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시대라 한다. 우리에게 있어 문화라 하면 세상에 자랑할 것이 있다. 바로 불교문화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 불교문화처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또 그에 걸 맞는 화려한 성과를 낸 부분이 있을까. 그 깊이와 넓이, 이를 당할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들에게 불교문화가 지니고 있는 의미는 거의 무한대와 같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불교문화하면 지나간 시대의 유물로만 간주하려는 분위기가 자리를 잡고 있다.
불교는 과연 과거형인가.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일렁거리는 현재형과는 무관한 것인가. 나는 한산한 불교계를 생각하면서 하나의 정책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키워드는 ‘감동’이다. 감동을 주어야 한다. 감동이 없으면 움직이지를 않는다. 사람들은 감동을 찾아 헤매고 있다. 하여 감동이 좀 있다하면 몇 십만 아니 몇 백만 명이라도 모여든다. 그것도 제 발로, 돈까지 들고 찾아온다. 현대인은 감동에 굶주려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감동과 함께 주지 않으면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불교, 좋다.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불교라 해도 감동과 함께 건네지 않으면 반기지 않는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더욱 그렇다. 날로 감동이 메말라 가니 감동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동은 어떻게 주는가.
이미 해답은 나와 있다. 문화예술이다. 예술은 감동을 생명으로 존재한다. 아무리 훌륭한 교리라 해도 딱딱한 법문만 가지고는 젊은 세대를 잡을 수 없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아 불법을 제공한다면, 게다가 감동까지 듬뿍 담아 건네준다면, 사람들은 구름떼처럼 몰려들 것이다. 그것이 세상이다.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예술분야를 활용하지 않는가.
불교는 예술 창작의 보고(寶庫)이다. 다양한 장르에서 얼마든지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한 번 상상이나 해보자. 잘 나가는 영화나 소설 한 편이 불교이야기였다고 하자. 그 효과는 어떠할까. 쉬운 말로 포교도 하도 돈도 벌 수 있다. 그리고 민족의 역사에 찬란한 금자탑을 쌓게 된다.
감동은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길 때 효과가 배가된다. 나는 우리 시대의 예술, 우리 시대의 불교예술 작품에 목이 마르다. 감동을 한아름 안을 영화, 문학, 연극, 음악, 무용, 미술작품과 같은 창작과 만나고 싶다. 왜 안 되는가. 불교의 세계는 예술창작의 원천이다. 누군가의 촉매역할이 절실하다. 우리 시대의 불교적 걸작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투자를 해야 한다.
여기서 종단의 지도자 혹은 사부대중에게 제언을 하고 싶다. 종단 안에 불교문예진흥원 같은 기구를 만들자. 그것의 위상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 그리고 기금과 인재를 모으자. 각 장르의 전문가들로부터 중지를 얻자. 여건이 되는 분야부터 집중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조급하게 성과물을 재촉할 필요는 없다. 씨를 뿌리다 보면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언젠가 세계를 울릴 예술 작품이 하나 둘씩 나올 때, 불교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로 바뀌게 될 것이다. 나는 한국불교의 중흥은 바로 예술중흥에서 비롯될 것으로 확신한다.
터 닦고 건물 짓는 불사에서 이제는 예술불사(佛事)를 실현하자. 영화불사, 소설불사…. 왜 안 되는가. 사람을 키워야 한다. 같은 노력이면 우선 예술가를 키우는 것이 효과 만점이다. 포교가 별 것이겠는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자. 예술작품을 안기자. 하여 불교문예진흥원의 설립에 박차를 가하는 종단이 그리워진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현단계의 중점사업은 불교예술의 진흥이다. 예술가를 키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