중생과 더불어 같이 지수화풍이나, 또는 무정물이나 식물이나 모든 마음들을 한데 둥글려서 그 마음으로 깊이 감사함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이것을 따로따로 얘기하는 거보다도 몰아서 얘기하는 것이 간단하고 쉬울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마음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것입니다. 무한량이라면 무한량일 수 있고 작다면 바늘 구멍 하나 안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생각해서 진실하게 감사함을 느낄 줄을 모두 모릅니다. 더군다나 가깝게 있을수록 더 감사함을 모릅니다. 없으면 당장에 생명을 유지 못 하는데도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 쓰는 거와 불 쓰는 거와 땅을 딛고 다니는 거와 공기를 쐬는 것에 감사함을 느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또 일체 만물을 통해서 공부를 할 수 있고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고, 또 상대성 원리로써 개발을 할 수도 있고 창조력을 기를 수도 있고 창조를 해낼 수도 있는, 그러한 모든 여건을 생각해보지도 않고 감사할 줄도 모릅니다. 은혜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은 일체 만물만생 전부가 다, 흙이든지 무정물이든지 식물이든지, 지수화풍을 막론하고 더불어 모두가 평화스럽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자유스럽게 살 수 있게끔 돼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질 못합니다. 평화스럽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여하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들이 물질세계의 50%에만 전전긍긍하니 거기에까지 마음이 미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내가 산다느니 내가 했다느니 내가 말했다느니, 그리고 망한 거는 타의에 의해서 망했다느니, 저 사람 때문에 우리가 못살게 됐다느니, 이러한 문제 등이 모두 여러분의 마음에 사무치기 때문에 밝게 내다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천당 지옥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이 진정코 무서운 도리라는 것을 한번 음미해 보십시오. 일체 만물만생이 천차만별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로 낳는 거나 알로 낳는 거나 화해서 낳는 거나 질척한 데서 낳는 거나 천차만별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정물도 식물도 천차만별로 모습을 가지고 있고요.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느냐? 전력이 똑같듯이 인간의 불성의 씨는 다 똑같은데도 불구하고 마음들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모습을 지어가지고 나옵니다. 우리가 박씨를 심었으면 박이 나죠. 박의 싹이 나고 박이 또 열리죠. 그러나 마음의 불씨라는 것은, 마음의 씨라는 것은 박 씨도 아니요 사람 씨도 아니요, 이것 씨도 아니요 저것 씨도 아닌 자체의 씨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먹는 대로 입력이 돼서 그것이 현실로 모습을 들고 나오고 바로 현실에 모든 생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먹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보다도 벌레가 되느냐 짐승이 되느냐, 날아다니는 새가 되느냐 하는 이러한 문제들이 무서운 것은 둘째 치고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식들을 낳았을 때 거기까지도 미치게 됩니다. 부모가 살인을 저질렀다거나 사상이 그르다 해서 만약에 부모한테 어떤 판정이 내려졌다면 그 자식들에게까지도 연관이 되듯이,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 어떻게 생활을 하느냐, 어떻게 행동을 하느냐, 어떻게 말을 하느냐 이런 문제 등이 현실에 결부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일 두렵게 생각해야 할 것은, 지금은 사람의 모습으로써 이렇게 살지만, 한순간에 꿈같이 내 몸이 사대(四大)로 흩어져서 제각기 물로 돌아가고 흙으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고 불로 돌아가는데, 원점으로 다 돌아가는데 하나도 가져갈 게 없어요. 몸도 가져갈 수 없고 보물도 가져갈 수도 없고, 재산도 가져갈 수가 없고 또는 부부와 자식도 가져갈 수가 없고, 모든 권속도 가져갈 수가 없고, 권리고 친구고 누구고 아무도 가져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말하자면 악업이든지 선업이든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림자처럼 따르는 것이 바로 업식입니다. 그 업식으로 말미암아 모습을 사람으로 가지고 나오느냐, 짐승으로 가지고 나오느냐, 벌레로 가지고 나오느냐, 새로 가지고 나오느냐, 독사로 가지고 나오느냐, 개로 가지고 나오느냐가 결정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은 사는 게 뭐, 살아나가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고 이렇게 방치하는데, 여러분이 사람의 의식으로 생활을 하고 사시다가 만약에 짐승이나 땅 속의 벌레나 독사가 짝짓기 하는 데 자동적으로 들어간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이 세상을 잘 보십시오. 넝마는 넝마전에 있고 금은 금방에 있습니다. 깡통은 깡통전에 있고 무쇠는 무쇠전에 있습니다. 사람들도 천차만별로 끼리끼리들 모두 모이는 겁니다. 그와 같이 자동적으로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모습을 짓게끔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의식으로 살다가 짐승 모습을 가지고 나왔을 때는 아무리 울고 발버둥쳐도, 개로 모습을 가지고 나왔다면 멍멍 하고 짖을 수밖엔 없는 겁니다. 새로 나왔다면 새로 지저귈 수밖엔 없는 겁니다. 아무리 말을 하고 눈물을 흘려도, 간절하게 말을 해도 세상 사람은 들어주지 않고 알아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답답한 거 자체가 지옥입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재나 쌀을 곱게 해놓고 뭐가 됐는가 발자국을 보는 유래가 있었죠. 구렁이가 됐으면 그 재를 가지런히 해놓은 거기에 구렁이 표시가 나고, 사람이 됐으면 사람 발자국 표시가 나고 이랬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지옥이 우리 눈앞에 그냥 널렸고 천당도 눈앞에 널려 있습니다.
그런 일이 현실에 진실로써 그냥 막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앞에 지금 닥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생각들 하시는 겁니다. 금으로 반지를 만들었다면 반지가 아무리 찌그러졌어도 금방에 가서 다시 재생돼서 나오지만, 무쇠나 넝마라면 깡통이나 그런 철 종류라면 가서 재생이 돼도 철 종류로 그냥 나오는 겁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앞길이 세세생생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닙니다. 부모에게도 관련이 되고 자식에게도 관련이 되는 겁니다. 한 발짝도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반면에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이러는 것이 모두 그대로 입력이 됩니다, 그대로. 이걸 소홀히 생각 마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한 가지로다가 표현을 하겠습니다. 병원에 가서 어떠한 병이다 하면 거기에서 그냥 깜빡 마음이 죽습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거죠. ‘아이구, 이젠 죽었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반면에 그것이 그대로 입력이 됩니다. 체내의 모든 의식들에게 하나로 그냥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한 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죠. 잘못되는 것도 입력이 돼서 잘못되는 거, 잘되는 것도 입력이 돼서 잘되는 겁니다. 입력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컴퓨터는 물론 사람이 넣는 것만 입력이 되지만 이 자동적인 심성의 컴퓨터는 아주 여러분의 세세한 것까지도, 큰 거나 작은 거나 세세한 것까지도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현실에 그냥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고 지은 거는, 알고 입력이 된 것은 현실에 알게끔 나오고, 모르고 입력이 된 것은 모르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 과정에서 천차만별의 이 마음 도리가 이렇게 귀중하고 이렇게 엄청난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이거는 과거에 어떻게 살았다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과거도 현실이요, 미래도 현실입니다. 영원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내가 일러드리는 것은, 그렇게 과거에 살 때 입력이 된 것이 현실에 나오는 거니까 현실에 나오는 것마다 두려워하지 말고 물러서지 말고, 자기가 땅을 걸어가다 엎드러지면 땅을 짚고 일어나듯이, 자기한테서 나오는 것을 자기한테다가 맡겨 놓고 잘된 건 감사하게 생각하고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잘되게 돌리는 것도 거기다.’ 하고 맡겨 놓고 지켜보고 체험해라, 이것이 본래 참선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거기다 맡겨 놓고 입력을 시키면 과거에 입력됐던 것이 자동적으로 없어지면서 넣으면 넣는 대로 자동적으로 그릇이 비고 또 넣으면 또 비고 넣으면 넣는 대로 그릇이 비게끔 돼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이런 쉬운 방법을,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길을, 아주 손쉽게 여여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한생각이 모자라서 내다볼 줄 모르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해서, 먹어보지 못해서 맛을 모르고, 듣질 못해서 생각이 나질 않아서 항상 독 속에서 내 마음이 빠져나오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몸뚱이가 독이라면 독 속에서 나와야 내 몸뚱이 독을 마음대로 굴릴 수가 있는 건데, 여러분 몸이 항아리라면 항아리 속에서 나와야 자기의 몸뚱이 항아리를 마음대로 굴릴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항아리 속에 들어 있으면서 어떻게 항아리를 굴린단 말입니까?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면 팔만대장경을 모두 다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금강경이나 화엄경이나 법화경이나 이런 걸 보면 그냥 단번에 그 뜻이 들어오는 겁니다. 전자에 못 알아듣고 ‘이게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 이러던 것이 그냥 단번에 ‘아, 저거는 무슨 뜻이고 저거는 무슨 말이고….’ 이런 것이 아주 단번에 옵니다. 이 세상만사가 부처님의 법 아닌 게 하나도 없으니깐요. 우리들의 법을 빼놓고 부처님 법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마음이라는 게 쥘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빛깔도 없지만 이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광대하고 무변한 것을, 한생각이면 두루 할 수 있는 것을, 한생각에 바늘 구멍에도 들어갈 수가 있는 그런 마음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누가 그렇게 하라고 그랬습니까? 누가 뺏어갑니까? 누가 갖다줍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계시니까 이 세상을 자유스럽게 살 수가 없는 거죠. 그렇게 생각이 듭니까?
▲대중: 예.
▲스님: 이해가 갑니까? 이해가 가셔야 될 겁니다. 여직껏 그래도 마음 공부하라고 이끌어왔고 여러분과 같이 한마음이 돼서 이렇게 길을 걷고 있는데, 내가 항상 얘기하죠. 여러분의 마음이 전깃줄이라면 내 마음도 전깃줄이 돼서 와서 서로 닿으면은 불이 밝게 켜지는 것뿐이라고요. 그래서 이 전깃줄도 아니요, 저 전깃줄도 아니다, 단 전깃줄과 전깃줄이 맞닿듯이, 마음과 마음이 닿으면은 밝게 불이 들어와서 한 가족이 다 밝게 살 수가 있는 거다 이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떠한 문제든지, 어떤 가정도 그렇고 넓게 생각한다면 어떤 지역도 국가도 다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여기 지역이 공동 묘지였습니다. 근데 시체들을 그냥 한데 몰아서 갖다가 뿌려 버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해를 당할 수밖에요. 동네에 도둑이 생기고 사람이 다치고 한 사람은 죽어버리고 이렇게 되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러다 여기에다 절을 짓게 됐는데 해골이 하나하나가 그냥 물밀듯이 밀어닥쳤습니다. 그랬을 때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여러분이 공부한 대로 어디 대답해보십시오. 그걸 어떻게 해야만이 없앨 수 있겠습니까?
▲신도1: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스님: 말로만 그래서 되는 게 아닙니다. 하하하. 마음속의 진실과 또 극치적으로 나라는 게 없고 상대도 없어야 됩니다. 그래야 지금 말씀하신 거와 마찬가지로 여래가 되죠. 여래, 이 자체는 어떠한 부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모두가 돌아가는 자체가 그대로 여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많아도 이 마음공부 하고 가는 사람들에게는 ‘둘이 아닌데….’ 해도 체가 없는 거니까, 나도 마음이 체가 없는 것이요 상대도 체가 없는 것이니까 모든 것을 한마음으로 입력을 한다면 모두 두드러지지 않는다. 마음속에 이 세상을 다 넣어도 그릇이 작지 않고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꺼내도 줄지도 않고. 아시겠죠?
그러한 것은 말로 하는 게 아닌데 방편으로써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을 듣고 한데 떨어지지 않는다면 법이 될 것이고, 내가 말을 하는데도 한데 떨어트리지 않고 말을 한다면 이것도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 자와 말을 하는 자가 둘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한데 합쳐져서 밝아질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네가 했다 내가 했다 하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한 사이도 없고 내가 말한 사이도 없고, 나도 없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고, 그 원인이 무슨 까닭인가 하고 물었을 뿐입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써 그만 하고 질문이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삼배를 올리는 질문자에게) 삼배를 일배로 하세요. 몸만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삼배가 되는 게 아닙니다.
▲질문자1: 안타까운 마음에 어리석은 질문을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저에게는 남동생이 한 명 있는데요, 나이도 어린데 머리카락이 빠지고 별로 나지를 않습니다. 본인도 굉장히 삶에 대해서 회의적이고 성격까지도 변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여쭙니다.
▲스님: 인체의 모든 생명의 의식들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따라주게끔 돼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모든 생각을, 내 인체의 모든 의식들이 한마음으로서 작용을 해주니까 틀림없이 할 수 있다. 머리가 빠졌던 것도 나게 할 수 있다, 하는 믿음을,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갖는 다면 할 수 있어요.
▲질문자2: 본 질문에 들어가기 전에 조금 전에 말씀하신 그 후미에 대해서 잠깐 여쭈고 싶습니다. 여기에 그렇게 많이 공동묘지에 묻혀져 있던 그런 영령(英靈)들이 스님과는 어떤 인연이었기에 그런 좋은 인연이 되었는지요. 한 말씀 일러주십시오.
▲스님: 인연이 별다르게 따로 없는 겁니다. 바람결같이 스쳐가는 인연. 허허허. 우리 모두가 바람결같이 스쳐가는 인연들입니다. 이게 생시도 아니요 꿈도 아니요, 꿈도 아니요 생시도 아닙니다. 생시와 꿈과 둘이 아닙니다. 모두 바람결같이 돌아가고 찰나찰나 만남이 있는 것이 그대로 인연입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보니까, 여기다 절을 지으려니까 인연이 된 거죠.
그러니까 모두 인연이 돼서 하나로 되니까 금방 그 영령들은 백이든지 천이든지, 만이든지 모두가 인간으로 환토를 한 거죠. 환토를 해서 내놔도 내놓은 사이가 없이 또 내놔지죠. 그러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모두가 여래의 집에 들었다가 여래가 된 거죠. 부처가 다 됐다 이 소리죠. 모두가 이렇게 긴요하고 이렇게 모두 무변한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질문자2: 네. 잘 알아들었습니다.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같은 그런 논장을 보면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장식(藏識)이다, 여래장(如來藏)이다 하는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소위 팔식(八識)이라 그러죠. 장식을 말하는 것인데, 팔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마음이라고 할 때의 그 마음과 칠식이다 팔식이다 하는 그 식(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고자 여쭙니다.
▲스님: 그거를 여러 마디로 할 것 없이 아주 축소해서 말을 하죠. 칠식(七識)이다 하는 것은 우리네 육근(六根)이 공(空)해서 돌아가는 거를 하나로 묶어서 한마음이 된다면 그것이 칠식입니다. 그리고 한층 더 나아가서 내 몸을 떠나서 더불어 같이 이 세상 사무 사유를 한데 합쳐서 한마음이 된다면 팔식(八識)입니다. 작게 따진다면 칠식이요, 넓게 전부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한데 합친다면 팔식에 속합니다. 칠식이래도 하나요 팔식이래도 하나입니다. 팔식 하면 벌써 칠식은 없어지는 겁니다.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팔식 하면 팔이라는 건 없어지고 식만 남아서 그건 구경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여래장이 되는 거죠. 여래라는 것은 일체 만물만생이 다 송두리째 둘이 아닌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나도 없고 너도 없어지는 겁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그렇기 때문에 모두 부처 자리 아닌 자체가 없고, 부처님의 작용 아닌 게 없고,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는 그 자리가 되기 때문에 여래장입니다.
▲질문자2: 다음 두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작용을 관찰을 해보면은 일순간도 쉬지 않고 찰나에 일어났다가 찰나에 없어졌다 또 찰나에 일어났다가 없어졌다가 하는 그런 작용이 끊임없이 지속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 중에는 한생각 일어났다가 한생각 없어지는 그 생멸심이 곧 멸하면은, 그것이 고요하고 고요해서 마음이 고요한 경계에 들어가서 그것이 참 낙(樂)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요한 그러한 마음의 자리와 끊임없이 일순간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가 없어졌다가 일어났다가 없어졌다가 하는 생멸심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요.
▲스님: 만날 말씀을 해드리는데, 우리가 여기 걸어올 때에 한 발 떼었다 한 발 놓고 한 발 떼었다 한 발 놓고, 이게 생멸입니다. 이게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하는 거와 같은 겁니다. 우리가 알려고 말로 표현을 하자면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마음이 이렇다는 것과 한 발 떼어놓고 한 발 놓고, 한 발 떼어놓고 한 발 놓고 하는 것과 뭐이 다릅니까? 이게 어떻게 둘이겠습니까? 한 발 떼어놓고 한 발 놓고, 한 발 떼어놓고 한 발 놓고 하는 작용이 없으면 우리가 걸어다니지 못합니다. 안 그런가요? 일어났다 가라앉고 하는 그 마음이 없다면 성불이라는 말도 없을 거고 중생이라는 말도 없을 겁니다. 이해가 갑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방편으로 얘기해볼까요? 아버지 노릇 하다가 남편 노릇 하다가 또는 형님 노릇 하다가 자식 노릇 하다가 이렇게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거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금방 일어났는데 금방 딴 걸로 돌아갔어요. 금방 딴 걸로 돌아가고 딴 걸로 돌아가고, 이렇게 일어났다 놓았다가 일어났다 놓았다 해도 그냥 여여하게 그냥 돌아갈 뿐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바로 둘이 아닌 것입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그냥 ‘여보!’ 하면 ‘왜 그래?’ 하고 일어나는 마음. 그 일어나는 마음은 찰나에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악으로나 선으로나, 일어나는 마음을 잘 응용을 하면 선이 되고 잘 응용하지 못하면은 악이 됩니다. 싸움을 할래도 부를 테고, 좋은 말을 할래도 ‘여보!’ 하고 부를 겁니다. 그런 걸 대치를 해서 잘 응용한다면 바로 그것이 부처님의 법입니다.
▲질문자2: 예. 그렇다면, 한생각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그 마음을 이름 붙여서 생멸심이라고 한다면, 그 생멸심과 적멸심이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번뇌심과 보리심이 둘이 아니라고 이렇게 이해를 하면 같이 이해가 되는 걸로 되겠습니까?
▲스님: 본래심이 번뇌심과 다르다고 관습에 의해서 생각을 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 생각 저 생각이 나지 않으면 광대하게 발전을 할 수가 없어요. 고정된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돌아갑니까? 이 마음 저 마음, 이 생각 저 생각이 나기 때문에 광대하게 부처를 이룰 수도 있고 광대하게 창조를 해낼 수도 있고, 창조력을 기를 수도 있고 계발을 할 수도 있고 발전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선도 있고 악도 있고요. 그러니까 번뇌가 아니라 그냥 내 마음에서 수행하는데 발전하게 하기 위한 재료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재료! 나를 발전시키기 위한 재료!
항상 내가 그런 말을 하죠. 귀가 아프도록 들었을 겁니다. 동짓날 팥죽을 쑤는데 팥죽 방울이 수없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니까 주걱으로다가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 하고 쳤는데 무슨 까닭인가 했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말로만 그렇게 하지 그 까닭을 모른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가 팥죽 솥이라면 팥죽 방울이 일어나는 대로 그걸 번뇌라고 하는데, 번뇌라고 하기 이전에 모든 게 그 속에서, 한 속에서 화해서 나오는 업식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그걸 재료로 알아야죠.
속지 말고 한군데서 나온 거 한군데에 제대로 되놔라 하는 소립니다. 이것도 문수, 이것도 문수 하고 친 게 자기 마음의 주장자로서 자기한테서 나오는 것마다 거기다가 놨습니다. 놓으라고 그런 방편을 쓴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는 자리에는 일어나는 번뇌도 망상도, 또는 도라는 이름도 없는 겁니다. 그대로 여여하게 걸어오듯이,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걸어오듯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레공법이죠. 우리 마음과 마음이 서로 합해서 불이 들어와서 가정이 밝게 살고 사회가 밝게 살 수 있는 것이니 바로 한마음에 밝게 불이 켜졌을 뿐입니다.
▲질문자2: 재료를 재료로서만 알고 재료에 결코 끄달리지 않는 노력을 하겠습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60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