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 죽는다 하는 것은 말짱 거짓말
항상 말씀드리지만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마음은 우주 삼라만상을 빚어내기도 합니다. 삼라만상, 일체 만물만생을 다 마음으로 그려내기도 하고 마음으로 짓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마음은 정말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보물입니다. 그래서 한생각을 잘 굴리면 일체가 생기고 한생각을 쉬게 되면 모든 고에서 벗어나게 되고 모든 것이 소멸됩니다.
어떤 이들은 한생각에 어떻게 그렇게 다 소멸될 수 있을까 하지만 믿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생사에 관한 문제도 다 놓아집니다. 죽고 사는 것도 다 놓게 되면 고에서 벗어나는 거죠. 산다 죽는다 하는 것은 말짱 거짓말입니다. 그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름이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것과 같은데 죽는 것이 뭐 별건가요? 무명을 쓰고 살다가 무명이 벗어지면 다른 무명을 쓰고 다시 나오고 하는데 마음의 발전을 해야만이 산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마음의 발전, 즉 정신계의 발전을 해야만이 물질계의 발전도 할 수 있거니와 여러 가지로 중용을 할 수 있어서 자동적으로 자유자재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양을 올린다 하는데 그것을 올리는 자는 누구며 받는 자는 누굽니까. 지어서 올리는 자도 자기요, 받는 자도 자깁니다. 발우 한 그릇 먹는다 해도 내면으로 볼 때는 내가 먹는 게 아니라 공동체로서 먹는 것입니다. 몸속에도 수십억 마리의 모든 생명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네가 먹었다, 내가 먹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양 한 그릇을 내가 먹는다 하더라도 생각을 잘하면 공양이 되고 생각을 잘못하면 그냥 밥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잘하면 네가 먹었다, 내가 먹었다 할 게 없기 때문에 그대로 공양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공양을 올리게 되면 공덕을 짓는다 이런 소립니다. 공양이 아니고 개별적인 밥이라면 공덕이 될 수가 없습니다.
공덕이 된다는 것은 내 한 몸의 조직체, 즉 모든 생명들이 한 그릇을 놓고 다 같이 먹는다는 뜻입니다. 다 같이 먹으니까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서로서로 작용을 해주니까 공동체이고 공덕이 되죠. 공덕이 된다는 뜻도 그렇고, 공양을 올린다 하는 것도 그렇고, 공향을 피운다 하는 것도 이런 데서 오는 겁니다. 참다운 공양을 올리면 삼라만상 대천세계 만물만생 전체가 한 그릇을 놓고 내부에나 외부에나 전체가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덕이 될 수밖에요.
나를 떠나서 상대를 믿는다면 공덕이 될 수가 없고 공양이 될 수 없으며, 마음의 향, 즉 공향이 될 수가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공덕이 되게끔 공양을 올리고, 향을 피우고, 행을 하고, 마음을 내라 이거죠. 바깥으로 아무리 공양을 많이 올리고 시주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하나도 공덕이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조직체로서의 운영을 하는 거지 조직체가 아니고는 운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회사를 봐도 조직체이기 때문에 운영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따로 조직체라는 이름 없이도 말입니다. 회장, 사장, 총무, 상무 및 여러 부서의 직원들로 조직이 돼있기 때문에 질서정연하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내가 먹는다 하더라도 내가 먹는다고 하면서 아무렇게나 하지 말고, 단 한 숟가락을 먹더라도 참다운 공양이 되게끔 하라는 겁니다.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는 것도 둘이 아닌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 하고 돌아가는 전체가 그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먹든 한 그릇을 올리든 공양은 공양입니다. 더불어 둘이 아닌 까닭이고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어찌 내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만을 위해서 제사를 지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는 사람은 내가 먹는 밥 한 그릇 가지고도 천도를 할 수가 있는가 하면, 내가 먹는 밥 한 그릇 가지고도 지극하게 공양을 올릴 수 있다 이런 말입니다. 이 도리를 알면 아주 멋진 자유권을 가지고 행하기 때문에 공덕이죠. 내가 먹는다고 해서 공양이 아니고 올린다고 해서 공양인 것이 아닙니다.
향을 하나 피운다 하더라도 마음은 체가 없어서 우주 삼라만상을 한 찰나에 돌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남음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물질적인 향이 아니라 마음의 향을 피우라 이겁니다. 잘 생각해서 공덕이 되게끔 마음을 내는 것이 바로 마음의 향입니다. 부처님 전에 예배를 올릴 때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하는데 이 다섯 가지 향이 뜻으로 무엇인가를 알고 우리가 향 공양을 올려야 합니다. 모두가 다 공양이 되게끔 하고, 공동체로서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구할 수 있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첫째 계향이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누가 되지 않게 하며, 스승에게 누가 되지 않게 하며, 자기 자신에게 누가 되지 않게 하라. 그리고 물질계와 내면세계에서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고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화목을 가져올 수 있고, 더불어 나쁜 것을 녹이고 선행을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기게 하는 것이 계향 아닌 계향입니다.
둘째 정향이니, 굳건히 주인공을 세우고 나쁘고 악한 게 다가올 때는 한생각 잘 내어 굴려서 놓고, 또 선행을 했든 좋은 일이 생겼든 감사하게 생각을 해서 굴려 놓고 물러서지 않는 것이 정향입니다.
세째 혜향이니, 지혜로운 마음으로써 물질계와 내면세계를 둘 아니게 관찰하고 체험하는 도리가 바로 혜향입니다.
네째 해탈향이니, 만물만생이 무명에 묶여 있는 것을 풀며 여여하게 다스려 나가는 것인 해탈향입니다. 그것도 이름해서 해탈향이지, 해탈향 아닌 해탈향이죠.
다섯째 해탈지견향이니, 우주 삼라만상 일체 만물만생을 느끼고 다스림이 항상 밝아서 걸림없이 구족함을 해탈지견향 아닌 해탈지견향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향이 바로 오온의 직결심이 일심으로서 돌아간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이것만 닥친다고 이것만, 예를 들어서 의사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기만 하지 다른 건 못하고, 공업자는 자기 전공 분야만 하고, 천문학자들은 천문학에 관한 것만 하고 다른 분야는 못하는 게 많으면 다가오는 그 모든 것을 어떻게 타파를 합니까. 그러니까 가정에서도 윤회성이든지 영계성이든지 업보성이든지 또는 세균성이든지 그 어떠한 고뇌가 닥친다 하더라도 어느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전부 타파해 나갈 수 있는 그러한 여건을 가져야만이 여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이렇고 저렇고 경전 얘기만을 하지 않고 마음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해드립니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건 마음 씀씀이와 올바른 행동입니다. 마음을 잘 써야 행동을 잘하고, 행동을 잘해야 말을 잘하고, 조건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말을 할 수가 있고, 여여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화가 나면 화가 나게 하는 것도 그 자리요, 화가 안 나게 하는 것도 그 자리이니 그 자리에다가 즉시 돌려서 화가 안 나게끔 하는 도리를 아셔야 합니다. 화나는 거 하나로 표현을 했지만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표현을 하기를, 구정물을 새 물로 갈아서 먹고 써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한 가정에 아버지, 어머니가 식구들을 이끌어나가고 있는데, 때로는 어머니가 되고, 아내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형이 되고, 사위가 되고, 아들이 되고 이렇게 바뀌듯이 부처님 마음도 그러하다 이겁니다. 그래서 부처가 중생이요, 중생이 즉 마음이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고 동일하다 이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한생각에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를 지을 수도 있고 또는 일으켜서 생산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려서 생산한 것이 만물만생입니다. 이점을 잘 생각하신다면 법당에 가서 초를 켜고 향을 사르고 공양을 올리는데 공양답게 올려야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공양을 올릴 때 내 공양 네 공양 하고 올립니다. 촛불도 내 것 네 것, 향도 네 것 내 것 하고 서로 올리려고 야단들입니다. 그 전에 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빙그레 웃고 옆에서 구경을 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게 아니죠. 죽을 둥 살 둥 내가 켜야 되고 누가 치우면 그냥 벌벌 떠는데 도리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꽃은 사람의 마음,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겁니다. 그래서 꽃 공양입니다. 아름다운 마음은 나뿐이 아니라 전체 조직이 돼 있는 우주만상이 조직이 돼서 전달을 하고 찰나찰나 돌아가는데 어떻게 내 아름다움만 있겠습니까. 그래서 꽃 공양 합니다. 향 공양은 우리가 아름다운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생각을 잘 해서 내는 것이 우주법계에 마음과 마음을 전달하는 그런 향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의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지요. 죽은 사람에게는 더욱더 향을 피우죠. 마음의 양식이라고 해서 말입니다.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발전도 할 수 없고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목석인데 어떻게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마음의 향을 켤 줄 알아야 공향이 되지, 마음의 향을 못 켠다면 공향이 아니라 그냥 물질적인 향일 뿐입니다.
그리고 미(쌀) 공양은 아까 얘기했듯이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 만물만생이 시공을 초월해서 찰나찰나 전달을 하고 돌아가면서 서로 공생 공용을 하고 있고 공식화하고 있는데 어떤 부처님이 혼자 받습니까. 어떤 귀신이 혼자 받습니까. 또 자기가 혼자 먹습니까. 혼자 먹어도 혼자 먹은 사이가 없지요. 내 몸 속에도 생명체가 수십억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네가 더 먹었니 덜 먹었니 할 것도 없이 더불어 함께 하는 공양이지요. 그리고 청수를 올리는 건 사람의 마음, 지혜를 말합니다. 지혜의 공양입니다.
우리 몸뚱이 자체가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돼 있습니다. 우리가 물을 먹든, 꽃을 꽂든, 일을 하든, 어떤 걸 하든 나만을 위해서 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연구를 해서 어떤 물건을 만든다 하더라도 자기만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까. 넓게 생각을 해보면 전체 공동으로 먹고 공동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하는 것도 바로 공행이 되는 거고 공양이 되는 겁니다.
안팎으로 공덕이 된다는 것은 내 마음이 공덕을 짓게끔 공양을 해야, 즉 말하자면 일거일동이 공동체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아시라고 해서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 하고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니 나만이 살았다고 하지 말고, 내가 했다고 하지 말고, 내가 줬다고도 하지 말고 모든 것을 내 아닌 내 주인공이 작용을 하기에 모두가 준 것이 없다는 겁니다. 상대방이 왔기 때문에 줬을 거고 내가 줬기 때문에 그쪽에서 오는 것이죠. 모두가 그렇게 서로서로 주고받고 사는 거지요.
공동체의 도리를 알면 공덕이 될 수가 있고, 공양을 올릴 수가 있고, 지혜롭고 맑고 밝게 살 수가 있다 이런 얘깁니다. 공동으로 돌아가고, 내가 밥을 먹건 남이 밥을 먹건, 하다못해 과자 하나를 먹더라도 공양인데 이 참다운 공양의 뜻을 어떻게 말을 해야 여러분이 잘 들을 수가 있을까 하고 이렇게 말씀을 해드렸는데 아시겠습니까? 마음, 마음 하는데 귀중한 그 마음으로 인해서, 빚어지는 모든 일들이 바로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 광명선원에 공양주가 계셨습니다. 그 공양주가 언젠가 한번은 이렇게 말을 합디다. “스님, 저는 이다음에 죽을 때도 자식들한테 가서 앓다가 죽을 수도 없고, 절에서 앓다가 죽자니 스님네들께 누가 돼서 아니 됩니다. 그러니 스님, 죽을 때도 그냥 살다가 앓지 말고 금방 가게 해주십시오. 내 처지가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는 걸 “그거는 보살님 마음이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게 아니지 않소.”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엊그저께 여기 와서 하고 싶은 얘기를 전부 하고 가다가 그냥 쓰러져서 가셨답니다. 그러니 서서 죽든지, 앉아 죽든지, 누워서 죽든지 옷 벗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겠지요.
늘 얘기합니다만 업을 녹이지 못해서 애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익지 못한 콩깍지와 같다, 익지 못한 콩깍지는 다 속껍질이 찰싹 붙어서 떨어지질 않는다, 까도 붙어서 떨어지질 않는다, 까도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아파서 질질 매고 죽네 사네 하고 온통 남을 괴롭히는 거와 같다는 말입니다. 표현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그러나 잘 익은 콩은 건드리기만 해도 깍지가 탁 터지며 콩이 나옵니다. 그거와 같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젠 늙었는데 내가 이런 공부는 해서 뭘 해?’ 하지만, 젊어서 또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젊은 사람보다 더 쉽게 젊어질 거니까 빨리 해야지요. 노인네든 젊은이든 애든, 남녀노소를 막론해 놓고 이 도리를 알아서 벗어나야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둣 하는 애고 속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의증을 만들어 가지고 의증을 내는데 일부러 만들어 가지고 의증을 낸다면 의증이 의증이 아니죠. 스스로 의증이 나야 그게 진짜 의증인 것이요, 자기에게서 스스로 의증이 나야만 의증이지 아는 것도 일부러 만들어 가지고 의증을 내는 건 의증이 아닙니다. 생각하면서 뛰고 뛰면서 생각하며, 부지런히 마음의 계발을 해서 바깥으로 뛰고 생각하고 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계발을 하고, 육체적으로도 뛰면서 해야만이 우리 스님네들이나 여러분이나 다 같이 그 공덕의 의미를 세밀히 알고 실천을 하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공부 하는데 그냥 왔다 갔다 하고 애고나 병고가 있다고 해서 그것만 애원하지 말고 그것이 바로 공부할 수 있는 재료다 이렇게 생각을 돌려서 해야 합니다. 그것만 앞장세우고 그냥 애통지통하지 마시고 경계가 닥쳤기 때문에 내가 공부할 수 있다, 그리고 실험을 해서 체험을 하겠다 한다면 고도 고가 아니에요.
차가 밀려서 지루하게 기다릴 때 좋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차가 멈추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냥 멀거니 있으면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그러나 가고 옴이 없이 마음이 가고 오는데 뭐가 지루합니까. 그렇다고 그냥 꼬투리를 잡아서 망상을 하지 마시고 또 망상이라고도 하지 말고 모조리 다가오는 대로 놓고 신성한 생각을 한번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남이 안 하는 신성한 생각, 그게 발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애고 병고 유전성 영계성 세균성 등 어떠한 문제가 다가온다 하더라도 코웃음 탁 치고 웃을 수 있는 그러한 믿음,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되겠지요. 그리고 ‘공부할 수 있는 재료가 또 생겼네. 네가 공부하라고 내놓은 거니까 아프지 않고 고가 닥치지 않게 하는 것도 너잖아.’ 하고 맡겨 놓고 모든 것을 타파하고 넘어갈 수 있는 재료로 알고 공부 열심히 하십시오.
공부를 열심히 못하시면 여러분 몸속에 있는 중생들이 화해서 응신이 되지 못합니다. 응신으로 화하지 못하면 여러분이 공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속의 모든 자생중생들이 화해서 천백억 화신, 응신으로서 둘 아니게 응해 줄 수 있는 그러한 분이 돼야 자기가 바로 그분이 되지요. 그래서 공부하는 분들은 정신계에 요점을 두고 자생중생을 제도해야 제도가 된다는 뜻이죠. 자생중생이 제도가 못된다면 내가 제도가 되지 않죠. 마지막 성불을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자생중생을 제도하려면 마음으로 다스리면서, 다섯 가지 향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그것을 잘 생각해 보신다면 모두가 공양으로서 아름다운 밝음이 역력히 여러분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럼 질문들 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자1: 오늘 질문은 제 개인의 질문보다 우리 여러 불자님들의 질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금생에 깨우치기를 원하는데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희들이 이렇게 마음공부 하다가 깨우치지 못하고 옷을 벗게 될 경우에 지금의 이 공부가 어떤 공덕이 되는 것인지 가르침 바랍니다.
▲스님: 우리가 하는 한 가지 한 가지가 공덕이 돼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 뜻을 아시죠? 밥 한 그릇을 먹어도 내가 먹는 것만이 아니다. 내가 먹어줌으로써 모두가 다 먹기 때문에 공양이다. 모든 거를 주인공에다가 감사하게 놓고 구정물을 맑은 물로 만들어서 쓰는 것도 그 자리고, 또 그렇게 하면 그대로 열반이다. 그래서 다음 생에는 부처로서 법신으로서 응신이 되고 이 세상 굴레 바퀴 속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건 같고 어떤 건 안 같고 이러는 게 아니라 내면으로도 공양공덕이요, 외부로도 공양공덕이요, 공심 또는 공용 공식화 하고 돌아가는 그 도리를 하나로 묶어서 주인공이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거야 틀림없지요. 더디고 빠를 뿐이지 틀림없습니다.
▲질문자1: 감사합니다. 공부하면서 모르는 것도 많고 의문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저희들 중에는 스님을 뵙고 질문을 하려 했다가도 막상 스님 앞에 서면 아무것도 질문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증의 힘이 약한 탓인가요, 다른 도리가 있는 것인가요. 가르침 바랍니다.
▲스님: 다른 도리가 있고말고요. 길을 가다가 엎어지면 그 땅을 짚고 일어나지 허공을 허우적거려서 일어나는 건 아니듯이 그 자리에서 나온 거라면,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상대가 있는 거지 여러분이 나오지 않았으면 상대가 없습니다. 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탓으로 다 돌려라 하는 건 바로 내가 있으니 부딪침도 있는 거지 내가 없으면 있을 리가 있나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나한테서 나온 거니까 주인공 너만이 이것을 타파할 수가 있고, 너만이 이런 의증을 타파해줄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게 뭐야?’ 하고 묻는 것도 그 자리에다 물으세요. 그래야 빠릅니다. 삼자한테 물어본들 `‘내가 배가 고프니 밥 좀 대신 잡숴주시오’ 하는 거나 똑같습니다. 내가 대신 먹는다고 본인이 배부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렵고 좀 답답하더라도 “네가 이런 답답함을 내놓은 거니까 답답함도 의증도 너만이 해소하고 너만이 풀어줄 수 있어.” 하고, 속에서 나온 거 속에서 풀도록 맡겨 놓으세요. 그래야 공부가 빨리 되지요.
▲질문자1: 감사합니다. 다만 저는 경계에 부딪혀서 그 순간 감정의 동요가 일어났을 때마다 자신의 감정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합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까 공부하는 방법으로 자심반조와 회광반조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말은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자심반조와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관법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요.
▲스님: 밝은 마음으로서 그 자리에다가 감사하게 놓고 구정물을 맑게 만들어서 맡겨 놓고 돌아가며 물러서지 않는 것이 바로 그 도리입니다. 회광반조나 자심반조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을 밝히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을 깊숙한 내면세계에 놓고 돌아간다면 그게 바로 회광반조입니다.
▲질문자1: 옛날에 어느 선사가 제자를 보고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공부가 조용한 중에는 그만한 편이나 움직이는 중에는 아직 멀었구나.” 하시면서 북두칠성을 보라고 했습니다. 남쪽으로 얼굴을 돌려 북두를 보라 함이 무슨 뜻인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얼른 쉽게 말하면 발은 하늘을 보고 머리는 땅 속을 본다 했습니다. 또 한 마디 하자면 모든 물질이 다 허망한 것이니 그 허망한 물질의 움직임이 움직임이 아님을 알면 바로 남쪽으로 얼굴을 돌려서 북방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북방을 볼 수 있다 함은 마음세계를 보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움죽거리는 것이 여러분이 움죽거리는 겁니까? 물질은 허망하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 허망한 것이 움죽거리는 것을, 움죽거림이 아님을 알라 한 것도 마음으로부터 움죽거림이 나오지 마음이 아니라면 움죽거림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의 주인이 하자는 대로 육신은 움죽거리게 돼 있으니 그러한 겁니다. “아, 고놈 칠성이 참 잘생겼네.” 이러기도 하지요.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닌 도리를 밝음에서 보라 이 소리나 똑같습니다.
남쪽으로 얼굴을 돌려서 북두를 봐라, 마음의 높음을, 얼른 쉽게 말해서 인간의 머리가 제일 위라고 하지만 머리가 위가 아니라 정신이 위란 얘기죠. 남쪽으로 얼굴을 돌리되 내면의 북두를 봐라. 그걸 볼 줄 알아야 어느 걸 하더라도 함이 없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움죽거려도 움죽거림이 아니고, 움죽거리지 않아도 움죽거림이요. 그 가운데 묘미가 있느리니라,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은 여러 조사들, 부처님들도 다들 앉아서 얼굴을 여기다 두고도 뒤도 보고, 옆도 보고, 땅속도 보고, 위도 보고 어느 거 하나 안 보는 게 없어서 ‘명경알 같다. 명경에 비치는 게 자기가 아니고 참자기인 팔망미인이 보여야 된다.’ 이런 거죠.
과거 내가 태어나기 이전과 현실, 미래 이 삼세가 바로 현심, 지금 이 자립니다. 삼세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항상 얘기했지요. 삼세가 있으니 네가 태어나기 이전을 찾아라 이러는데 그렇다고 태어나기 이전을 찾느라고 바깥으로 헤매고 도는 게 아니라구요. 과거도 자기요, 현실도 자기요, 미래도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표현을 이렇게 했지요.
작년 씨를 올 봄에 심었더니 싹으로 화했는데 작년 씨를 어디서 찾는가. 싹으로 화해서 열매가 맺히고 익어서 씨가 그 속에 들어 있는데 작년 씨를 작년에 가서 찾다니, 싹으로 화해서 태어난 것을 어디 가서 찾는가 하고 말입니다.
▲질문자2: 저는 25년간 중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사람인데 세상 사는 지혜를 얻고자 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우리가 교육이다 그러면 나쁜 길로 가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그 길로 가면 틀림없이 막다른 골목에서 결국 불행한 일을 자초할 것으로 확신이 설 때 “그 길로 가지 마라.” 이렇게 충고를 더러 합니다. 그러면서 급한 학생들은 정말 때리기도 하는데, 요새 고등학교 학생들은 선생님이 때리면 같이 대들려고 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얻어맞기도 하면서 학생들을 위해서 끝까지 선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어떤 학생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성품을 타고난 것도 같아요.
거듭 말씀드리면 원래 마음을 그렇게 타고나서 우리 선생님들이 충고를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교육력이 약해서 저희들이 그 애들에게 충고를 잘 하지 못해서 그런 건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면은 작년에 1학년을 다니다가 자퇴를 하고 다시 신입생으로 재입학을 해서 학교를 다니게 한 학생이 또 가출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을 붙들어서 학교에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과연 왔을 때 구타를 하면서라도 다시 학교를 다니게 한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서, 이러한 처지에 교육력이 정말로 약해서 더 이상 학생들을 다룰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학생들을 이끌어야 바르고 빠른 길이 오는가 하는 것도 의문스러워서 두서없이 말씀을 드립니다.
▲스님: 기르는 닭들을 우리 안으로 몰아넣은들 또 나가고 또 나가고 하듯이, 그거를 말로 하고 때려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붙잡으려면 마음을 붙잡아야지 육체를 붙잡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환경도 물론이거니와 선생님들도 마음 도리를 꼭 배워야 합니다. 육신은 물질이기 때문에 마음의 주인을 따라다니는 시자밖에 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마음으로 그 믿음을 가질 때,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학생들이 20명이면 20명, 100명이면 100명임을 알고 있는 그 점이 가설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공에다 모든 걸 맡기는 마음을 가질 때에 가설된 그쪽에도 불이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가설돼 있는 그 아이한테도 불이 들어오게 돼 있어요. 처음 오셔서 그렇지 관하는 법을 완전히 터득하신다면 아주 여여하게 웃고 이끌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발전도 시킬 수 있습니다. 모든 걸 다 놓으십시오.
▲질문자2: 제가 자녀 셋을 거느리고 가정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만 학교에선 한 학급에 40여 명 학생들을 데리고, 또 많은 학생들 생활지도를 하다 보면 정말로 그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가설을 시켜야 되는데 그 가설선이 다 연결될 수가 없는 그런 처지가….
▲스님: 아버지다 아들이다, 어머니다 딸이다, 부인이다 하고 알고 있는 게 가설이 본래 되는 겁니다. 관습에 의해서 자기가 안 된다는 생각에 빠져서 그렇지 그게 아니에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지구 바깥에도 나갈 수 있어요. 이 자리에 앉아서 여러분 댁에 갔다 올 수 있죠. 안 그럽니까? 그런데 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을 합니까. 그리고 가설이 안됐다고 생각을 합니까. 벌써 부부지간이나 자식지간이면 가설이 된 거죠. 친구지간에 알아도 가설이 된 거고 스승과 제자지간도 마찬가지죠.
▲질문자2: 예. 제 교육력이 약하고 능력이 모자라는 것을 자책하고 제 탓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제가 자연보호 명예감시관과 환경보존 감시원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꼭 나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무에서 나오는 산소를 사람이 마시고 또 사람이 내뱉은 이산화탄소를 나무가 마시며 주고받고 해서 서로 공생 공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뭇 사람들이 그 공생 공존 관계를 모르고 있는지, 산에 가면 나무를 짓밟고 환경을 더립히고 해서 지구가 지금 핵의 공포로 전 인류가 정말 몇 번 죽어도 죽을 만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과연 어디서 그런 것이 나오는 건지요.
▲스님: 그것도 마음에서 빚어지는 일들이지요. 뭐 한마디로 말해서 마음의 발전이 안됐기 때문에, 정신계의 발전이 안됐기 때문에, 그런 걸 모르니까 그러는 거지, 그 사람네들도 알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몰라서 빚어지는 일들이지요. 그러니까 모든 게 전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모르는 것도 마음이요 아는 것도 마음이요, 하는 것도 마음이요 못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마음의 발전이 지금 더 아쉬운 일이고 지금 정신계의 발전이 아주 시급한 시대에 도달하고 있다 이런 겁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마치며 이다음에는 여러분이 실험을 해보고 체험한 도리를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66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