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3.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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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생전에 광대무변한 참보배를 알아야

마음도리를 모르고 죽는다면…
스님께서는 살아생전에 마음의 도리를 꼭 배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선한 행위를 했든 악한 행위를 했든 자기가 한 대로만 받고 살아가겠다고 생각한다면 꼭 굳이 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마음의 도리를 모르고 죽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지금 우리가 학으로만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둘이 아님을 모르고 둘 아닌 그 가운데 참나를 모르고, 우주 전체와 나와 더불어 같이 있는 거를 모를 때, 너무나 애석한 것은 우리가 이 도리를 모르고 만약에 옷을 벗는다면 ‘식’만 있어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분간을 못해요. 여러분, 지금 눈과 귀를 싸매 보세요. 지금 금방 이 자리에서 죽었다면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부딪침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와 같이 식만 남았으니, 지금 그것을 증명해 보시려면 아주 오관을 딱 가려 보세요. 귀도 막고 다 막아 보세요.
사람은 눈 아닌 눈이 있어야 하고 귀 아닌 귀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분별을 하죠. 그리고 책정을 하고 판단을 해서 내가 이렇게 해야겠다는 뭐가 생기죠. 그런데 도대체 식만 남아 가지고서, 아니 보기를 하나, 듣기를 하나, 사람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몰라요. 어떤 집인지, 요만한 굴속인지 큰 집인지 그것도 몰라요. 작은 굴속도 크게 보여요. 그리고 기와집으로도 보이고 보석으로도 보이고 이렇게 하니 눈이 없다 이겁니다. 욕심에 꽉 찬 그 눈은 바로 식만 남아서, 생시에 살 때 좋은 것만 가지려고 했던 그 식만 남아서, 하다못해 돌 틈을 봐도 돌기둥으로 보고 살겠다고 들어간다면 안 되지요. 그러니 여러분이 지금 보이지 않는 세계라고 해서, 지금 살았다고 해서 그걸 아무렇게나 생각할 수는 없죠. 그저 값싼 말로 붙을 데가 없는데 뭐 붙을 게 있어서, 내가 없는데 뭐 붙을 게 있느냐고 이렇게들 허영 말해 버리고 마는데 그 무서운 도리는 누가 처리할까요?
그래서 옛날에도 참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보아 왔고 그랬는데, 무엇이 되나 보려고 사람이 죽으면 재를 놓거나 쌀을 놓거나 하면 새 발자국도 있고 뱀이 기어 간 것도 있고 또 사람 발자국도 있고 별의별 발자국이 다 난다 합니다. 그것은 왜 그렇게 됐는가. 그것이 식만 남아서 자기가 분간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까 얘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눈 가리고 귀 막고 코를 막아서, 만약에 그렇게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암흑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밝은 불빛을 못 봐요, 내 마음의 불빛을. 불빛이 없으니 어찌 보겠습니까? 그래서 이리로도 가고 저리로도 가고 하는 거죠. 부처님의 그 뜻은 만사만생이 다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고 이렇게도 되는 원리가, 누구나가 잘되고 싶지 못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죠. 못되고 싶어서 못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눈이 없고 귀가 없으니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무서운 법입니까.
그걸 알았을 때 난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허허 웃으면서 ‘내가 만약에 구더기가 된다면, 구더기가 된들 구더기는 똥을 보고 좋아하는데 말이야, 사람은 똥을 보고 구리다고 하고 싫다고 하지만 아마 똥구덩이가 있으면 구더기는 좋다고 할 거다, 우리가 금은보화 본 것처럼.’ 내가 그것도 알았으니까 그렇지, 만약에 몰랐으면 그거 구더기가 돼도 구더기가 되는 줄 압니까? 그러니까 구더기가 된다 하더라도 난 ‘그까짓 거’ 했습니다, 그 때. 거기에서 큰 뜻을 배웠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무서운 뜻이 있는가 하면 나는 그것을 알았으니까 구더기 될 걱정을 안 하지마는 여러분을 볼 때 모두 모르고, 알고나 됐으면 좋겠는데, 모르고 그렇게 모두가 천차만별로 벌어지고 오므라지고, 벌어지고 흩어지고, 벌어지고 흩어지고 하니, 모아지고 흩어지고 모아지고 흩어지고, 흩어지는 반면에 그렇게 모두들 돼 가지고 그렇게 되니, 그리고 끼리끼리들 모이니 이 노릇을 어떡합니까? 어떤 때는 하늘을 보고 땅을 내려다보면서 씁쓰름한 웃음을 웃으면서 말도 하기 싫습니다.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음도리를 모르고 만약에 죽는다면, 그 식만 남아서 분별을 못하고 토끼 굴로 안 들어가나 개집으로 안 들어가나 뱀 굴로 안 들어가나. 야, 까치 굴로 안 들어가나. 이렇게 분간을 못하니 어쩌다가 인연이 돼서 사람 만나면 사람으로 되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 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몸을 받아 가지고도 그런 분간을 못해서 또 좌천이 되고, 또 좌천이 안 된다 할지라도 그렇게 자기 차원대로 울고 아프고 부닥치고 서로 모였다가 헤어져서 또 그렇게 되렵니까? 그것을 그렇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 사람을 이루어 놓으면 전 우주를 이루어 놓은 것처럼 그렇게 성과가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 성현들이 그렇게 앨 쓰고 자비하게 그렇게 애쓰셨답니다.
그러니 이 만법의 이치를, 한생각에 들었다가 놨다가 들었다가 놨다가 하는 이 도리를 우리는 참답게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제는 교(敎)와 도(道)를 겸해야 되는 것입니다. 겸하지 못하면 아니 되는 거죠. 그래서 교와 도가 둘이 아닌 그 뜻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기에 이러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둘이 아니라는 그 점을 알려면 나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 놓으면 무지렁이라도 쓸모가 있고, 다양하게 우주 삼천대천세계에 어느 곳 안 닿는 데 없이 쓸모가 있다는 겁니다. 진짜 일꾼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살아생전에 광대무변한 참보배를 알아야만이 다음 몸을 받을 때도 헤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지름길이 될 수가 있는지요?
불법에서는 인과의 법칙을 철두철미하게 가르치는데 스님께서는 “근본에 그대로 놓아라. 그러면 과거의 업이 다시 화해서 무(無)로 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본래 인연법대로 화한 뜻이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재 모든 존재가 인연법에 따라서 제 길을 가고 있는 도중이라고 보게 되면, 스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은 제 길을 떠나서 지름길을 가르치는 걸로 이해가 되는데요, 저의 이런 생각이 맞는지 궁금합니다.


지름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집을 한 채 지었는데 나중에 보니깐 잘못 시설이 되어서 자꾸 고치다 보니까 나중에는 ‘이것이 잘못됐구나. 아무리 고쳐도 이거는 워낙 애당초에 잘못 지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경험을 살려서 해 봐야겠다.’ 하고 다시 집을 지으니까 그때는 집이 자기 마음에 쏙 들게 지어지는 거와 같이 우리가 그림을 그려도 마음으로 그리는 것은 깔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도리를 알아야만 태교를 해도 정상적으로 온전하게 할 수가 있는 거죠. 이 마음을 빼놓고는 없습니다. 그러니 아까도 얘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지름길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종교가 생긴 것도 사람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생긴 거죠. 그런데 좀 더 먼저 사람이 사람답게 돼라고 해서 종교가 생긴 거거든요. 그런데 사람이 되기는커녕 종교를 믿으면서도 점점 분리가 되고 점점 악의가 생기고, 거짓말이나 하고 이렇게 하니까 종교가 있으나 마나 하게 돼 버리는 겁니다. 그건 장사꾼이지 종교가 아닙니다. 아니, 누구를 욕하기 이전에 말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십자가까지 팔아먹고 부처님 뼈까지 팔아먹는 이런 입장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생각을 깊이 하셔야 될 것은, 만약에 30%, 40%, 50%가 현실세계에서 그렇다면 그 나머지 채우는 거는, 즉 말하자면 60%든 70%든 여러분이 채우셔야 된다는 겁니다. 또 병이 나도 병원에 가서 고치지 못하는 게 많은 것은 그 도리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50%가 거기 대두되지 않았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면 어디서 오느냐. 그 문제가 영계에서 왔느냐, 세균에서 왔느냐, 그렇지 않으면 유전에서 왔느냐, 인과성에서 왔느냐. 이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50%밖에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정신병자가 생겨도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모자라는 건 누가 채우느냐? 자기네들이 채워야 돼요. 그건 누가 채워 줄 수도 없고 누가 대신 해 줄 수도 없으니깐 말이에요.
그러니까 병이 안 날 것도 병을 만드는 겁니다, 자기가. 왜냐하면, 무슨 일이 생기면 그냥 불끈 솟아 가지고 화를 내고 온통 야단법석이 나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속의 모든 공장이 전부 파워가 일어나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하기 때문에 몸속에 모든 부분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거죠. 지배인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전부 파워가 일어나 가지고는 직원들이 모두 일을 안 하거든요. 직원들이 일을 안 하니까 세포들이 굳어지고 말입니다. 뭐 분쟁이 일어나는 거죠. 그것이 파워가 일어날 수밖에요. 그러니 살 수가 있나요? 몸에 병이 나 죽게 되니까 걱정인데, 그렇다고 아픈 한 사람만 문제가 아니죠. 식구중에 한사람이 아프면 가족 모두가 힘들게 되고 그러다 보면 가정이 다 파괴가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겪게 되는 일도 그렇고 가정에서 겪는 모든 문제, 또 사회적으로 생기는 그 모든 문제들을 각자 인연법에 따라서 그냥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게 나온 자리에다가 다시 놓아서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라는 말입니다. 현실에서 살아가기도 힘든 세상인데 과거에 입력된 대로 나오는 업식에 끄달린다면 정말이지 모두 죽을 맛일 겁니다. 그러니까 나온 자리에 다시 돌려놓고 무로 만들라고 하는 겁니다.


해외에서 공부하기가 힘들어…
저는 한국에서 절에 다니다가 미국 지사로 발령이 나서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불자입니다. 막상 미국에 와서 생활하다 보니 교회를 나가야만 교민사회에 제대로 적응을 할 수 있고 사회생활을 원활하게 하게 되는 불자들만의 모순에 직면하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로서 교회에 나가지 않고서는 어떻게 처세를 할 수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가끔 고민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들이 많아야만 이러한 부조리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 텐데, 저 개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포교를 하고 있는 스님들께서 어떻게 노력해야 불자들의 수를 늘릴 수 있을까요?


지금 말씀하시는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번 만번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지금 불교든 가톨릭교든 기독교든 타력신앙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기독교를 다니든지 가톨릭교를 다니든지 불교를 다니든지 상관 안 합니다. 단 하나 있다면 자기 주처를 똑바로 보고, 자기 주처를 믿고 거기서 물러서지 말라는 겁니다. 타의에서 구하지 말라는 얘기죠. 자의에서 구함으로서 모두 불교지, 그 생명이 어디로 가느냐 이겁니다. 다 생명입니다. 생명을 떠나서 부처님이 어디 있으며, 각자 자기를 떠나서 어디 기독교가 있고 예수가 있고 하나님이 있느냐 이겁니다. 하나님이라는 것은 자기의 완성을 말하는 거예요. 자기 지혜가 바로 하느님이다 이겁니다. 일체 통신력이 바로 한울님입니다. 그것이 삼합이 한데 합한 것이 바로 불교예요.
그런데 이거는 그냥, 나는 불교를 믿으니까, 나는 기독교를 믿으니까, 나는 가톨릭을 믿으니까 하고, 아니 걸상을 쪼르라니 동그랗게 놨는데 걸상에 앉아서 ‘요 걸상이 내 걸상이에요.’ 하는 겁니다. 항상 내리고 타고 내리고 타고 하는데 말입니다. 모두 한 걸상에 앉았는데 거기에서 자기 걸상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그러니까 독불장군이 없다는 속담의 말이 있듯이 우리는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그렇게 분리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안타깝다 부족하다, 이렇다 저렇다 하는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내가 우선 어떻게 관해야만 되겠습니까. 바깥으로 기도를 하라는 게 아닙니다. ‘일체를 주인공이 하는 거니까 주인공밖에는 해결할 수 없어.’ 이렇게 관하면 했지 ‘나를 잘되게 해 주시오.’ 한다거나 안된다고 해서 ‘이거 해 주시오.’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목마르면 직접 마셔라. 하늘이 열 쪽이 난다 하더라도 내가 자고 싶으면 자는 거고 내가 먹고 싶으면 먹는 거다 이겁니다. 아니, 지금 죽으면 어떻고, 이따가 죽은들 어떻고 좀 있다가 죽은들 어떻느냐는 겁니다. 아, 그깐 놈의 것 죽든 살든 어차피 가을이 되면 낙엽은 떨어질 거, 귀찮게 그걸 왜 움켜쥐고서 죽을까 봐 겁을 내고 그럽니까? 그렇게 자꾸 끄달리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고가 많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전부 다 놓으십시오.
그래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나셨을 때 해골 무덤에다 대고 큰절을 하시는데 그 광경을 본 제자들이 “사생자부이신데 왜 해골에다 절을 하십니까?” 하니까 부처님께서 “내 부모도 될 수 있고 내 형제도 될 수 있고 내 할아버지 할머니도 될 수가 있다, 모두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건데 어찌 절을 안 하겠느냐?” 하니까 그때 제자들이 엎드려 통곡을 하고 울면서 “미처 그것을 몰랐습니다.” 하고 했대요. 그 얘길 듣는 순간 나는 무엇을 알았느냐 하면 ‘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 마당에서 은혜가 따로 없이 찰나의 생활이 그대로 나오는데, 우리가 죽고 사는 것도, 이 자리에서 죽는 것도 여기서 죽어가고 살아오는 것도 여기서 살아오고, 같이 한자리에서 그렇게 나고 죽고 돌아가는데….’ 또 그뿐입니까. 이 집에서 살다가 저 집에서 살기도 하고, 구름이 한데 모였다가 바람이 불면 흩어지고 딴 구름하고 또 모여요. 그런데도 한 철 생활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네 부모 내 부모 가리고 나눌 게 없어요. 내 자식 네 자식이 영원히 내 자식 네 자식이어야 할 텐데 부모가 됐다가 자식이 됐다가, 자식이 됐다가 부모가 됐다가, 형제가 됐다가 딴 집에 태어났다가, 또 한 식구가 됐다가, 짐승으로 됐다가 사람으로 됐다가 이렇게 혼란이 오니까 그것이 탁 터지면서 뭐가 생각이 났느냐 하면 ‘허허! 그 해골 하나가 이 세상을 다 완성시키고도 남음이 있구나!’이런 생각을 했죠. 그리고 너무나 좋고 기뻐서 정말 미친 것처럼 펄펄 뛰면서 웃었습니다. 해골 하나가 나를 이렇게 참…. 그 해골이 있기만 하면 뭘 합니까. 부처님께서도 그걸 가지고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으니까 거기서 세상이 다 떠오르는 겁니다. 그러니 어느 부모를 내 부모 아니게 볼 수가 없더라는 얘기죠.
그러니 우리가 찰나 생활을 그대로 여여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지혜력을 가지고 살아나간다면 앞으로 참 불교인이니 불교인이 아니니 따질 것도 없습니다. 나는 그것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도 많고 가톨릭교인도 많다고 하지마는 가톨릭교다 불교다 기독교다 이런 걸 떠나서 진리를 배우는데 그 무슨 하등 이름이 상관이 있습니까. 물건을 사 와서 먹는데 상표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표를 보고 삽니까? 물건을 보고 먹고 살지. 그러니 불교인들이 그리로도 갈 수 있고 이리로 올 수도 있고, 여러분이 좀 더 지혜를 얻고 나라는 존재를 안다면 모두가 부처님 법 아닌 게 없습니다. 진정코 진실한 말입니다. 허공에는 생명들이 없는 줄 아십니까.
그러니 우리는 오직 나 자신부터 믿고 나 자신부터 지켜보고 나 자신부터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하고, 체험을 통해서 앞으로 자신을 알고 자유인이 돼서, 아니 자유인이 되기 이전 모두 공부를 좀더 하신다면 자기 안에서 나오는 거 자기한테다 놓고 맡기고 살고 그 가운데 아주 편안하게 사실 수 있을 겁니다.


독신 생활을 해야만 하나요?
우주 만물은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스님들같이 독신 생활을 하지 않는 저희 평범한 사람들도 깨달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만일에 인류가 독신으로만 전부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끝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졌을 때 나오는 에너지, 그것은 어디다가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처음에 공부할 때는 먹는 것까지도, 자기가 죽고 산다는 것까지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급급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혼자 산다, 둘이 산다, 여자다 남자다 이런 생각 할 사이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기가 지나면 그때는 ‘아하! 이런 걸, 별거 아닌 걸 가지고 이렇게 앨 썼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죠.
그런데 또 그렇게 해 가지고 만약에, 예를 들어서 통달을 했다 이러면 그때는 뭐 여자는 시집가고 남자는 장가들어도, 그 둘이 도반이 돼 가지고 해도 좋은데, 그때 가서는 또 모르는 사람을 보여 주려니까 그때는 그때대로 또 못하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모르는 사람은 보고 배우고, 보고 듣고 행해야 되는데 그걸 보면 모르기 때문에, 그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아이구, 안되겠군.’ 이럽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내가 나를 알기 위해서 했는데, 두번째는 너와 나와 같이 알기 위해서 또 그렇게 못했고, 세번째는 너와 나와 같이 사랑하면서 나투기 위해서, 나툰다는 것은 너가 내가 되고 내가 너가 되는 것, 그래서 일체 나투는 까닭에 모든 것은 그렇게 한만히 경솔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이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둘이 살다가 하나가 없어지면 그렇게 자기가 아주 그냥 생을 다 버리는 거와 같은 그런 문제가 생기죠. 그래서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서 힘도 나오고 거기서 조화가 일어난다는 얘기죠. 불도 만약에 양쪽에 돌을 쥐고 탁 치지 않았더라면 애당초에 불씨를 얻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고걸 보고 큰 돌덩어리가 두루루루 내려오면서 그 돌과 돌이 마주치는 바람에 불씨가 일어나는 걸 알고 그 부싯돌을 했잖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영리한 머리를 가지고도 지금 이렇게 모두 기복에서 벗어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조화 속에서, 우리가 사랑도 자비도, 또는 악도 그런 속에서 나오지 않나요?
그리고 또 이런 게 있죠. 음과 양이 다 결부돼서 인간의 한 생명이 태어납니다. 또 천지인이 없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있을 수가 없죠. 우주의 모든 삼라만상 대천세계가 다 그렇게 그렇게 조화를 이루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도리를 알아야 되겠다는 얘깁니다.


어떤 것이 참된 보시인지…
많은 사람들이 불교와 다른 종교를 사회 활동이나 사회 운동 면에서 비교를 하는 분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프리카와 같이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이 많은 데에 기독교인들이 뭘 모아서 보내 주고 그런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인은 자비나 보시, 사랑에 대해 얘기는 많이 하지만 정작 그렇게 하는 일이 없다고 하면서 많이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듯 실천적이지 못한 측면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는데, 스님께서는 어떤 것이 참된 보시이며 그런 드러난 것이 아닌 더 큰 보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아프리카나 정말 배고픈 사람들을 함께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마음의 조절법이라고 봅니다. 이 도리를 안다면 한생각을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 쪽 절반을 계발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둘째, 물을 주는 것입니다. 셋째, 그 물에 독이 없이 하는 것입니다. 흙과 물에 독이 없는 거, 그것을 만약에 해결해 줄 수만 있다면 거기는 구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현명하기 때문에, 또 생명도 우리와 둘이 아닌 까닭에 도와줄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있다면 그런 것이죠. 우리는 육체로 뛰고 다니면서 아무리 물건을 모아도 그건 한계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네들은 지금도 발을 쓰지 못하고 들고 괴로워합니다. 많이 먹지 못하고 병으로 인해서 발 하나만 디뎌도 벌써 그것은 병고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니 어떻게 편안하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물질을 아무리 들이대도, 약을 아무리 들이대도 그것은 아마 밑 빠진 구멍에다가 물 붓기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유와 무가 다 필요하다 이런 거죠. 유의 법이나 무의 법, 깊은 마음속에서 한생각이 그렇게 중요하고 마음의 조절법이 중요하고 통신법이 중요하고, 광력이 중요하고 전력이 중요하고 또는 마음 속 컴퓨터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깐 여러분 마음속에, 시스템이 다 돼 있는 그 재료가 여러분한테 있으니깐 여러분의 마음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이 도리를 우리는 깨닫고 알아야 된다 이 얘기죠.
누구도 이 도리를 깨달으면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거죠. 그러니 얼마나 광대무변하며 그것이 참, 무량수와 같은 겁니까? 그리고 묘한 법입니까? 우리가 다 가지고 있는 겁니다. 우린 물질을 보고 쫓아가질 말고 한생각에 그렇게 던져 줄 수 있고 내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수만 명을 내 속에 다 넣는다 하더라도 두드러지지 않고 또는 여기서 수만 명을 굴려서 내놓는다 하더라도 바로 줄지 않는 것입니다. 이 도리가 이렇게 큰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내놓을 게 없는 것입니다.
지켜보십시오. 모든 걸 자기가 해 놓고 자기가 지켜보고 이렇게 하다 보면 우리가 큰 뜻을 헤아릴 수 있고, 이게 그르다 저게 그르다 탓하지 않고 큰 빛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과학적으로 아무리 발전이 되었다 하더라도, 지금 빛으로 이렇게 가고 오고 하면서도 활용할 수 없고 모든 정체가 밝혀지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빛보다 더 빠른 게 마음입니다. 제가 틀리다면 이 다음에 여러분이 또 생활면에서 깨달으셔서, 이 도리를 깨닫는다는 거보다도 자유스럽게 할 수 있을 때에, 또 실험하고 체험했을 때 그때 나한테 한번 “야! 이런 게 아닌데 이게 뭡니까?” 하든가, 또 “스님, 그렇게 해 보니깐 정말입디다.” 하고 아마 하늘을 쳐다보고 한번 껄껄대고 웃지 않으면 안 될 거예요. 그리고 너무 기가 막혀서 울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런 이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 공부를 같이 해서 서로서로 ‘이렇게 이런 일이 있는데 이렇게 이렇게 합시다. 우리 같이 한마음 낸다면 이거 어떻습니까?’할 때 선뜻 대답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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