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고 나오는 ‘구녁’이 한군데밖에 없어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다 그렇듯이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는 과정이 쉴 사이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헤어졌다 또 한자리 하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하면서, 마음과 마음, 말과 말, 뜻과 뜻이 이어져서 쉴 사이 없이 끊임없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어떤 분들은 육신과 가정이라는 좁은 범위내에서만 생각하시겠지만 마음공부를 하려면 좀더 마음을 넓혀서 지혜롭게 엮어가도록 노력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만날 스님은 주인공에 놓으라고만 하신다고 말들을 하시겠지만 사실이 그러하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리가 있습니다. 지구가 쉴 사이 없이 돌아가는데, 사람들은 거꾸로 섰다 바로 섰다 하고 돌아갑니다. 거꾸로 돼도 바로요, 바로 돼도 거꾸로입니다. 누구더러 “거꾸로가 바로냐, 바로가 거꾸로냐?” 하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발로 딛고 서서 다니는 이 상태만을 바로라고 하겠습니까? 자동적으로 머리가 땅으로, 발이 위로 쉴 사이 없이 돌아가곤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발이 땅에 붙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붙기 때문에 여전히 쉴 사이 없이 돌아갈 수 있겠죠. 그런데 거꾸로도 아니고 바로도 아닌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거꾸로라고도 할 수 있고 바로라고도 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르든지 옳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 자체는 자유스럽고 걸리는 데가 없는 반면, 생각하기에 따라서 걸릴 수도 있고 걸리지 않을 수도 있는 겁니다. 마음을 쓰는 데 있어서 어떻게 생각을 하든지, 어떻게 생각을 해서 말을 했든지, 어떻게 생각을 해서 행동을 했든지 걸림 없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항상 차를 타고 다니는데 버스로 비유하자면, 여러분은 시발점에서만 버스를 타는 게 아닙니다. 내가 탈 때 내리는 사람도 있고 내가 내릴 때 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시에 내리고 타고 하는 것이, 항상 내리는 데 걸리지 않으면 타는 데 걸리고 타는 데 걸리지 않으면 내리는 데 걸린다고 하는데 모두 자동적이 아닙니까? 자동적으로 내리고 타는 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상대성 원리라고도 하고요. 정맥 동맥이 없으면 이어서 돌아갈 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자동적으로 내리고 타고 하는 그 가운데에 누가 내리고 타고 할 수 있는 자유로운 마음을 가졌느냐는 얘깁니다. 그 마음은 어디까지나 자유스럽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했고, 자유를 행하고 삶을 살 수 있기에 사람이라고 그런 겁니다. 그리고 사람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체가 없는 마음을 맘대로 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자기 마음을 가지고도 자유스럽게 못 쓰고 있습니다. 관습에 매달리고 안된다는 데 매달리고 된다는 데 매달립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차를 타는 데도 매달리고 내리는 데도 습관적으로 매달리는 겁니다. 왜 끄달립니까? 내가 갈 때가 있으면 묵묵히 차를 타는 거고 또 내려야 할 때 묵묵히 내리면 되는 거지, 남이 내리는 거 오르는 거 다 참섭하면서 온통 걸리고 돌아가니 그 노릇을 어떡합니까.
내 육체를 여래의 집으로 삼고 흔들림 없이 도는 한마음의 심봉은 자유스러운 겁니다. 그런데도 생각하는 대로 여기 매달리고 저기 끄달립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끄달리는 겁니다. 또 되는 것만 귀중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 안되는 것은 ‘안되는구나’ 하고 미리 생각으로 걸리는 겁니다.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 아니겠습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어젯밤에 주무시고 모두 오셨지요? 오늘 하루 일을 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하루를 살기 위해서 밤에 잘 자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밤과 낮이 마음으로 볼 때는 어디 둘이겠습니까? 묘한 점은 뭐냐 하면, 낮에 여러분이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한 것이 그대로 반영되고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밤에 잘 때 육신은 놔두고 의식들이 나가서 온통 자기가 생각하고 행하고 말한 대로 움직이고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일을 안 저지르게 생각을 했다면 안 저지르게 행동을 하는 것이고, 저지르게 생각을 했다면 저지르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마음속에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잘 때는 육신을 내버리고 하니까 제한도 되지 않고, 낮에 입력이 된 대로 나가서 활동을 하면서 털구멍을 통해서 나쁘게 생각했다면 나쁘게 가져오게 만들고, 좋게 생각을 했다면 좋게 인연을 맺어서 가져오게 만들고, 화가 나지 않게 모든 걸 놓고 갔다면 밤에 잘 때에도 화가 나지 않게 수습을 하게 되는 겁니다. 항상 내가 하는 대로 원숭이처럼 쫓아간단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대로 입력이 돼서 원숭이처럼 그냥 쫓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밤이 따로 있고 낮이 따로 있다고 하겠습니까? 또 정신이 따로 있고 육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이 공부를 안 하면 무명을 벗어나지 못해 악의 무명 속에서 허덕거리고 있다가 차원에 의해서 또 육신을 형성시켜 나오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그 육신은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모습을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가져나오게 돼있으니 이 공부를 안 하고 되겠습니까.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이 공부를 해서 여래천에 들게 되면 하는데 여래천이란 무엇인가? 일체제불의 마음이 한마음으로 구성된, 즉 말하자면 국토다 이겁니다. 한마음으로 이어져서 모두가 일체 심봉으로서 뭉쳐진 둘이 아닌 까닭에 ‘여래’라고 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면의 육체 속에 많은 생명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 한 몸을 여래의 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여래국의 모든 마음이 가설이 되고 직결이 돼서 돌아간다면, 쉽게 말해서 아픈 사람이 “주인공, 당신만이 아프지 않게 할 수 있잖아!” 하고 맡겨 놨을 때, 한 찰나에 일체제불의 마음이 내 마음을 통해서 약사가 되어주는 겁니다. 약사가 돼주고 통신이 될 때에 두뇌로 인해서, 즉 누진으로 인해서 대뇌 소뇌를 거쳐서 중뇌에서 결정을 내려서 사대로 통신을 합니다. 사대로 통신을 하면 사대의 모든 생명들이 작업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심오한 겁니다.
그리고 죽어서 이 몸을 벗는다 하더라도 한 찰나에 부처님 국토에 한마음으로 구성되면서 이 세상에 다시 출현을 할 때는 아주 유능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될 수 있고,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가르치고 모든 사람을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등장을 하겠죠. 그렇게 태어나는 사람은 한마음 부처님 여래천에 모두가 직결이 돼있기 때문에 살아나가는 데도 군더더기가 붙지 않고 여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재력과 능력과 창조력을 가지고 나오는 겁니다.
천차만별의 생명들이고 천차만별의 모습들이 천차만별의 그 마음 씀씀이를 가지고 차원대로 가고 있는데 왜 별나게 스님은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놓으라고 그러십니까, 하겠죠? 지나다니면서 분수 보셨겠지만 분수에서 물이 나오는데 말입니다, 묵은 물은 겉으로 나오고 겉의 물은 다시 묵은 물이 됩니다. 한군데로 나와서 한군데서 흩어지는데, 흩어지면 흩어지는 대로 또 모여서 거길 통해서 또 나오지 않습니까? 통하는 데도 한군데밖엔 없어요. 들어가고 나오는 구녘이 한군데밖에 없어요. 거기를 거치지 않으면 일체 모두가 이어지지 않아요. 안 그럽니까? 그래도 아리송합니까? 우주천하 천차만별의 만물만생이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팔만대장경이에요.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에 그렇게 좋은 말씀을 설해 놓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 용어를 알 수가 없고 감지가 되지 않아요. 그때 그 시절에 맞는 용어를 썼기 때문에 시대가 변천하고 모두가 발전이 되고 변해가기 때문에 변하는 대로 용어는 바뀌게 돼있죠. 뜻은 똑같지만 용어는 바뀌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세요. 옛날에는 박으로 만들어서 쓰지 않으면 바가지를 쓸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프라스틱으로 바가지를 잘 만들어서 쓰니 박 바가지는 소용없지 않습니까? 일체가 다 개선이 되고 일체가 다 변화가 되고 용어가 바뀌고 이랬습니다. 그러니 뜻은 그대로 하되 용어는 바꿔서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될 일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때로는 저더러 경(經)의 말씀은 안 하고 만날 이런 말만 한다고 그러실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말이 따로 있나요? 부처님께서도 여러 중생들을 위해서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내 몸같이 생각하고, 두 자리로 보지 않으시고 모두를 이끌어가실 때에 상대를 이익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말도 서슴지 않고 방편을 쓰셨지요. 그러니 나를 말 잘하는 앵무새로 만들지 마시고 될 수 있으면 말이 말로 떨어져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말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마음으로 새겨서 받아들이시고 현 생활에 적합하고 이익되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쓸 수 있는 그런 금덩어리가 되십시오. 금덩어리도 자꾸 생산을 해내야 빛이 나지, 금덩어리 그대로 두면 빛이 나질 않아요. 분수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돌아가듯 말입니다.
주인공에 잘되는 것도 놓고 안되는 것도 다 놓으세요. 그걸 시발점 종점으로만 생각하면 됩니다. 시발점에서 내리는 사람이 있고 내가 타기도 하고, 종점에서도 내가 내릴 때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는 사람은 시발점일 테고 내리는 사람에겐 종점이겠지요. 이처럼 동시에 타고 내리는데 어떠한 것을 안된다 된다는 말로 소홀히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타는 것도 내리는 것도, 안되는 것도 되는 것도 다 법입니다. 안되는 것은 나를 더욱 튼튼한 반석처럼 만든다고 생각하신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놓을 수 있습니다. 또 되는 것은 되는 거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해야지요. 타는 것만 법이고 내리는 건 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여러분들 생명을 유지하고 나갑니까. 일체가 다 그러하듯 여러분의 마음이 바로 체가 없는 마음, 맘대로 쓸 수 있는 마음인데 왜 마음대로 못합니까? 내릴 때는 내려야 하는데도 부득부득 타고만 간다면 그건 잘못되는 일이죠. 타는 것도 내리는 것도 둘이 아니니 그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놈이 얼마나 묘하고 광대무변합니까. 그렇게 시공을 초월해서 마음대로 할 때에 비로소 만물의 영장이면서 자유인이라고 이름할 수 있고, ‘여래’라고 하는 것도 이름일 뿐이에요. 모두가 한데 이어져서 돌아가는 둘 아닌 도리를 깨치신 분이 바로 여래니깐요.
한마디만 더하고 여러분의 질문 받겠습니다. 내 자성불 주처는 자가발전소입니다. 여기에다 일체를 놓으면 충전이 되고 통신이 돼서 한 찰나에 일체제불의 국토에 내 마음을 통해서 한마음이 돼준다 이겁니다. 그래서 아프면 약사가 돼주고, 어려우면 관세음이 돼주고, 좋은 데로 못 가면 지장이 돼주고, 명이 짧으면 칠성이 돼주고, 물에 들어가서 어려우면 용신이 돼주고, 길을 걸을 땐 지신이 돼주듯이, 여러분이 아프거나 또 애고가 있거나 어떠한 문제든지 다 거기에 속하는 겁니다.
부처님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에요. 그런데 부처님이라는 이름조차도 바로 ‘무(無)’ 했단 말입니다. 공했기에 마음과 마음은 둘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로 이어져서 돌아갑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러하죠. 마음을 넓혀서 보면 모두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습니다. 물론 육신을 빌려서 형성됐다면 우선권은 있겠지요. 내 몸을 내가 거두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회의 모든 것을 거둘 수 있겠습니까. 내 몸도 못 거두니 내 가정도 화목하지 못하고 부모 형제 자식 모두 화목을 도모하지도 못하는 겁니다. 마음이 하나가 돼서 돌아가야 화목을 이룰 수 있겠죠. 마음을 붙들어야 육체를 붙들고 육체를 붙들어야 화목을 도모하고 화목을 도모해야 모든 게 공덕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태어나서 한 생을 살아가면서 모습의 옷이 낡아지기 전에 이 도리를 알아야 다시 새 옷을 입고 나올 때에 자유스럽게 내가 입으려면 입고 말려면 말고, 어떤 옷을 입든지 선택해서 입을 수 있는 겁니다.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데도 강요에 의해서 자기가 한 대로 무명에 갇혀서 어쩔 수 없이 되는 겁니다. 고기가 됐으면 고기 대접밖엔 못 받고 개가 됐으면 개 대접밖엔 못 받을 거고 사람이면 사람 대접을 받을 테죠. 사람도 뜻을 넓히지 않고 지혜롭지 못하면 사람 대접을 제대로 못 받겠죠.
사람이 태어나면 이러이러하다고, 또 일체 만물만생 살아나가는 게 동등하다고, 일체 생명이 둘이 아니라고 모든 부처님들이 말씀하셨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납득을 못한 채 무슨 귀신이나 다루는, 목탁이나 치고 염불이나 하는 것이 불교인 줄만 안다면 정말 어리석은 생각일 겁니다. 천만 냥을 주고 만만 냥을 주고 이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마음공부입니다. 내가 여러분한테 돈이나 받아서 잘 살고 잘 입고 잘 먹고, 이름이나 나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몸뚱이도 버릴지언대 무엇을 가져갈 게 있다고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까. 가져갈 거라면, 나나 여러분이나 악업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업식이 영혼에 부착이 돼서 그림자처럼 쫓아다니겠죠. 이 세상에 다시 나온다 하더라도 또 그 속에서 허덕이고 빠져 나오지 못하게 발목이 비틀어 매질 겁니다. 그러니 이 도리가 엄청난 도리라고 생각하시고 이 공부를 못하면 아예 세세생생에 발을 빼지 못할 문제들이 지금 압도적으로 온다는 것을 잘 생각하셔서 업식 무명 속에서 벗어나서 세세생생에 자유인이 되기 바랍니다.
▲질문자1: 죄업과 인과가 있다면 확실히 지금의 내 안에 있는 것으로서 내 안에 선업과 악업이 잔뜩 실려 있으니 지금 크게 한생각을 일으켜서 진실로 놓아버린다면 업의 테이프는 공테이프가 될 것이라고 『한마음 요전』에서 설하셨습니다. 이는 선업도 악업도 모두 쉬고 주인공을 믿고 맡겨 놓는 것이 재입력하는 작업이니 재입력하는 수행만 하라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가르침 바랍니다.
▲스님: 아까도 얘기했듯이 시발점에서 차를 탔으면 탔을 뿐이고 종점에서 내렸으면 내릴 뿐이죠. 마음 주인이 육신을 끌어 타고 내리게 했을 뿐이지 그것을 집착해서 타고 내린 거를 잔뜩 마음으로 껴안아 짊어지고 다닌다면 그게 바로 업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만을 방편으로 삼았다 해서 절대로 그것만 생각하지 마세요. 일체 살림살이가 다 그렇습니다. 여기 올라오실 때 발자국 짊어지고 오시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오기는 틀림없이 왔는데 짊어지진 않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생살이를 다 그렇게 사십시오.
▲질문자2: 저번에 집에서 화단을 가꾸다 잡초가 무성해진 것을 보고 죄다 뽑아 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불현듯 화초나 잡초가 다 같은 불성을 지니고 있는데 어느 것은 기르고 어느 것은 뽑아 죽이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라면 분명히 둘이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꽃은 가꾸고 잡초는 뽑아버려야 하는지요?
▲스님: 그것은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지, 화초를 기르는 것도 없고 잡초를 뽑아버리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차를 타고 내렸을 뿐이지, 타는 거는 화초를 기르는 것이요 내리는 것은 잡초를 뽑아버린 게 됩니다. 내리는 것도 법이고 타는 것도 법이듯이 기르는 것도 법, 뽑아버리는 것도 법입니다.
그런데 그 뽑아버린 것이 그냥 뽑아버려지는 게 아니라 다시 차에 올라타듯이 다시 꽃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뽑아버릴 때에 내가 무심으로서 잡초를 뽑아버렸을 땐, 벌써 내 마음과 더불어 아름다움이 하나가 되기 때문에 아름다운 꽃으로 화해서 그 잡초는 다시금 필 겁니다. 모든 물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순리로서 그렇게 되듯, 잡초든지 꽃이든지 나무든지 다 먹여 살릴 수 있는 빗물과 같이 말입니다. 그것은 순간 보일 때 잡초이지 또 한 번 돌아서 아름답게 꽃으로 나온단 말입니다.
잡초도 잡초대로 그냥 있지 않고, 우리 인간도 인간대로 그냥 있지 않고 모두가 화해서 변화가 되고 또 한 찰나 돌아가면서 바꿔집니다. 세상만물이 다 그러합니다. 낮이 있고 밤이 있듯이, 예를 들어서 용광로에다 녹이 슬은 쇠를 집어넣으면 다른 걸로 생산이 돼서 나왔다가 또 헐어지면 용광로로 들어가서 다시 다른 모습을 가지고 나오지 않습니까? 그거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잡초를 뽑아버린 것도 뽑아버린 게 아닙니다.
▲질문자3: 저는 슬하에 사 남매를 둔 어머니입니다. 지난 4월말 경에 애가 속을 썩이고 안 들어 오길래 예감이 이상해서 쓰레기 값이 뭔지 몰라도 얼마 보시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집 근처 잔디밭 앞에서 영 다리가 떨어지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잠시 앉아 있었는데 선원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어느 스님께 넉넉하지는 않지만 정성을 올리면서 천혼문을 올려달라고 부탁드리고 왔습니다.
그 다음 날 볼 일을 보고 오니 잔칫집에 보낼 봉투가 안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한테 물어봐도 모른데요. 그런데 그날 저녁 우리 애가 후배아이더러 동생으로 사랑했는데 봉투를 가져갔냐고 하면서 두들겨패다가 칼로 걔 등어리를 두 번 찍었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 기절했다가 깨어보니 상처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다음 날 일어날 일 때문에 벌써 주인공 자리에서 다시 절에 가게 한 거라고 생각하니 감사함을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조건 보시만 하는 줄 알았더니 쓰레기 값이라는 게 분명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스님: 지금 쓰레기 값이라고 하는 얘기가 나왔는데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면 물건에 따라서 물건 값이 정해지지요? 그런데 물건 값을 주고서 물건을 가져올 때는 물건을 준 사람도 없고 물건 값을 준 사이도 없이 양면이 다 준 사이 받은 사이가 없어요. 우리가 이 도리를 완전히 터득한다면 자비로서 줄 사람은 주되 자기 혼자 주는 게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자기 몸뚱이 속에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데 자기 혼자 했다는 얘기를 할 수 있습니까? 모두 한마음으로서 이루어지는 거지요. 그리고 한마음으로서 이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먹었다, 자기가 줬다, 자기가 했다 그럴 게 하나도 없어요. 그렇다고 ‘내가 일을 하지 말아야지. 내가 뭐 이런 거를 하나? 공부를 하는 사람이 무슨 이런 일을 닥치는 대로 해?’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닥치는 대로 마다하지 말고, 가는 것을 일부러 잡지 않는 것이 순수하고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꿈에 ‘얼마를 시주해라’ 할 때도 있겠지요. 물론 돈이 있는 사람은 괜찮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자기 주처에서 자기가 없고 있는 걸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니 없는 건 너가 더 잘 아는데 나를 테스트해 보려고 그러는구나, 이것도 재료구나 하고 굴리는 마음 씀씀이를 자꾸 터득하세요. 시주하게 하는 것도 그 놈이고, 못하게 하는 것도 그 놈이고, 할 수 있게 하는 장본인도 그 자리이니까요. 어떤 사람은 스님이 저렇게 해가지고 어떻게 사찰을 운영해 나가나 하지만, 올바로 가르쳐서 올바로 이끌어 나가는 그 마음이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한마음으로서 부처님이 있다면 할 것이고 없다면 못할 것이지, 내가 뭐 등에다 혼자 특별나다고 써 붙였습니까? 그렇다고 옛날 어느 사람처럼 버선목에다 잔뜩 끼워놓고 한 푼도 시주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죠.
그래서 내가 호통을 쳤어요. 그때는 버선목에 통장이 10개나 들어있는데 어쩌면 피를 쏟고 그렇게 쓰러지는 남편을 위해서 한 푼도 못 내 놓느냐고 야단을 쳤더니 스님이 그 속에 있는 걸 어떻게 아느냐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 마음이 알기 때문에 내가 아는 거라고 그랬죠. 그랬더니 마지못해 내놓고 정성을 들이고선 그 병이 나았지요. 욕심을 부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어떤 때는 일부러 그렇게 해줄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점은 이해하시고 다시 한번 더 내 마음 속 양심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그런 마음자리가 되길 바라겠어요.
▲질문자4: 스님, 저는 너무 감사해서 이 자리에 용기를 내서 왔습니다. 언젠가 스님께서 법문하시면서 “이 한마음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집에 부지깽이 하나라도 늘지 않았으면 어디 나와 봐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씀 한마디를 지니고 그동안 정말 열심히 했었는데, 이번 토요일 날 새 집에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부산지원 가까이에 조그만 아파트를 하나 마련했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스님: 이 공부 하다보면 부지깽이 하나라도 늘어가면 늘어갔지 줄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를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정말 믿지 않고 배척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진실하게 얘기해 드릴 것은, 시주를 할 것도 없는데 내가 이렇게 생기면 해야지 하고 미리 마음먹지 마십시오. 시주를 한다고 미리 생각을 해놓지 마시고, 생기면 생기는 대로 그냥 하고 싶으신 대로 하세요. 또 어떤 때는 돈이 생겼다고 뭉텅 떼놓고 나서, 나중에 급하다고 그것을 되집어서 쓰지 마시구요. 되집어 떼어서 쓰고 다시 해놓는다는 건 말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아예 그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오히려 그렇게 되면 물건은 가져오고 물건 값을 줬다가 물건 값을 뺏는 거나 똑같으니까 부작용이 납니다. 그러니까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내가 모든 경험에서 여러분에게 이끌어드리는 말입니다.
▲질문자5: 스님, 매번 저희들을 위하여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시고 또 자상하게 법을 일러주시니 그 은혜야말로 하늘과 같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스님을 영원한 스승으로 마음 깊이 모시고 따르고자 합니다. 옛날 어느 조사께서는 감히 ‘부처가 이 자리에 있다면 죽여서 개나 주겠다’ 고 했습니다. 그것이 살불살조(殺佛殺祖)의 공안이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은혜가 하해와 같은데 감히 스승을 죽이겠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싶습니다. 스승을 받들어 모시면서 가르침 배우는 도리가 어떠해야 하는지 스님의 말씀을 청합니다.
▲스님: 아주 간단한 일이죠. 얼른 쉽게 말해서 팔만대장경을 집어삼키지 않는다면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둘이 아니다 하는 뜻은, 부처님의 마음을 집어삼킨다면 어디 제 마음과 둘이겠냐는 겁니다. 이 선(禪)도리는 부처님도 집어삼키고 일체를 집어삼키는 데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모습을 집어삼키는 게 아닙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 가십니까? 남편한테 마음을 줬는데 남편이 그냥 아내 마음을 집어삼켰어요. 집어삼키고선 일을 해요. 또 그 아내가 남편한테 말을 해가지고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삼키고는 일을 해요. 그럴 때에 찰나찰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지요. 그러니까 과거 부(父), 자기 정신계의 자기와 현실계의 자기가, 생각을 안 할 때는 정신계의 부(父)가 되고 생각을 하고 일을 하려고 할 때는 부(父)가 자(子)로 하나가 되어 마음이 하나가 되니 그대로 법신이 것이죠.
그러니까 거지든 부처님이든 일체 만물만생을 둘 아니게 집어삼켜라 이런 뜻이죠. 먹어도 먹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먹습니까? 여러분이 자성 근본으로부터 이 세상만사가 돌아간다는 걸 아신다면 아주 착실히 하십시오. 착실히 하셔서 꼭 이 세상에서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이 쓰이는 금속이 되겠다는 그런 다짐을 하기 바라면서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73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