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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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 스님의 스님이야기-소천 스님/봉화 청량사 주지
82세때도 가부좌 틀고 정진
금강경강의 일인자로 꼽혀

스님은 82세였다. 승려생활은 마지막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3년여를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셨다. 노구를 견디며 앉아 있은 후유증으로, 스님은 둔부에 창이 생겼다.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님은 앉아 있기를 고집했다. 멈추지 않았다. 눈물겨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무렵이었다. 거동이 불편한데도 스님은 오후 두 세 시쯤에 아무도 모르게 방을 빠져나가 창고 쪽으로 겨우 걸음을 옮기시곤 했다. 나는 조심조심 뒤를 밟았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창고 안에는 도둑고양이가 새끼를 서 너 마리 낳아 품고 있었는데, 스님은 한 시간 가량 웅크리고 앉아 새끼 고양이들을 지켜보았다. 아주아주 자비스런 모습으로. 아주아주 사랑스러워 어쩔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스님은 거의 매일 같이 일과처럼 반복했다. 아무도 모르게 반복되는 스님의 밀행(密行).
아마도 누가 알면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들에게 해가될까 저어해서 그러시는 모양이었다.
소천(韶天) 큰스님의 이런 모습은 도둑고양이가 새끼들을 데리고 그곳, 은신처였던 창고를 떠나갈 때까지 계속 이어졌으리라 생각된다.
사랑스런 손주들을 바라보듯, 따사로운 햇볕 고운 오후의 한 때를 골라 일과처럼 창고 쪽을 오고가시던 스님의 모습이 새삼 망막을 스친다.
병든 노구를 이끌고 힘들게 한 걸음 한 걸음 떼 놓으시며 주위를 경계하며 창고 쪽을 오고 가시던 소천 노스님. 그즈음 나는 삼년째 노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다. 인천 보각사에서였다.
정화교단 초대 교무부장과 서울 대각사, 경주 불국사, 구례 화엄사 주지등을 역임하며 호법·구국운동을 전개하시다가 69세 무렵에 보각사에 주석하시면서 사무를 일신하고 참선과 교화 운동에 전념하셨다.
소천 스님의 행장은 특이하다. 15세 때 서울 종로에 있는 한남서림이란 책방의 주인으로부터 우연히 <금강경>을 전해 받은 뒤로 스님은 <금강경>에 깊이 빠져들었다. 심취했다. 23세 때 서울에서 3·1 독립운동에 참가한 뒤 북간도로 탈출, 김좌진 장군 휘하에 머물다 다시 북경 등지를 거쳐 국내에서 활동했다. 일경의 추적을 받자 산중 암자에 피신, 이후부터 불교연구와 구국 구세원리의 선양에 전념했다.
소천 스님은 39세 때 <금강경강의>를 처음으로 간행, 여러곳에서 설법하며 수많은 병자들을 한 자리에서 고친 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때부터 세간에선 스님을 일러 ‘신법사(스님의 속성이 신씨다)’라 부르며 칭송했다. 8·15 광복을 파주의 조그만 토굴에서 맞은 뒤 국토 분단과 좌우익 대립으로 민족이 누란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고자 ‘바른 정신’ ‘독립의 넋’ 등 수천 매에 달하는 원고를 집필했으나 출판을 보지 못했다.
스님은 54세 때 6·25 전쟁을 맞아 부산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드디어 56세 때 금정산 범어사에서 용성 선사를 은사로, 동선 선사를 계사로 하여 출가했다. 시쳇말로 늦깎이 중의 늦깎이었다.
스님은 <금강경강의>를 재간하고,‘금강경독송 구국원력대’를 조직하여 구국 구세 호법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72세때 활화산 같은 원력으로 <원각경강의> <반야심경강의> 등을 차례로 간행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금강경을 독송하자.
나라를 구하는 것은 곧 내 집을 구하는 것이며 내 몸을 구하는 것이며 내 마음을 구하는 것이 된다.… 금강경을 독송하면 왜 나라가 구해질까? 금강경은 모든 유위법(물질), 무위법(진리)이 나온 곳이며 그로 하여 병든 나라와 정신을 깨끗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천 스님께서는 ‘금강경독송 구국원력대의 외침’이란 글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노후의, 그분의 좌선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해 얻은 참혹한 병고의 시달림, 그런 속에서도 놓지 않던 탐구에의 열정.
소천 스님은 팔십 평생을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길에서 보냈다. 만주와 북경, 서울과 심산의 토굴을 전전하며 구도와 구국 구생(求生)의 일념으로 물흐르듯 살아왔던 그야말로 수행납자였다.
파란만장했던 소천 스님, 그분의 행장이 지금 이 시점에서 새삼 되돌아 보임은, 꿈결처럼 아련하게 떠올라 옴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병든 노구를 이끌고 도둑고양이가 새끼들을 품고 있는 창고로 들어가 한 시간 가량 웅크리고 앉아 지켜보곤 하던 82세의 어느 날, 햇볕 고운 어느 날 스님은 입적하셨다. 스님의 육신은 다비되어 본사인 금정산 범어사 부도전에 모셔졌다. 거기, 부도전 한쪽에 고이 모셔졌다.
200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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