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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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외할머니와 사루비아/이미령(동국역경원 역경위원)
외할머니를 떠올리면 언제나 자그맣고 바짝 마른 체구에 정갈하게 머리를 빗어 쪽지고, 눈부시게 새하얀 모시적삼을 입고서 화사한 꽃밭을 살피시던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 늦여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젊어서 한창 매력이 넘칠 때에는 밖으로만 다니셨습니다. 그러다 병든 노인이 되어서야 지어미의 곁에서 세상을 마쳤습니다.
외할머니는 장례 내내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초연하고 담담하게 조문객들을 맞으셨습니다. 외할머니의 모습에서 진한 슬픔이나 신세 한탄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바깥의 정인(情人)에게 다 줘버린 지아비가 무에 그리 그리워 눈물바람이란 말입니까? 아무리 지아비라 해도 무슨 정이 남았겠습니까? 과부 아닌 과부로 자식들을 키우며 모진 세파를 홀로 헤쳐가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데 애틋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며칠이 지나 왁자하던 가족들과 문상객들은 다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안에는 고즈넉한 침묵이 다시 돌기 시작하였고 예전과 다름없는 일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저는 마침 열려 있던 대문을 살짝 밀고서 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아, 그때 저는 보았습니다. 좁다란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새빨갛게 빛나는 사루비아를 바라보며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내시던 외할머니를….
차라리 후련하다며 기지개라도 쫙 펴실 줄 알았었는데 지금 저 눈물은 대체 뭐란 말입니까?
‘부부라는 게 뭘까?’
외할머니의 실루엣은 늦여름의 따가운 태양을 받으며 농익어가던 사루비아의 붉은 빛깔과 어우러져 어린 저의 가슴에 이런 물음을 새겨주었습니다.
정말, 부부라는 게 뭘까요?
부부의 연이라는 게 뭐기에 그토록 많은 남자와 여자 중에서 꼭 한 사람만 제 눈에 들어오고 제 마음을 태우다 죽을 때까지 함께 지지고 볶는 것입니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마음과 정으로 엮인 사이이다 보니까 사랑이 큰 만큼 미워하는 힘도 참 유별난 것이 부부지간입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참 아름다운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고왔던지 그 나라의 왕이 이 아이가 크면 자기 아내로 삼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도인들이 이 아이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리라 예언했습니다. 국왕은 높은 설산 중턱에 살고 있는 백조를 불러 여자 아이를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키우도록 했습니다.
여자 아이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백조 둥지에서 백조가 날마다 궁중에서 날라다 주는 밥을 먹으며 자라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수의 상류에 물난리가 났습니다. 한 청년이 물에 휩쓸려 내려가다 천신만고 끝에 백조의 둥지 위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아름다운 소녀를 보자 첫눈에 사랑에 빠져 버렸고, 소녀는 백조에게 들킬까봐 청년을 숨겨주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무르익어가자 소녀는 청년의 아이를 갖게 되었고 결국 일의 전모가 밝혀지자 왕은 그 소녀를 아내로 삼으려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구잡비유경).
부부의 연이란 것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요, 억지를 부린다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부처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지금 나와 내 배우자는 얼마나 기막히고 절묘한 인연이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부부들은 어째 그리도 쉽게 헤어지려 하는 걸까요?
사업에 실패했다고 갈라서고, 너무 일찍 만났다고 헤어지고, 평생 원수였었다며 갈라섭니다. 부부의 연을 맺으면 슬픔도 괴로움도 함께 헤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일까요? 사랑하고 행복할 때만 함께 살다가, 힘들고 지치면 헤어지는 것이 부부의 도리는 아닐 텐데 말입니다. 하긴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었는데도 헤어지는 부부나 연인도 있더군요.
“부부는 같은 신앙을 지녀야 한다. 같은 계율을 받고 똑같이 보시하고 똑같이 지혜를 키워가야 한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함께 지내고 내생에서도 서로 만날 수 있으리라.”(증지부 경전)
평생을 해로한 노부부를 통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시는 백년해로의 비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가만 생각해보면, 그날 외할머니의 야윈 어깨 너머로 피어있던 사루비아는, 마지막 순간까지 꺼지지 말아야 할 부부의 사랑을 저에게 일러주려고 그토록 새빨갛게 빛났던 것만 같습니다.
200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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