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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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15) 초발심(初發心)이 정각(正覺)이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우루벨라의 산상수훈

저번 강의에서 우리의 일상은 ‘이미 오염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늘 ‘넘쳐나는 것’으로 더러워져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넘쳐나는지, 무엇이 오염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이 불타고 있다
어느날, 우루벨라의 해질 무렵, 붓다께서는 불을 섬기던 가섭 형제들을 데리고 산에 올랐습니다. 저녁 노을로 불타는 하늘을 보고 붓다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사람도 저와 같이 불타고 있다. 사람의 무엇이 불타고 있는가. 1) 눈이 타고 있고, 눈이 보는 물질이 타고 있다. 귀가 타고 있고, 귀가 듣는 소리가 타고 있다. 코가 타고 있고, 코가 맡는 냄새가 타고 있다. 혀가 타고 있고, 혀가 느끼는 맛이 타고 있다. 몸이 타고 있고, 몸이 접촉하는 감촉이 타고 있다. 의식이 타고 있고, 의식이 소비하는 대상인 생각이 타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불타고 있는가. 2) 다름 아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때문에 불타는 것이다. 그로 인해 3) 태어남과 늙음과 병듬과 죽음이 불타고 있고, 또한 근심과 슬픔과 번뇌와 괴로움(愁悲惱苦)이 불타고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이 모든 불타는 것과 그 원인에 대해 싫어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일체에 대해 싫어하는 생각을 가질 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불꽃이 꺼지고, 그때 근심과 슬픔과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우루벨라의 산상수훈입니다. 붓다는 “온 세상이 불길에 싸여 있다!”고 말합니다. 그저 보면 온 세상은 평온한 것 같지만, 정말, 시쳇말로 ‘불꽃 튀기고’ 있지 않습니까. 무성한 탐욕과, 그 탐욕으로 인한 경쟁의 칼 부딛치는 소리로 어지러운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모두 ‘눈에 불을 켜고,’ 노리는 것에 ‘혈안이 돼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불길을 잡거나 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불이 난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붓다는 우뚝 이 사태를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법화경>에는 삼계화택(三界火宅)의 비유가 있습니다. 집이 온통 불길 속에 싸여 있는데도, 사랑하는 자식들은 불이 난 줄도 모르고 태연히 소꿉장난이고, 가족들은 각자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엄청난 혼란에 싸여 있습니다. 이념적 대립과 갈등이 증폭되고 있고, 종교간의 골도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지역적 당파적 분쟁도 위태로운 수준입니다. 아니, 그렇게 거창하게가 아니라, 미시적 수준에서, 가령 가정에서의 부부관계, 부모자식 관계에서, 이웃과 직장 등에서 우리가 겪는 반목과 소모는 거의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온갖 형태의 관계 속에 갈등이 있고, 증오와 적대감, 잔인성과 끝없는 전쟁이 있습니다. 이런 적의와 갈등, 대립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겉으로는 평온한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거의 기적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역사는 외부적 변화를 통해, 가령 전쟁과 정변, 혁명과 개혁들이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외면적 시도들이 기대와는 달리 더 큰 폐단을 몰고 온 경우가 허다합니다.

내면적 변화가 필요하다
역시, 문제의 근본은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탐욕과 공격성, 그리고 무지로 인하여 우리는 내가 사는 이 청정한 법계를 더럽혀 온 것이 아닐까요. 세상 불행의 근본 원인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나’는 내가 비난해 마지않는 바로 ‘그 사람’이니까요. “나는 분열과 갈등으로 추악하고 잔인해진 이 기괴한 사회의 일원으로, 그것을 만드는데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을 느낄 때, 그때 비로소 세상이 바뀌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것도 완전히, 전면적으로 뒤바뀌는 굉음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초발심(初發心)이 곧 정각(正覺)입니다!
바깥을 향해 외치다 말고, 내부를 향해서 말을 걸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내 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눈이 눈을 못 보듯이, 우리는 우리가 날마다 저지르는 잘못의 실상을 분명히 자각하고, 그것을 경계하며, 나아가 그 흐름을 되돌리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이 모든 일의 관건은 삶의 이 실상, 그 고통과 비참과 직접 ‘대면’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외면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변명하거나 정당화하지 않고, 삶의 실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남다른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붓다는 이 어려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화살을 열 번 날려 과녁에 맞추기는 어렵다. 백번 날려 다 맞추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우리 삶의 비참한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붓다는, 놀랍게도, 사성제 가운데 처음의 고(苦)의 진리를 깨닫기가 가장 어렵다고 했습니다.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
역시 불교는 ‘이 언덕’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사람이나, 세속적 성취욕이 강한 사람, 그리고 사회적 교제와 정치적 성공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유형들은 불교를 가까이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운명과 세상의 무상함에 민감한 사람들이 불교를 찾습니다. 아니,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사람들 중에도, 자신의 성취에 불안감을 느끼거나, 그 대결과 정복의 와중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하기도 합니다. 아쇼카 왕이나, 조선의 세조가 그 전형적 인물이고, 최근에는 백담사에 가 머물던 전두환 대통령도 그런 케이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불교는 바깥을 기웃거리지 말고, 우선 안을 다스리라고 권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아무 것도 보태주지 않고, 다만 빚쟁이처럼 덜어갑니다. 혹, 불교에 챙겨갈 것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은 일찌감치 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불교는 나중에 “붓다가 왜 왔는지 모르겠다”거나 “붓다는 40년간 장광설(長廣舌)을 늘이고서도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불교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한사코 빼앗으려 합니다. 우리 내부에 있는 오래된 독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말입니다. 이들을 제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고 세상은 평온해질 것입니다. <상유타 니카야>에서 붓다가 말했습니다. “열반은 탐욕과 증오, 기만의 끝이다.”

그렇다면, 이제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우리 내부에 과연 “무엇이 쌓여 있느냐”일 것입니다. 그 정체를 알아야, 치우든지, 태우든지 할 것 아니겠습니까.
200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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